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을 기준으로 그렇게 나는 안내창구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계속>
안내 창구에서 가장 많은 일 중의 하나인 병원 위치 안내하는 것은 십 년을 있었으니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다음으로 많은 업무인 예약한 진료과 확인, 검사비 수납 여부 확인, 입원 환자 검색을 통한 안내는 병원 전산 프로그램을 통해 조회해야 하는데 난생처음 접하는 프로그램이어서 거의 멘붕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은 함께 창구에서 일하는 팀장이 이 프로그램에 익숙한 원무팀 출신이었다 것이다.
중학교 1학년에 입학해 영어 알파벳을 배우듯 하나하나 물으면서 업무를 처리해 나갔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때인 80년대 후반에는 중학교에 들어가서야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신경과는 바닥에 있는 노란색 선을 따라서 가시면 됩니다."
"화장실은 뒤편 오른쪽에 있습니다."
"채혈실은 왼쪽으로 계속 가다 보면 있습니다."
반나절 만에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수백 번을 반복한 거 같았다.
오후 5시 업무가 종료되고 우리는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병원 밖 골목에서 아무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넋두리할 힘조차 우리에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내일 출근 걱정으로 연거푸 한숨이 나왔다.
한편으로, 십 년 넘게 이 일을 해온 박선배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내 업무나 하려고 내가 이 병원에 온 것이 아닌데, 십 년 전 이직을 결정한 내가 한스럽고 후회가 됐다.
부서의 장을 맡아야 할 나이에 안내창구라니 내 처지가 불쌍하고 창피했다.
팀장의 자리에서 사원의 자리로 내려온 것도 화가 나는데 병원 안에서 오며 가며 날 바라보는 직원들의 눈빛이 두려웠다.
또 지인이라도 병원에 왔다가 안내창구에 앉아있는 날 발견하면 그들은 날 어떤 생각을 할까?
그때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이런 오만가지 생각이 날 괴롭혔다.
당장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월급 없이는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는 내 경제 상황에 더 화가 났다.
걱정하실 어머니를 생각에 억지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에 누워 가만히 생각해 보니 병원을 그만두면 할 수 있는 것은 몸으로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설거지를 마친 아내가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왔다.
"여보 어땠어?" 아내가 걱정된 눈빛으로 물었다.
말을 해봐야 더 걱정을 할 게 뻔하니 말을 안 하는 게 낫겠다 싶었지만, 평소 눈치가 빠른 아내라 차라리 말을 하는 편이 아내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을 거 같아 오늘 있었던 일을 꺼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아내는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여보, 내 마음 같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만두라고 하고 싶지만, 당신도 알다시피 우리 형편에 그럴 수는 없고, 딱 3년만 참고 일해줄래? 그 후에도 못하겠다 싶으면 그때는 그만둬도 좋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 둘이라면 택배 배송도 할 수 있을 거 같아. "
아내의 말이 맞다.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 병원을 그만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래. 그럴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리고 내가 부족해서 당신에게 이런 걱정을 안겨줬네. 미안해."
새벽 다섯 시를 알리는 알람에 잠에서 깼다.
옷을 주섬주섬 입고 집을 나섰다.
3월의 새벽 공기는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을 뿜어낼 정도로 아직 차가웠다.
에어팟을 귀에 꽂고 어젯밤 유튜브 영상을 보다가 다시 보기 목록에 저장해 놓은 영상을 듣기 시작했다.
공황장애를 이겨내고 작가로 강사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나와 비슷한 연령대인 중년 남성의 이야기였다.
이 남성은 회사에서 팀장으로 있던 자신의 자리를 후배에게 빼앗기고 사원이 된 사연부터 소개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출근길 지하철에서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 지하철에서 내려 역에서 가까운 약국을 찾았다고 했다.
자신의 증상을 들은 약사는 '공황장애' 같다고 했다.
나는 아직까지 공황장애가 올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 같아 감정이입이 되면서 온 신경이 이 영상에 집중됐다.
