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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립 김동우 May 04. 2017

여행과 여행 사이

JAVA_Indonesia


새벽 3시, 숙소에서 뻑뻑한 눈을 비비며 카메라를 챙겨 나섰다.
숙소 앞에는 여행자를 태우려는 지프와 오토바이의 웅성거림이 가득했다. 예약해 둔 지프 기사는 나를 보자마자, 약속을 취소하지 않은 것에 적잖이 감사했는지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날 지프 기사를 만나 약속 시간을 잡았을 때 그는 거듭 “약속”이라고 말했다. 여행자를 태운 지프와 오토바이가 경주라도 하듯 흙먼지를 날리며 길을 내달렸다. 멀리 산을 오르는 불빛이 브로모 화산의 별빛만큼이나 초롱거렸다. 흔들리는 지프 안에서 이리저리 몸을 가누다 잠시 꾸벅 졸았던 모양이다. 기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며 나를 깨웠다.
출발 전 부산함만큼이나 목적지의 북적임도 만만치 않았다. 넓은 계단 길을 여행자 틈에 섞여 오르자 브로모 화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에 닿았다. 어둠을 빨아들이던 산은 어느새 조금씩 빛을 튕겨내기 시작했다. 밤의 산은 시간을 압축시킨다. 힘들게 산을 오를 때면 밤의 산은 으레 시간을 뛰어넘어 나를 목적지에 올려놓았다. 게다가 밤의 산은 아름다움을 극적으로 빚어낸다. 투박하게 산을 오르고 등골을 적신 땀이 적당히 바람에 날려갈 때쯤, 밤의 산은 비단결 같은 은은한 빛으로 잠에서 깬다. 경박하지 않으면서 튀지 않는 톤은 세기를 더해 화려하게 빛난다. 그리고 사람들은 외마디 탄성을 내지르거나 경건하게 눈을 감는다. 때론 잿빛 구름에 가려 상상하던 그림을 볼 수 없을지라도 밤의 산이 낮의 산으로 바뀌면서 새로운 세상을 선물해 주긴 마찬가지다.
수없이 오른 산, 셀 수 없을 정도로 밤과 낮의 경계를 경험했지만 여행만큼이나 질리지 않는 게 바로 이 순간. 마땅히 흘려야 할 땀은 없었지만 브로모는 나와 상관없다는 듯 서서히 빛을 받아들인다.
삼각대를 두 개나 펼치고 자리 잡고 있던 한 사내 옆에 섰다. 조심스럽게 카메라를 꺼낸다. 파인더 안 브로모, 한쪽 눈을 찡그리고 초점을 맞춘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다. 초점링 위치는 무한대. 브로모가 내뿜는 압도감만큼이나 멀리 있는 존재. 새삼 무한대에 위치한 산봉우리가 더없이 커 보인다. 살아 있는 화산은 숨 쉬듯 쉼 없이 연기를 뿜어내고 낮은 구름을 몰고 다닌다. 적막해 보이는 화산은 그렇게 고요로 답한다.
해가 솟고 찡한 햇살 아래 브로모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드라마틱한 한편의 공연이 끝나자 미련 없이 등을 보이는 여행자들. 여느 여행지는 밤이라야 침묵하지만, 브로모는 낮이 오면 적막에 휩싸인다. 사람들로 빼곡했던 전망대 이곳저곳에 듬성듬성 이가 빠진다. 산허리를 감싸 안은 것처럼 포근하게 흐르던 구름도 덩달아 희미해진다. 어느새 전망대는 하루 장사를 마감하는 분위기다. 세차게 내리 뻗는 하얀 햇살 아래 회색 쓸쓸함이 피어오른다. 하루 여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 편히 지친 다리를 누여야 할 것 같은 노곤함, 그래서 어서 자리를 뜨고 싶은 조급함. 발아래 먼저 산을 내려간 사람들의 움직임이 희뿌연 연무로 피어오른다. 자유로운 자유를 찾기 위해 모인 사람들.
브로모에 와봤다는 환희,
멋진 아침을 맞았다는 기쁨,
잠시 새로운 일상을 만끽하는 행복,
밤을 지나 다시 낮을 맞은 뿌듯함,
자주 하던 말들이 속 안을 맴돌고,
자주 하지 않던 말들이 밖을 떠돈다.
그래서 여행은 행간 사이에 있다.
오늘도 여행과 여행 사이에서 또 여행을 찾는다.




Leica M-P(typ240) + Summicron-M /  28mm ASPH

2017, Bromo, JAVA ⓒ Kim Dong Woo
CopyRight. 2017. Kim Dong Woo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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