병원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가슴은 펴고,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중앙 로비에 위치한 안내창구는 두 평 남짓한 공간으로 이곳에서 나와 동료 한 명이 근무한다.
출근하게 되면 업무가 시작되는 아침 8시 전에 컴퓨터를 켜고, 밤새 창구에 쌓인 먼지도 닦아내고, 정수기에 물컵도 채워 놓어야 하다.
환자들이 사용할 휠체어를 정리하고, 수유방의 청결 상태를 확인한 후 자리에 앉으면 5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고 곧바로 민원들이 오기 시작한다.
진료 시작은 8시 30분부터지만 한 시간 전부터 이미 병원에 도착해 대기를 하는 어르신들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EMR이라는 병원 프로그램을 이용한 환자 안내 업무가 익숙해질 무렵 감당하기 어려운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바로 병원 이용에 불평불만이 갖고 찾아온 고객이다.
지난 이십 년 동안 만만치 않은(?) 기자들을 상대해 왔기 때문에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단 한 번의 이성을 잃은 불만 가득한 민원인 상대만으로 어처구니없는 생각임을 깨달았다.
상식을 뛰어넘는 이런 사람들을 겪을 때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하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인생을 경험하고 배우는 계기가 됐다.
민원을 상대할 때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경청이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오자마자 소리 지르고, 욕을 하는 민원인의 말을 경청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를 처음으로 당황시킨 민원인은 6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병원에는 거동이 불편한 내원객을 위해 휠체어가 마련돼 있다.
그러나 이 남성이 휠체어를 빌리기 위해 안내데스크 왔을 때는 휠체어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이날은 다른 날과 다르게 이른 시간부터 휠체어 사용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나는 휠체어 대여 장부에 성함과 연락처를 남기면 들어오는 대로 연락드리겠다고 안내했다.
그러나 이 남성은 "아니 그러면 환자들이 불편하지 않게 더 많이 비치하면 될 거 아니야!"라며 인상을 쓰며 성질을 냈다.
내가 왜 이 사람한테 욕을 먹어야 하는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게다가 휠체어는 고객의 편의를 위한 제공되는 서비스지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서비스가 아니었다.
이 남성은 영화 '부당거래'의 대사처럼 '호의'가 '권리'인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병원에는 더 많은 휠체어를 보관할 장소도 마땅치 않았다.
비록 욕은 먹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민원인에게 이해를 구하기 위해 "저희가 휠체어를 30대가량 준비해 놓았는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사용자가 많아 그런 거 같습니다."라고 좀 더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했다.
이어 "혹시 병원에 자주 오시는 거라면 저기에 계시는 분처럼 개인적으로 휠체어를 구입하시면 병원에 오셨는데 휠체어가 없어 고생하시는 일이 없을 거 같아요. 그리고 생각보다 비싸지 않더라고요."라는 말을 덧붙였다.
이런 데는 이 민원인이 오기 바로 전에 휠체어 가격을 알아봤기 때문에 정보 전달 차원에서 이 같은 설명을 덧붙였던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그러나 이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 말은 이 남성에게 민원의 빌미를 주게 된 꼴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이 남성은 오래전부터 별것도 아닌 소소한 일에도 소란과 민원을 제기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안내 데스크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와 동료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 남성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진료를 마치고 돌아온 이 남성은 어김없이 안내 데스크로 찾아와 십 분이 넘는 시간 동안 나에게 쌍욕을 퍼부은 후에야 병원을 떠날 수 있었다.
안내창구 업무를 하면서 든 첫 번째 깨달음은 "묻는 말에만 대답하자, 오지랖은 자칫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였다.
이 오지랖 근성은 훗날 또 다른 악성 민원을 경험케 하면서 내 뼛속 깊이 각인되고 나서야 사라지게 된다.
이런 악성 민원을 만나는 일은 나뿐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료도 마찬가지였다.
이 일이 있은 후에 나는 3미터 앞에 화가 난 얼굴로 다가오는 민원인이 있으면 나는 속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나한테 오지 마라, 제발 옆 동료한테 가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동료도 나와 같은 주문을 외웠다고 했다.
그렇다고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준비하지 않으면 여기 있는 동안 나는 민원인의 감정 쓰레기통에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가 책장 속에 꽂혀 있는 카네기의 인간관계론을 다시 꺼내 들고 정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악성 고객 응대법에 대한 인터넷과 유튜브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고객 응대 관련 영상들이 무궁무진할 정도로 많았다.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에 한편으로 위로가 됐다.
2주간의 공부는 두 가지로 정리가 됐다.
첫 번째는 '상대가 화를 낼 때 내 화를 삭이는 법'이고, 두 번째는 '경청하는 법'이다.
나름의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현장에서 실제로 유용한지 확인하면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