이 남성도 나와 마찬가지로 형편상 퇴사를 할 수가 없었고, 혼자서 이겨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한 것은 출근 전과 퇴근 후에 걷기였다.
퇴근 후에는 몇 시간을 하염없이 걸었다고 했다.
걸으면 걸을수록 조금씩 조금씩 마음에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렇게 걷기 시작하고 한 달 여가 지날 무렵 그의 아내도 그의 어린 딸도 저녁 식사 후 함께 걷기 시작했다고 했다.
가족과 함께 걷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직장에서 지친 어깨를 토닥여줬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한 것은 매일 같이 몇 개의 영어문장을 외우기 시작했으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신이 겪고 있는 자신의 이야기를 블로그에 글을 기록했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한 지 3년이 넘어갈 때쯤 두 가지의 신기한 일이 그에게 나타났다.
첫 번째 일은 TV 뉴스에 방송되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인터뷰와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상 수상식을 번역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두 번째는 매일 같이 쓴 자신의 글이 포털사이트 메인에 소개가 되면서 7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글을 읽고 갔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일은 출판사로부터 온 전화였다.
출판사는 자신의 글을 책으로 내고 싶다고 했다.
일기처럼 쓴 글이 책이 만들어져 판매가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 책은 현재 서점에서 구입할 수가 있다.
그가 바로 스몰 스텝의 저자 박용철이다.
인생의 위기에서 걷기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변화는 물론, 가정과 주위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변화시켰고,
행복한 인생으로의 변화를 이룬 이 사람의 이야기는 어쩌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용기와 도전의 씨앗이 되었다.
답답한 마음을 달래고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시작한 걷기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어려움 말고는 이전에는 몰랐던 정신적, 육체적 상쾌함 그 이상의 효과가 있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야 하는 것도 멜 로빈스가 쓴 '5초의 법칙'을 읽고 난 후 한결 수월해졌다.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뛰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더 멀리, 새로운 곳까지 가보고 싶은 욕구였다.
목표를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다리로 정했다.
한 시간이란 제한된 시간 안에 목표 지점을 찍고 돌아올 수 있도록 체력을 키우기 위해 매일 조금씩 강도를 높여갔다.
첫 시도는 단 1분 만에 끝났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느린 걸음으로 호흡을 가다듬었다.
요동치던 심장이 정상 심박으로 돌아오자 다시 뛰고 걷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목표는 불과 2주 만에 달성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빠른 내 몸의 변화와 적응에 기쁨이 솟구쳤으며, 이 결과는 '할 수 있다.'라는 자신감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안내창구 근무로 인해 떨어졌던 자존감도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새벽 걷기가 새벽 운동으로 이어질 무렵 새롭게 도전에 나선 것은 버스로 출퇴근하는 것이었다.
직장까지 자차로 이동하면 30분 안쪽으로 걸리는 시간이었지만 버스를 이용하면 출근하는데 한 시간, 퇴근해 집에 도착하는 데는 한 시간하고 삼십 분이 더 걸리는 거리였다.
치솟는 기름값도 이 결정에 한몫했지만 더 큰 이유는 이 시간을 자기 계발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지금도 여전히 버스를 이용해 출퇴근을 하고 있을 정도로 '버스 출퇴근'은 오히려 일찍 못했던 게 아쉬울 정도로 굉장히 유익했다.
나의 아침 일과는 이렇다.
1. 새벽 5시에 기상해 한 시간 동안 조깅을 한다.
2. 집에 도착해 숨을 고르며 어제 널어놓은 빨래를 갠다.
3. 6시 30분에 버스에 올라타 기도를 한다.
4. 명상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는다.
4-1. 좋은 구절이 나오면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거나 휴대폰에 메모를 한다.
5. 두 정거장 전에 내려 걷는다.
5-1. 20분 남짓 걸으며 매일 영어 공부 앱을 통해 공부한다.
6. 병원 입구로 들어가기 전에 가슴은 펴고, 얼굴에 미소를 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