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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러운 할미꽂

할매골에서 피어난 할미꽃 전설

by 들풀

내 첫사랑, 자야! 잘 살고 있나?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 빤죽깽이(소꿉놀이) 삼시로(살면서) 꼬마신랑 하던 다섯살 묵은 내가 쉰이 다 되어가니, 내 각시 자야도 이제 늙어서 손자를 볼 때 쯤은 되어가는 갑다. 자야 집이 이사를 가고 우리가 한번도 만나지 못했으니 못 본 지가 40년이 다 되어 가제, 그자? 그 때 사금파리에 색색가지 돌삐(작은 돌멩이)를 곱게 갈아서 떡도 만들고 밥도 만들고.. ​ "수야, 맛있게 묵으라이!"

"그라모, 자야! 나는 니가 해주는 거는 머시든지 맛있고 다 조타"

나는 후룩룩 짭짭, 참말로 국물과 반찬을 맛있게 묵는 시늉을 했제!

나는 자야가 해주는 것은 머시든지 다 맛있다

우리가 오데 빤죽깽이만 살았더나? 자세(공기놀이)도 받고 자때치기(자치기)도 하고, 언자 니도 기억이 나제? 지금 이 맘때 쯤에 내가 니한테 제비꽃으로 예쁜 반지를 만들어서 갖다 바친 거! 또 쪼깨이(조금) 더 있으모 가시꽃(아카시아꽃)과 감꽃으로 목걸이도 해다가, 니 이쁜 목에다 걸어주었제!

생각만 해도 와 이리 가슴이 떨리노?

자야! 그 때 내가 니한테 해준 할매 이야기, 기억 나나? 내가 할미꽃을 보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자야에게 만들어서 끼워준 제비꽃반지

옛날에 우떤 할매가 젊어서 아들과 며느리가 죽고, 혼자서 솔녀(손녀) 둘을 키웠능 기라. 큰 손녀는 그래도 있는 대로 힘껏 장만해서 좋은 혼처에 시집을 보냈는데, 큰 손녀한테 다 해주고 나니 작은 손녀는 시집갈 때 아무 것도 못해주었능 기라. 손녀 둘을 모두 시집보낸 할매가 세월이 흘러서 늙고 고마 병까정 들고 말았거든!


혼자서 마을 사람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다가 할매는 할 수 없이 큰 손녀를 찾아갔능기라. 큰 손녀가 그때 마실을 갔는지 집에 없는데, 그 집에는 온갖 살림살이를 어거리 바거리 해 놓고 잘 살고 있능기라.

할매는 마음을 탁 놓고 기다리는데 큰 손녀가 돌아왔제. ​

"할머니, 이렇게 초라하게 차려입고 뭐하러 왔어요! 동네 사람들 보면 부끄러우니 빨리 집에 가세요!" (우째서 이럴 때는 꼭 서울말을 쓰는지 나도 모르것다. 서울 사람들이 또 머슨(무슨) 소리 안할랑가 모르것다마는, 우쨌든.) ​


참말로 못된 년이제? 그람시로(그렇게 하면서) 노자라고 한 푼을 쥐어주는데, 설버서 고마(그만) 눈물이 앞을 가리는 심정을 니도 이해하겄제!

할 수 없이 할매는 둘째 손녀 집을 찾았능 기라.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골짝 골짝을 넘어 가니 저 멀리에 손녀 집이 보이능 기라!

그런데 그 오막살이 집 앞에 둘째 손녀가 서 있는 것을 할매가 보았는데......

할무이! 지발 가지 마이소.

손녀가 하얀 천으로 된 것을 흔들고 있었능기라. 한참을 쳐다보는데도 하얀 베쪼가리가 나풀대는 것이 아무래도 '할매, 우리 형편이 어려운 게네 제발 우리 집에는 오지 마이소' 하는 것처럼 색각되능 기라.

