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라면 까야지
집을 나선 지 30분이 지났을까 휴대폰에서 "띠리릭 띠리릭"하며 알람이 울렸다.
출발 전에 돌아올 것을 대비해 미리 맞춰 놓은 알람이었다.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돌아와 땀으로 범벅이 된 온몸을 씻어 내기 위해 서둘러 샤워실로 향했다.
샤워꼭지를 틀자 차가운 물이 "쏴아" 하고 소리를 내며 시원하게 쏟아져 내리며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적셨다.
여전히 쌀쌀한 3월의 날씨 탓인지 아니면 앞으로 다가올 험난할 날들을 몸이 반응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머리부터 발끝까지의 모든 세포들이 각성이 됐다.
일부러 서두른 것은 아니었지만 병원 주차장에 도착하니 출근보다 한 시간이나 빠른 7시 20분이었다.
주차장을 나와 담배를 꺼내어 불을 붙였다.
담배는 왜 이렇게 빨리 타들어가는지 금세 꽁초가 돼 버렸다.
한 대 더 필까 하다가 그냥 담뱃갑을 주머니에 넣었다.
병원 주차장 쪽문을 통해 사무실이 위치한 지하 1층으로 내려갔다.
사무실은 원래 병원 밖 건물에 있었다.
그런데 이번 발령에 맞춰 본관 지하 1층으로 이전해 재무팀과 함께 사무실을 쓰라는 지시가 있었다.
관련성이 전혀 없는 CS팀과 재무팀이 무슨 이유로 한 사무실을 써야 하는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마치 감시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었다.
사실 나는 전임 부원장하고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서로 책을 좋아해서 좋은 책은 서로 선물하기도 했으며, 책을 읽은 후에는 옥상에서 담배를 나눠 피며 토론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제시한 아이디어를 바로 실행에 옮겨주기도 했으며, 워크숍에서는 따로 한 시간 넘게 걸으며 열띤 토론을 펼치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부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직원들에게 병원 수익을 공개할 정도로 투명한 경영을 펼쳤으며, 함께 노력해 지역 병원 중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 병원으로 만들자며 직원들을 독려하기도 했다.
직원들에게는 늘 존중어를 사용하며,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줬던 나의 20년 병원 생활 동안 가장 존경하는 경영자였다.
그런데 부원장은 내가 발령받기 한 달 전, 루머를 남기고 갑작스럽게 병원을 떠나게 됐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 루머 속 희생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 잘못에서 비롯된 내 처지를 남 탓으로 돌리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사무실에 도착해 며칠 전임자에게서 받은 업무 인계서를 살펴보고 있을 때쯤 부원장이 사무실로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하자 부원장은 나에게 왜 사무실에 있는지 물었다.
금시초문인 표정을 짓자 부원장은 팀장한테서 전달받지 못했냐며 자리를 비운 팀장을 당장 자신의 방으로 올라오라는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잠시 후 부원장을 만나고 온 팀장의 얼굴은 황당한 표정이었다.
"뭐래요?"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잠시 뜸을 들인 팀장은 "지금 이 시간부로 우리 둘이 안내창구로 가라네요."
"안내창구요? 갑자기? 인수인계도 없이?"
CS팀은 안내창구에 두 명, 그리고 사무실에 두 명 이렇게 네 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안내창구에는 병원 이용에 필요한 모든 것을 안내하는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병원의 위치 설명은 물론, 진료 상담, 불만 환자 응대, 외국인 통역, 취약환자 안내 등 병원 이용에 대한 모든 것을 처리해야 하는 업무다.
사무실에서는 직원들의 CS 교육을 비롯해 보고서 및 기획안 작성, 결재 등의 업무를 맡고 있었다.
아무리 부원장이라고 하지만 팀장의 권한을 무시한 채 부서 내 직원들의 업무 분장까지 관여한 부원장의 지시에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까라면 까야지."
부임한 지 불과 한 달밖에 되지 않아 전혀 알지 못했던 부원장의 성향이 이 일로 어느 정도 짐작이 되니 만만치 않은 병원 생활이 예고됐다.
안내창구서 근무하고 있는 어제 전화통화를 한 박 선배와 여직원도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특히 박 선배는 지난 십 년 동안 안내창구 업무를 해왔던 터라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무실 업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을 기준으로 그렇게 나는 안내창구 업무를 하기 시작했다.
어떤 업무를 해야 하는지 어떻게 처리를 해야 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말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