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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 김동우 Mar 11. 2024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던 역사

서문

사진을 공부할수록 나만의 주제를 장시간 찍어보고 싶었다. 때마침 잠자던 방랑벽도 슬슬 도질 기미를 보였다. 결국 내 인생 두 번째 세계일주를 떠나기로 마음먹는다. 한 번 해봤던 긴 여정이었다. 분명한 건 전혀 알 수 없는 길이라 는 사실과 예상치 못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 과정도 종착지도 모두 불확실한 길,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온전히 사진을 위한 여행, 길 위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얻고 또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인생은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질문을 찾아가는 과정이란 생각 때문이다.


이 길도 내겐 또 하나의 질문이었다. 답은 쉬 찾아지지 않았다. 무엇을 찍을지 막연했고 해낼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다. 포기하지 않았던 건 고민뿐이었다. 결국 그 끝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사를 만나게 된다. 운명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인도 델리 레드 포트가 우리 독립운동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곳이란 걸 알게 된다. 관점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여행에서 발견한 가장 놀라운 우리 역사였다.

송두리째 계획을 변경했다. 전 세계에 산재해 있는 국외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다니는 예상하지 못한 여정이었다. 2017년 인도에서 시작된 작업이 멕시코, 쿠바, 미국, 네덜란드,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중국, 일본 등으로 이어지며 10개국까지 확장됐다.


현장마다 독립운동가 후손을 수소문했다. 100여 년 전 고향을 떠난 조상들의 후예는 결코 낯선 이들이 아니었다. 이따금 똑같은 얼굴을 하고 나타나 평소 집에서 먹던 음식을 내왔다. 그렇다고 말이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간혹 우리말 한 마디 정도를 더듬더듬 내뱉을 뿐이었다. 우린 이 사람들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꼬레아노라고 칭하기도 한다.

미국, 멕시코 이민 배에 올랐던 디아스포라 1세대 대부분은 고향 땅을 다시 밟지 못한다. 그래서였을까. 당신들의 곤곤한 형편을 알았기에 사무치는 그리움만큼이나 이 땅을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들의 디아스포라는 곧 독립운동의 역사가 된다. 그 흔적들을 하나씩 짚어가다 보면 갑자기 눈물이 핑돌 만큼 가슴이 아린다. 애잔하고 절절한 가난과 핍박의 역사는 이 나라의 반석이 무엇인지 소리 없이 증거하고 있었다.

현장에서 가장 많이 마주한 풍경은 공空 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공간, 그렇다고 허투루 볼 수 없는 공, 거기에 는 분명 보이지 않지만 가슴으로 느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실존했으나 실재하지 않는 모습을 어떻게 해서든 담아내고 싶었다. 비록 그 현장 이야기를 사진 미학적으로 다 풀어내지 못한들, 잠시 그곳을 서성였단 자체로 내겐 큰 의미였다. 이젠 너무 멀리 와버려 누가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는 공간, 매번 ‘늦어, 미안합니다’란 자책을 하게 했던 시간들.


조상들의 역사는 실패했다. 나라를 빼앗겼고 백성들을 보살피지 못했다. 눈은 어두웠고 귀는 닫혀 있었다. 순응하는 편이 여러모로 쉬웠다. 친일은 난분분한 꽃길이었다. 침략자를 위한 부역은 눈앞의 이익을 가장 빨리 실현시켜 주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매국노의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 항일은 가시밭길이었다. 부끄러운 역사를 남길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의 투쟁은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최소한 목적지는 하나였다. 때론 가족이 잡혀가고, 동지가 죽어 나갔다. 결국엔 본인 자신도 피비린내 진동하는 지하 감옥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에 비명을 질러야 했다. 그럼에도 그 들은 연옥煉獄에 들어앉은 수행자처럼 고행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동안 우린 이런 역사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 고 살아온 것만 같다. 길었던 외면은 불과 100여 년밖에 안된 찬란한 투쟁의 대서사시를 서서히 좀먹어가는 중이다. 무관심은 그런 거다.


고백하건대 나 스스로도 잘 알지 못했던 역사였고, 알려고 하지 않았던 시간을 살았다. 하지만 누군가는 전 세계에 보석처럼 박혀 민족의 등불이 된 현장을 제대로 기록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는 기록할 때 역사가 될 수 있지 않나. 표지판 하나 없는 사적지, 이력 하나 쓰여 있지 않은 비석, 무덤조차 쓰지 못한 수많은 무명 투사들 그리고 그곳에서 뿌리를 이어가는 후손들, 이 모두가 교과서 밖에서 마주한 역사다.

카메라를 들고 동분서주했던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바로 현장만이 줄 수 있는 울림 때문이었다. 때론 그 진동과 떨림이 땅을 치며 우린 왜 이것밖에 안 될까, 하고 한탄을 하게 만들지만, 그래도 괜찮다. 그들이 있어 내가 있으니.


우린 모두 실패했으나 포기하지 않았던 조상들에게 빚 을 지고 있다. 그 부채를 갚기 위해서라도 잃어버렸던 역사를 톺아보고 오롯이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마땅히 해야만 하는 ‘21세기 독립운동’이자 ‘대한이 사는 길’이다.


<김동우 작가는>

2017년 인도여행 중 우연히 델리 레드 포트가 한국광복군 훈련지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때부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사적지를 찾아 기록하고 있다. 지금까지 10개국에서 작업을 이어 왔다. 크게 관심받지 못했던 작업이 전시 출판 등으로 조금씩 알려지자, 유퀴즈온더블럭 광복절 특집편 출연 등으로 이어졌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등 전국 각지에서〈뭉우리돌을 찾아서〉전시를 열어왔으며 지은 책으로는《뭉우리돌의 바다》,《뭉우리돌의 들녘》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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