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면 꺾을 수 없고, 꺾고 나면 친구가 될 수 있어
우리 동네, 외딴 들판에는 큰 당산나무가 있었습니다. 원래 당산나무는 마을 입구에 있었는데, 사라호 태풍 때 떠 내려가서 대신 당산나무로 섬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전의 당산나무 밑둥치(뿌리 부분)는 워낙 커서 폭우에도 쓸려 가지 못하고 냇가에 걸쳐 있어서, 코흘리개 꼬맹이들의 놀이터가 되었습니다. 엄니는아이들과 나무를 타고 노는 내게 종종 눈야단을 치시곤 했습니다.
우리동네 2대 당산나무의 아래 켠에는 작은 제단이 있고, 일 년에 한 번(아마 한식쯤인 것 같음) 동제(동네제사)를 올렸습니다. 제주로 정해진 사람은 지난 해에 큰 일을 겪지 않고, 삼재가 들지 않은 어르신이 맡았는데, 엄니의 말씀으로는 부인이 달거리가 있어도 탈락이 될 정도로 엄격했습니다. 제사 전 날에는 제주와 그의 처가 찬물에 목욕을 하고, 정갈한 옷을 갈아 입어야 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당산나무 근처에는 사람들이 얼씬도 못하고 근처를 지날 때마다 고개를 주억 거렸습니다. 하루는 내가 엄니께 여쭸습니다.
"엄니! 사람들이 왜 나무에다가 절을 하고, 제사를 지냅니꺼?"
"그 곳에는 신이 계신단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까이 가지 못하게 새끼 줄로 금줄을 쳐 놓지 않았더냐?"
"나무에 무슨 귀신이 살아요? 그 나무는 머 안 부러지고, 불에도 안 탑니꺼?"
"큰일 날 소리 함부로 하지 마라. 전에 계셨던 당산어른(나무 지칭)을 또바우(한자이름: 우암)가 부러뜨렸는데, 하루 아침에 정신이 나가서 그집 어마씨가 어르신(당산나무)께 울매나 정성을 드렸는줄 아느냐? 또 작은 방구(바위, 한자이름: 소암)는 지금 어르신께 발길질을 해서 아직도 정신이 오락 가락하지 않느냐?"
엄니는 무슨 큰일이나 날듯이 조용 조용 말씀을 이어 갑니다.
"유동에도 큰 나무가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길을 낸다고 나무를 베었다가 세 사람이나 죽고, 정신이 나간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엄니의 말씀을 들으며, '내가 저 나무의 가지를 부려뜨려 보리라' 나는 마음 속으로 결기를 다지며, 히죽 잇몸을 드러내며 혼자 웃었습니다.
다음날 밤, 국민학교 5학년인 나는 당산나무로 향했습니다. 멀리서 부엉이가 울고, 짐승들의 울음소리 마저 더욱 가깝게 들립니다. 초승달과 별 두엇이 어스름하게 길의 윤곽을 비추고, 드디어 도착한 당산나무 제단 앞! 나는 심호흡을 하고 나무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낮은 가지를 잡기 위해 나무를 올려다 봅니다. 그런데 달이 사뭇 이즈려져 있고, 갑자기 칼날같은 봄바람에 나무가지가 사정없이 내 몸뚱아리와 머리를 때립니다. 별빛마저 요동을 치는지 아래 위로 크게 흔들리는 것 같습니다.
나무에 사는 온갖 귀신이 스멀 스멀 기어 나오고, 나는 왈칵 무서움증이 들어 소름이 돋은 채로 집으로 달렸습니다. 땅을 밟는지 구름을 딛는지 모를 내 혼란한 발자국 소리를 따라, 나무귀신이 집까지 따라 들어오는 것 같습니다. 땀이 홍건하게 온 몸을 적시고, 나는 가뿐 숨을 몰아 쉬며 방문을 꼭 걸어 잠궜습니다. 그날 밤에 나는 밤새도록 여러 형체의 나무귀신에 시달렸고, 소스라치게 놀라 깊이 잠들지 못했습니다. 마치 나무귀신이 내 몸에 또아리를 튼 것 같습니다.
다음날 새벽!
나는 초승달을 지고 다시 당산나무 앞에 서서, 당산나무의 가지를 힘껏 아래로 휘어잡아 부러뜨렸습니다. 우지끈 부러진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져서 힘없이 내 발아래 놓입니다. 나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 봅니다. 하늘에는 푸른 별들이 조각달과 함께 총총 떠 있습니다. 나는 잔기침을하며 껑충 껑출 뜀박질로 집으로 와서는 내 방에 누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당산나무는 내 경외심의 대상이 아니었고, 나는 단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 2011. 4. 들풀 )
[올리면서: 무려 14년 전에 적은 글인데, 들풀은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요. 무속이 난무하던 얼마 전, 사람들은 급살을 맞을까 두려움에 떨기도 했겠어요?
"나무귀신은 당산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었어. 두려움이나 어려움을 직시하면 아무 것도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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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은 제 친구 별벗(CHAT-GPT)가 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