"그래, 잘 사는 큰 손녀도 그랬는데, 저런 오두막살이에 사는 작은 손녀는 오죽 하겠나? 내가 지한테 아무 것도 안해주었는데, 내가 무슨 염치로 여기 왔나" ​


할매는 휘적 휘적 발길을 돌렸제. 아픈 몸에 며칠동안 아무 것도 못 먹었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 할매는 고개를 한고개, 두 고개, 세고개를 넘다가 고마(그만) 쓰러지고 말았제. 사실은 그 날이 할매 생일 날이라서 둘째 손녀는 자기 할매를 그리워 함시로(하면서) 고향 하늘을 바라다보고 있었능기라. 그런데 저 멀리서 그렇게 보고 싶던 할매와 비스무리한(비슷한) 사람이 나타났능 기라. ​ 둘째 손녀는 이기 꿈인가 생시인가, 지 살을 꼬집다가, 소리쳐 부르다가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 아무래도 못 알아보는 듯이 보이능기라! '아이고, 이 일을 우짜꼬!'


손녀는 급히 방에 들어가서 하얀 밥수건(밥상을 덮는 수건)을 들고 나와서 흔들었능 기라! 그런데 할매는 '어서 오라'는 수건을, '빨리 가라'는 수건으로 잘못 알아 들었능기라! ​

할매가 돌아서서 가는 것을 보고 손녀는 집에서 맨발로 뛰어갔능기라. 돌부리에 채여서 피가 나고 가시에 긁혀서 살점이 떨어져도 손녀는 아픈 줄도 몰랐제. 고개를 하나 넘고, 두 개 넘고, 세 개를 넘는데 할매가 쓰러져 있능 기라.

"아니고, 할무이! 우짠다꼬 이리 왔다가 그냥 갑니꺼? " ​

할매 얼굴에 둘째 손녀의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는데, 입에서 피를 흘리며 정신을 잃고 있던 할매가 가늘게 실눈을 뜨더마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고마 숨을 거두고 말았능 기라. 손녀는 정성을 다해서 할매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제. 그런데 이듬해, 할매가 죽은 자리에 할매를 꼭 닮은 하얀 머리털이 송송박힌 조그만 붉은 꽃이 피었능기라. 그래서 사람들은 할매가 죽은 넋이 꽃으로 되었다캐서 '할미꽃'이라 부르고, 할매가 죽은 골짜기를 할매꼴이라고 했는데..... ​


그라고 할미꽃이 지고 나모(나면) 하얀 할매의 멀끄댕이(머리카락) 같은 기 바람에 나풀 대는데, 이거를 보고 둘째 손녀는 '야~야! 나는 괴안타, 빨리 들어 가라'고 밥수건을 흔들디끼(흔드는 것처럼) 보여서, 다시 섧게 울었다 카데.

서러운 할미꽃

옛날에 우리 할매가 요근처 함안 오데서 전해 내려오는 할매꼴(할머니 골짜기)의 할미꽃에 대한 전설이라 했는데, 지금은 지명이 기억이 안난다. (제가 어린시절, 할머니께 들었던 이야기와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재구성하여 엉성합니다. 이해를 바랍니다.) ​


자야! 옛날부터 '굽은 솔이 선산을 지킨다'꼬 쭉 곧은 소나무는 집 짓는데 쓴다고 일찍 베고, 결국 선산을 지키는 것은 굽은 소나무라는 뜻이제. 요새 사람들도 아이들 하나, 둘 낳아서 쎄(혀)빠지게 공부시켜 놓으면 지 지집(자기처)하고 지 새끼 밖에 모르는데, 우짜모 우리 신세가 할미꽃 신세가 아닌가 모르것다, 그자?

★ 2006. 3. 28. 들풀 ★ ​


[후기: 약 20년 전에 적은 글인데, 이른 봄에 올리면 좋을 글을 브런치북을 발행하려다 보니 부득불 겨울의 초입에 올립니다. 제 첫사랑이 자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어른동화입니다(자야! 니도 그런 생각은 안하제?) 오늘은 우리 서동댁 할매가 무척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


※ 그림은 제친구 별벗( CHAT-GPT)이 그렸습니다.


#브런치들풀 #들풀의어른동화

#할미꽃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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