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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상과부와 며느리

시어머니와 며느리, 고부갈등이라뇨?

by 들풀

♤ 이 글은 17년 전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입니다.

오래전 엄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셔서, 추억이 서린 도입부는 조금 생략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ㅡㅡㅡ

엄니는 올해 꼭 아흔이십니다. ‘기미년 만세’가 한창이던 해, 할아버지 진갑년에 났다고 이름도 ‘진갑’입니다. 열여섯 나이에 바로 이웃동네로 시집을 왔는데, 이제 일흔네 해가 되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1시간여를 달려 고향집에 도착했는데, 도착하자마자 아내는 열심히 냉장고를 치우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많아서인지 냉장고에는 엄니가 채 드시지 못한 반찬이 꽤 많습니다. 아내의 분류작업이 끝나고, 나는 오래된 반찬류를 거름간에다 버립니다.


“어머님, 아끼지 마시고 드세요. 냉장고가 비어야 저희가 맛난 음식을 자주 사올 수 있답니다”

“오냐! 너거가 내한테 맛있는 음식을 마이 멕여서 빨리 죽일라꼬 그라제?”


우리 부부가 놀라서 쳐다보는데, 엄니께서는 혼자 소리 내어 웃다가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옛날 우떤 마을에 외동아들을 키우며 사는 심술궂은 청상과부, 여펜네가 살았더란다.

아들이 장성해서 장개를 보냈는데, 며느리하고 아들이 너무 사이가 좋은 기라!

손자, 손녀도 하니씩 척척 낳았제.


아들 몬 낳았으모 소박이라도 할낀데, 내가 저 년을 우째 골탕을 멕일꼬?’

맨날 그 생각만 했능기라.

그래서 살림 잘 몬한다꼬 머리끄댕이를 쥐어뜯고, 일 몬한다꼬 이웃이 떠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괌(고함)을 질렀능기라.


“이년아, 니는 밥묵을 자격이 읎다, 으이!”


또 며느리 험담은 얼매나 하는지, 동네 사람들도 귀를 막을 정도였제.

며느리가 새북(새벽)에 물을 긷다가 물독을 깨었다꼬 친정으로 쫓아 보내고, 장독값도 사돈집에서 받아내고, 꾸정물에 밥떠꺼리(밥풀)가 묻어나왔다꼬 억지로 며느리 입에다 쑤셔넣는, 참말로 악독하고 피도 눈물도 없는 시어마씨였제.


그래도 서방이라꼬 밤에 하소연이라도 할라치면, 신랑이라는 작자는 제 어미 눈치만 살피는지 ‘참아라’ 소리만 하고 돌아누우니, 며느리는 가슴이 저미도록 서럽고 얼매나 외로웠겠노?


엄니는 자신이 겪은 듯이휴우~”, 한숨을 깊게 토해 냅니다.


그러다가 삼 년이 지난 우떤 날, 겨우 말미를 받아 친정집에 다니러 간다면서 이웃 동네 단골네(무당집)를 찾아갔더란다.


며느리를 본 무당은 휘파람을 휘~휘 불면서 박수를 치더니만, 그동안 며느리가 겪었던 고초를 길고 긴 사설로 풀어놓더란다. 며느리는 그만 숨이 막혀서 가슴을 쥐어뜯으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제.


“단골네, 내가 우째야 되겠노? 죽을라꼬 밤에 저수지에 몇 번이나 찾아갔는데, 아이들이 눈에 밟혀서 죽지도 몬하고 그냥 돌아왔다네!”


(주: 당시에는 무당이나 동네 허드렛일을 하는 고지기에게는 아이들도 '하게'체를 썼다고 함.)


“언자 걱정 마소! 지가. 그냥 시어마씨를 쥐도 새도 모르게 쥑이는 방법을 갈쳐 줄낍니더. 그거만 잘 따라 하소!”


단골네가 귀속말로 일러준 말을 듣고, 집으로 온 며느리는 그날 이후, 지극정성으로 시어마씨를 모셨제.

“단골네의 처방이 무엇인지 너거는 짐작이 가나?”


엄니는 이제 빙그시 웃습니다.


“그래, 바로 시어마씨에게 살을 찌워서 빙(병)이 들게 해서 죽이는 처방인기라.”


우쨌든 며느리는 시어마씨가 눈치를 챌까봐, 지극정성을 받치는디끼 숭내를 내면서 맛난 음석(음식)을 만들어 조석으로 봉양을 했다 아이가? 시어마씨는 처음에는 ‘이 년이 무슨 요사를 부리나’ 싶어서 잔뜩 경계를 했는데…

심불궂은 청상과부 시어머니와 며느리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도 며느리는 똑같은 기라.

시어마씨의 혈색이 좋아지고, 이웃집에 마실을 가서도 며느리 칭찬을 하는 횟수가 점점 많아졌제.


시어마씨가 변하니 며느리도 변할 수밖에 없었제.

며느리는 점점 칭찬을 하는 시어마씨가 좋아지게 되고, 기름진 음식 대신에 진짜 맛난 음식을 해 드렸제. 또한 조석으로 팔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조곤조곤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란다. 그래, 며느리의 얼굴에도 혈색이 돌고, 늙어서 병이 든 시어마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서 나랏님이 내리는 효부상도 받았다고 하더라!


저녁식사로 읍내에 시킨 냉면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손으로 만든 면이라카더마는 참 맛나다. 마이 묵어라!”


엄니는 면을 덜어 며느리의 그릇에 옮겨 놓습니다. 그러다가 당신 그릇에 든 계란을 슬쩍 집어서 내 입에 넣어줍니다.


“저는 됐습니다. 어머님, 많이 드세요.”


손사래를 치는 아내의 등을 엄니는 가볍게 토닥입니다.

5월의 싱그러운 봄내음이 세 식구의 가슴을 훑고 지나갑니다.

(2008. 5. 30. 오마이뉴스)


삽화는 제 친구 별벗(CHAT-GPT)이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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