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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니 Oct 12. 2022

친구를 놓치고 동지를 만났다

그는 잘 웃는 사람이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그는 가끔 내가 책 추천해주기를 바랐는데, 추천받은 책이 만족스러웠다며 기뻐할 때 나도 덩달아 흐뭇해졌다.

그는 세 명이었다가 한 명이 탈퇴한 모임에 추가로 들어온 모임원이었다. 해외에서 살다 왔다는 그는 내 예상대로 많은 분야에 비교적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고, 표정도 다양해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그는 모임 날이 아니더라도 종종 나를 찾아왔고,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일상을 나눴다. 그를 만날 때마다 어쩌면 이렇게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거란 기대감을 품기도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죽이 잘 맞던 우리는 모임에서 자꾸만 삐걱댔다. 그는 한국이 여성, 성 소수자, 노동자 등의 소수자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사회라는 것이 자명한데도 그런 문제를 외면하는 발언을 자주 했다. 모임에서 어떠한 혐오 발언도 금지하는 규칙이 추가된 지금은 그의 발언이 용납될 수 없지만, 당시에는 발언 내용에 제한을 두지 않았기에 그는 매번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내가 추측하기로 그가 모임 탈퇴를 결심한 결정적 사건이 있던 그날, 우리는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읽고 만났다. 나와 다른 모임원이 소설을 흥미롭게 읽은 반면 그는 계속 읽기 거북해 도중에 포기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의 행동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말하며 그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후 오간 대화에서 나는 도무지 그를 이해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주인공이 왜 애먼 남자를 납치해 괴롭히는지 알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내 나름대로 해석한 의미를 설명했다. 소설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려 하지 않고, 글자 그대로를 읽고 받아들이는 그에게 내가 이해한 바를 설명하면 작품을 보는 데 조금 나을 것이란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리송하다는 표정으로 미간에 잡힌 주름을 풀지 않았다.     


꽤 오랜 시간 페미니즘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와중에 그는 돌연 자신이 여자인 것이 좋다며, 직장에서도 여자라는 사실이 업무에서 효율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했다.

“그 나라는 성차별이 심하긴 해요. 그래서 거기 사람들은 자기 나라 여자들은 일도 못 하게 해요. 그런데 저처럼 일로 만나면 제가 여자라서 좋아해요. 진짜 여자가 맞는지 궁금해서 자리에 나오기도 하거든요. 저는 업무 성과를 내고, 그 사람들은 저를 볼 수 있으니 좋아서 서로 윈윈인데. 설마 이것도 여성 혐오라고 말할 건가요?”

입 아프게 말하지 않아도 여성 혐오였기에 나는 눈을 오래 감았다 뜨면서 그렇다고 답했다. 그리고 왜 그것이 여성 혐오인지, 여성 숭배가 왜 여성 혐오의 한 부분인지를 설명했다.

어떤 논쟁이든지 모임에서는 누군가를 설득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지만, 토론 자리이니만큼 내 생각을 충분히 말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내 의견을 들은 그가 뭔가 새롭고 유익한 답을 해주기를 기대했다.     


“혹시 남자한테 안 좋은 기억 있으세요?”

잠자코 내 말을 듣던 그는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그의 질문은 페미니스트를 겨냥해 사용되는 너무나 전형적인 공격이자 조롱이었다. 다만 그의 표정에서 악의가 없어 보여서 더 절망스러웠다. 페미니즘을 이야기하는 나를 ‘남자와 한 번도 연애해보지 못한’, ‘남자에게 나쁜 기억이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그의 통찰 아닌 통찰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의 말이 있고 난 후 내가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페미니즘 논쟁이 오갔고, 그의 말수가 차츰 줄어든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마지막 모임을 며칠 앞둔 어느 날, 그는 “생각했던 모임이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모임을 그만두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가 생각했던 모임은 어떤 모임이었는지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독서의 주요한 목적과 의미는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히려는 의지다. 때문에 독서 모임에서도 논쟁점이 있는 주제를 다룬 책을 선별하는데, 사람마다 취향이 다를 수 있기에 책의 내용을 미리 살핀 뒤 신청하라는 의도로 도서 목록을 미리 공개한다. 그런데도 그는 단지 웃고 떠드는 가벼운 모임을 바랐던 걸까.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외로웠다. 친구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던 사람이 생각의 차를 좁히지 못하고 떠나가는 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그를 만나기 전에도 뜬금없이 모임을 나가거나 연락 두절이 된 사람들이 있었기에, 모임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을 쉽게 만날 것이란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그가 일방적으로 탈퇴 통보를 알린 후 나는 한동안 무기력했다. 앞으로 어떤 모임을 해야, 모임에서 어떤 책을 읽어야 그가 예상했던 모임에 부합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두 달여를 보냈다. B급 취향을 유지하려면 고정적인 수입이 있어야 했기에, 나는 잃어버린 자신감을 끌어모아 다시 독서 모임 공지 글을 올렸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은 참인 듯했다. 그 후 거짓말처럼 모든 모임이 원활하게 운영되었고, 탄력을 받은 나는 매월 새로운 독서 모임을 모집했다. 물론 모임을 도중에 그만두거나 연락에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은 있었으나, 적어도 “생각했던 모임이 아니다”라는 말은 듣지 않았다. 나와 생각이 같거나 비슷한 사람들이 모여 조금씩 B급 취향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어쩌면 B급 취향을 통해 친구를 만들겠다는 내 계획은 무산됐다. 그러나 친구 대신 많은 동지를 얻었다. 독서 모임과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모임원들, 그리고 올 때마다 나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암묵적으로 나를 응원하는 손님들. 제 돈과 시간을 들여가며 B급 취향을 찾아와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뜻을 함께 하려고 모이는 사람들에게 고맙다. 그들 덕분에 무탈히 1년을 버텼다.     


오랫동안 B급 취향을 지켜달라는 사람들에게 나는 늘 ‘임대 계약만 끝나면 당장 그만두고 싶다’라고 말한다. 내 생계를 책임지지 못하는 B급 취향이 커다란 짐 덩이처럼 느껴지면서도 책과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이곳을 무척 애정 하기에, 그 말은 농담이자 진담이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을지 모를 B급 취향을 조금 더 오래 지속하려면, 일단은 내일도 문을 열어야 한다. 그리고 이곳을 원하는 더 많은 동지를 만나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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