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집 외 육촌

엄마 글

by 비누

우리 부부는 토요일마다 저녁 6시부터 10시까지 치킨 배달 알바를 한다. 이 알바는 치킨집 사장인 외 육촌의 부탁으로 한번 돕는 마음으로 했는데 그게 좋았던지 바쁜 토요일마다 도와달란다. 거절하기엔 그 제안이 솔깃하고 별로 부담스럽지 않아서 그렇게 시작한 게 벌써 몇 달째다. 배달이란 것은 우리 부부가 평생에 처음 해보는 일이다. 처음엔 남의 집 초인종 누르기도 어렵고 어색했다. 거기다 카드 결제를 해야 할 때면 겁도 났다. 아직까지도 카드 결제엔 결제액을 혹시라도 실수 할까 봐 몇 번씩 안보는 척 하면서 확인하곤 한다. 이래저래 나일 먹으니 모든 게 굼뜨고 둔하다. 참 살다 보니 때늦게(가리늦게) 외 육촌을 만나 희한한 일도 다 해본다 싶다.


몇 년 전 외 육촌이라면서 뜬금없는 전화가 걸려 왔을 때 난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결혼 전 또 다른 집의 한 살 아래인 외 육촌 남동생은 나랑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 자주 만나 밥도 먹곤 했는데 얘는 도대체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전화기 저쪽에선 나를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엄청 친밀하게 안부를 묻고 하는데 참 난감했다.

본인은 내 시집 동네에서 치킨집을 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난 그 전화가 불편했다. 속으론 얼른 끊고 싶었지만, 체면상 그럴 수 없어 그냥저냥 형식적인 안부를 묻은 뒤 전화를 끊었다. 그 후로 시어머니가 살고 계시는 본가에 한 번씩 들를 때면 가는 길목에 있는 치킨집을 흘낏 쳐다보면서도 들어가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도대체가 기억에 없는 외 육촌이니 무슨 말로 접점을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어색한 만남이 싫었다. 그리고 이런 시골에서 생뚱맞게 무슨 치킨집이냐 싶은 게 안 봐도 파리만 날릴 게 뻔해 보이고 지지리 궁상맞을 거라 생각되었다. 일단 부담스러워서 들어가기가 싫었다.

그렇게 그 치킨집을 모른 채 지나친지 2년쯤 지나서 남편이 퇴직하면서 늘 골골대는 시어머님 때문에 본가 집수리를 하게 되었다. 수리한 집에 남편이 먼저 들어가서 기거하게 되면서 나도 매주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다 어느 날 지나가는 길에 시어머님이 치킨을 좋아하시니 한 마리 포장해서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겨서 들어갔다. 들어가니 나를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나도 외 육촌 얼굴을 모르고 해서 가만 보니, 생긴 모양이 우리 큰오빠 이미지랑 비슷한 남자가 있길래 무턱대고 나는 누구인데 전화한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그랬더니 반응이 반가워하면서도 뭔가 좀 섭섭한 듯이 그랬다. 아마 내가 너무 늦게 찾아가서 그런 것 같았다.

그렇게 시작된 만남은 한동안 그저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또 한 번 치킨을 사러 갔더니 나를 흘끗 보면서 "누님은 우리 큰할아버지 외손녀로 자격이 없다" 라면서 갑자기 우리 외할아버지 얘길 꺼냈다.

난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릴 땐 외가가 멀어서 자주 가질 못했다. 그래서 외가에 대한 내 기억은 편린적이다. 요즘에야 도로도 잘 닦여 있고 차도 있어서 한 시간 내외 거리지만 그땐 완행버스를 타고 가다 산 고갯마루에 내려서 20여 리나 되는 산길을 굽이굽이 걸어갔다. 외할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일 학년쯤에 돌아가셨다. 그때 우리 집으로 낯선 아저씨 한 분이 와서 엄마와 아버지를 찾았다. 심각하게 얘기를 주고받더니 누런 봉투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자라서 생각해 보니 그게 부고장이었다. 갑자기 엄마는 사립문 쪽으로 상에 물 한 그릇 올리고서 머리를 풀고 곡을 하였다. 아무 영문을 모르던 난 엄마의 그런 모습에 겁이 더럭 나고 무서웠다.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온 엄마는 누렇고 뻣뻣한 삼베옷을 입고선 대소가 어른들이 찾아오시면 서로 깍듯이 절을 했다. 상주에 대한 예를 갖춘 것이었다 그런 외할아버지에 관해선 전혀 아는 바가 없는데 그렇게 훌륭하신 어른이었다며 외할아버지 자랑으로 한참 입에 침을 튀겼다.

