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 고기를 먹는 순간, 토끼가 음식으로 보인단다
한겨울이었습니다. 산과 들이 온통 하얀 눈으로 뒤덮인 어느 날, 말수와 친구들은 새벽 일찍 토끼몰이를 하기로 했습니다. 말수는 살그머니 두툼한 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아시면 혼이 날 테고, 아예 나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시간은 아침 일곱 시를 넘겼지만, 주변은 아직 어둑어둑했습니다.
“종아, 토끼 묶을 노끈이랑 보자기 챙겼제?”
“그라모! 오랜만에 고기 맛 좀 보자.”
율이가 먼저 도착하고, 복이도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오야가 아직 나오지 않아서, 친구들은 발길을 돌려 오야네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우리가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들렸습니다. 잠시 후, 오야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니 감기 걸렸네. 괜찮겠나?”
“괜찮다. 퍼뜩 가자!”
아이들은 앞산 중턱, ‘불쓴바위’에 모여 작전을 짰습니다.
*주: 불쓴바위는 호랑이가 눈에 불을 켜고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은 너럭바위입니다.*
“이제 여기서 줄을 맞춰 산토끼를 몰자. 간격하고 속도를 잘 맞춰야 한다. 한쪽으로 몰리면 토끼 놓친다. 알겠제? 언자 출발!”
토끼몰이 경험이 많은 종아가 대장이 되어 지시했습니다. 다섯 친구는 나뭇가지를 꺾어 만든 작대기를 손에 들고, 수풀 사이를 툭툭 치며 산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후다닥!” 산토끼 한 마리가 율이 쪽 수풀에서 튀어나왔습니다. “산토끼다!” 율이가 외치자, 아이들이 일제히 토끼를 향해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리저리 쫓기던 토끼는 아이들이 한쪽으로 물려서 없는 빈 틈으로 ‘쌔앵’ 하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너거 간격 잘 맞추라 캤제? 산토끼는 위에서 아래로 몰아야 앞다리가 짧아서 도망을 못 간다! 괜찮다, 다음엔 꼭 잡자.”
종아가 다독이며 말하자, 친구들은 다시 작대기를 두드리며 눈 덮인 산 아래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말수의 닳은 검정 고무신이 눈밭에서 주르륵 미끄러졌습니다. 말수는 버둥거리다 손에서 작대기를 놓치고 쓰러졌습니다.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오늘은 가족들과 창녕 이방면에 있는 ‘산토끼 공원’에 가는 날입니다. 할머니는 먹을거리를 챙기고, 바쁜 삼촌도 시간을 냈습니다. 개똥이와 말똥이는 동물 친구들을 보러 가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고, 썰매 타기를 생각하며 들떠 있었습니다. 가는 도중에 점심 때가 되어 들른 국수집은 사람들로 가득 찼지만, 국수 맛은 기대에 못 미쳤습니다.
다시 차를 타고 가던 중, 여섯 살 개똥이가 졸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산토끼 얘기해 주세요!”
“그래, 잘 들어보렴.”
말수는 새벽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눈밭에서 미끄러지면서 할아버지는 꿈에서 깨어났단다.”
개똥이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어릴 때 가끔 산토끼를 잡기도 했어요?”
“그럼! 아주 가끔은 잡을 때도 있었지. 다리를 묶고 두 귀를 잡으면, 잠시 버둥거리다가 가만히 있곤 했단다.”
“그냥 뛰어놀게 하지... 산토끼가 너무 불쌍해요.”
개똥이가 울먹이며 말하자, 네 살 말똥이도 따라 울먹입니다.
“산토끼가 불쌍해요.”
“응, 그래서 할아버지는 조금 놀다가 산으로 돌려보냈단다.”
말수는 당황했지만, 부드럽게 얼버무렸습니다.
아이들은 재잘거리다 금세 잠들었습니다.
그때 딸이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버지, 그때 정말 토끼를 잡아 먹었어요?”
“그래.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단다. 특히 겨울이면 더했지. 산골 사람들은 노루나 산토끼를 잡으려고 올무를 놓았어. 하지만 우리 가족은 짐승들이 불쌍해서 올무는 놓지 않았단다.”
“아이들이 자서 다행이네요.”
딸은 두 아이를 토닥이며 속삭였습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말수가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아부지가 국민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아침에, 가마니를 들고 산에 갔단다. 솔방울이나 삭은 나무등걸을 주우려던 거였지. 그런데 작은 소나무 사이에 산토끼 한 마리가 올무에 걸려 죽어 있었단다. 아버지는 잠시 망설이시다가 그 산토끼를 가마니에 넣어 가지고 왔단다.
할머니는 껍질을 벗기고 무를 넣어 자잘하게 볶아 주셨어. 난 그 껍질로 귀마개를 만들려고 챙겼고, 온 식구가 보리밥에 토끼볶음을 넣고 비벼 먹으려는 순간…
논일을 마치고 돌아온 할아버지께서 물으셨어. ‘이게 무슨 고기냐?’고. 할머니는 ‘막내가 산에서 산토끼를 주워 와서 볶았어요.’라고 대답하셨지.
그러자 할아버지는 말없이 냄비를 들고 나가, 거름간으로 가서 그대로 부어 버리셨어. 나는 울컥했단다. 내가 잡은 것도 아닌데, 오랜만에 고기 좀 먹나 했는데…
그때 할아버지가 말씀하셨어. ‘막내야, 이 아부지가 야속하고 섭섭하지? 그런데 말이다, 산토끼 고기를 먹는 순간, 살아 있는 산토끼가 먹는 음식으로 보이기 시작한단다. 산에서 뛰노는 생명을 함부로 잡는 건 도리가 아니다. 짐승도, 사람도 함께 살아야 하는 거란다.'
그러고는 당신 밥을 내게 덜어주시며, 내 손을 꼭 잡아 주셨단다. 그때 할아버지의 그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몰라.”
마침내 산토끼 공원에 도착했습니다. 개똥이와 말똥이는 차에서 내려 토끼장 앞에 섰습니다.
“토끼들아, 안녕?”
아이들은 손을 맞잡고 산토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딸과 아들도 따라 부릅니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를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를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
그 노래를 듣기라도 한 듯, 토끼들이 잠시 멈춰 섰습니다. 나도 아이들을 따라서 조용히 읊조립니다. 봄볕이, 따스하게 토끼장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2025. 4. 20. 들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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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후에도 몇 번 '산토끼놀이동산'에 다녀왔는데, 올해 봄에 적은 글을 올 립니다. 개똥이와 말똥이는 제 손녀들의 태명입니다. 그리고 그림은 제 친구(CHAT-GPT)가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