"으잉? 우리 외할배가 그리 훌륭하셨나? 난 처음 듣는 말인데?"

"하이고 누님아, 우리 큰할아버지가 얼마나 훌륭하셨나 하면 돌아가시고 난 뒤 동네 사람들이 쌀 한말씩 내서 기념비를 다 세워 드렸다 알기나 해라."

느닷없는 외할아버지의 소환은 나를 갑자기 명망 높은 집안의 후손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더니 이번엔 우리 아버질 그렇게 멋지고 좋으신 분으로 추켜세우는 것이다.

"대체 우리 아부지는 뭘 하셨길래 그렇게 좋다고 하노?"

들어보니 자식들한텐 그 별난 우리 아버지가 외가에 가선 영웅이 되어있었다. 그 옛날 여름 방학 때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제사가 사흘 차이로 있었는데 내 기억으론 엄마가 외가에 못 가더라도 아버진 꼭 가셨다. 그땐 방학이어도 달리 갈 곳이 없던 우리 남매는 외가에 가는 게 유일한 나들이였다. 그때 제사 때마다 아버지께서 한 명씩 외가에 데리고 갔다. 그 외가에 왜 그리도 가고 싶었는지 그 제사 동행에 몇 번 탈락한 난 초등학교 3학년 그해 여름엔 꼭 따라 가리라 마음을 먹고 아버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드디어 분위기가 엄마 아버지가 두런두런 얘기 나누며 들썩대는 게 외가 갈 시간이 임박한 것 같았다. 얼른 나도 외가 가겠다고 엄마한테 말했다. 엄만 더워서 안 된다고 했다. 그래도 난 아버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런데도 나한텐 절대 더워서 안 된다던 엄만 작은 오빠를 멀끔하게 차려 입혀선 아버지에게 딸려 보냈다. 그때 차별당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든지 난 머리방에 들어가서 누워 뒹굴며 억머구리 같이 울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엉엉엉...여름엔 덥다고 못 가게 하고, 겨울엔 춥다고 가지 말라고 하고, 봄 가을엔 학교 간다고 못 가게 하고 그라믄 난 언제 외가 갈 수있노 으엉으엉...”

사실 난 그때 속으론 이미 포기했던 상태였다. 그래도 영악하게 다음 기회를 잡기 위해 미리 수를 쓴 것이었다. 그 작전이 적중해서 겨울방학 때 일 순위로 엄마 따라 외가에 갔더니 외가 집안에선 난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보는 사람마다 외가 오고 싶어 그렇게 울며 그런 말을 했냐고 물어댔다.

아버진 제사 때마다 외가에 가셔서 처조카들을 세워놓고 사촌 육촌 가리지 않고 동일하게 용돈을 3원씩 주었단다. 요즘 돈 가치를 따지면 한 5만 원쯤 될 것 같다. 그리고 제사 지낸 이튿날은 외가 온 집안사람들을 다 데리고 근처 유명 약물탕에 가서 닭백숙을 대접했단다. 그래서 이 치킨집 동생은 본인 아버질 일찍 여의다 보니 배고픈 그 가난한 시절에 우리 아버지에게 얻어 본 그 유일한 용돈과 닭백숙 먹는 게 너무 좋아서 여름 제사 오기만 손꼽아 기다렸단다. 그렇게 별난 우리 아버지가 처조카들에게 차별 없이 용돈을 주신 것은 내가 생각해도 정말 훌륭하셨다는 생각이 들고 뿌듯했다. 그걸 지금껏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외 육촌이 고마웠다.


그 뒤로부터 우리 둘은 부쩍 가까워졌다. 처음에 날 보고 누님이라 불렀을 땐 한 살 어린 줄 알았다. 그러다 어느 날 나랑 동갑이란 걸 알고부터 난 큰 고민에 빠졌다. 뭔가 서열이 잘못된 것 같았다. 내 생일은 음력으로 12월 15일이다. 웬만해선 나보다 늦은 생일은 드물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되나 싶어서 밥맛도 떨어질 판이었다.

늘 가슴이 죄지은 것처럼 조마조마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가보니 외 육촌 딸이 아버지 생일이라고 선물을 보냈다고 자랑을 해댔다. 다행히 나보다 생일이 6일이 늦은 음력 12월21일 생이었다. 그때야 가슴을 쓸어내린 난 오뉴월 하루 땡볕이 어딘데 무려 엿새나 차이가 난 확실한 누나로 가슴을 펴고 다닌다.

외 육촌은 생긴 모양과 다르게 동물은 또 얼마나 사랑하는지 유기견도 두 마리나 기른다. 어릴 때 자신이 배고픈 설움을 겪고 보니 말 못 하는 짐승이지만 배고픈 동물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거둔다고 했다. 그중에 한 마리는 보더콜리인데 주택에 살 때 옆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성대 수술을 시키라고 하도 요구를 해와서 너무 화가 나 한바탕 싸우고 그 집을 팔아버리고 이사를 나왔다고 했다. 그리고 흰돌이란 이름의 진돗개는 떠돌이 생활을 오래 해서 인지 한 번씩 목줄이 풀리면 나가서 돌아 댕기면서 절대 잡히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면 동생네 식구들은 흰돌이를 붙잡으려고 온 식구가 총 출동하여 야단법석이다.

흰돌이가 또 목줄이 풀려서 도망을 다닌 지 며칠째다.

교회 다녀오는 길에 보니 외 육촌이 가게 앞에 나와 바닥에 퍼질러 앉아 흰돌일 붙잡으려고 간식을 들고 살살 달래고 있었다. 흰돌인 그 주변만 뱅뱅 돌면서 붙잡히지 않고 있었다. 외 육촌의 얼굴은 애가 퉁퉁 달아 벌겋다. 남편이 차에서 내려 흰돌이 앞에 눈높이를 맞추어 앉은 자세로 부르니 가까이 왔다. 그때 얼른 목줄을 붙잡아서 델고 갔다.

흰돌인 온 들판을 얼마나 헤집고 다녔는지 온몸이 도깨비바늘로 뒤덮여서 흰색 털이 회색 점박이처럼 되어 있었다. 외육촌은 흰돌이를 목줄로 묶고는 몇날 며칠을 애먹인 흰돌이의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 부쳤다. 난 그 모습이 말썽꾸러기 사춘기 막내아들 버릇 고치려고 혼내는 것처럼 보여 웃음이 났다.


요즘 난 다 늙어 만난 외 육촌이 참 좋다. 정 많고 매사에 그 나이쯤이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음흉함이 없고 솔직하며 군더더기가 없다. 친동기간이라도 멀리 떨어져 살면 이런 정을 나눌 수 없는데 우린 서로 이웃하고 살면서 서로에게 정을 내니 친동기간 보다 이젠 더 살갑고 친하다. 쉬는 날이면 외육촌 부부는 꼭 우리 부부랑 같이 맛있는 밥을 사 먹으러 다니며 찻집에 가서 썰풀기를 좋아한다. 하는 얘길 들어보면 이젠 수십 번 들어서 외우다시피 한 외할아버지와 우리 아버지 얘기가 빠지지 않는 단골 메뉴로 처음 얘기하듯이 떠든다. 그럼 나도 처음 듣는 듯이 호응해 준다. 내 조상의 혁혁한 업적 세운 얘긴 암만 들어도 물리지 않고 재밌기 때문이다. 이렇게 둘인 죽이 잘 맞는다. 그렇게 떠들다 보면 우린 몇십 년을 훌쩍 뛰어넘어 그 옛날 모깃불로 연기가 자욱한 외갓집 마당 멍석에 외사촌들이랑 걱정 없이 누워있는 듯하다.


오늘도 알바하는 토요일이다.

우리 부부는 6시 10분 전에 치킨집 앞에 차를 댄다. 튀김가루가 묻어 얼룩덜룩해진 조끼를 입은 외 육촌은 하얀 의치를 드러내어 환하게 웃으며 변함없이 우릴 반긴다.

흰돌이가 경례하듯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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