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1. 어미 태의 보호에서 버림받은 자들

by 에스겔

엄마의 태는 안전한 보호가 있다. 온도는 항상 일정하다. 엄마의 몸이 일차 보호막이고 그 안의 자궁이 이차 보호막이다. 그리고 자궁 안의 태반이 3차 보호막이다. 그리고 그 태반 안에 양수가 있다. 이 양수가 4차 보호막이다. 이렇게 다중의 보호 안에서 인간은 살게 된다.


보호 안에 있던 아이가 어미의 산도를 따라 나오려면 어미가 겪는 고통을 함께 겪게 된다. 어미가 산통은 좁은 사도로 아이를 낳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도 좁은 산도로 나오면서 눌리고 압박당하는 고통을 당한다. 그래서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우는 것이다. 안전한 자궁에서 모든 충격이 차단되어 있는 상태에서 갑자기 압박당하는 고통과 어미가 느끼는 산통의 감정이 고스란히 신경과 피로 전달된다. 그러니 아이의 충격이 어떠하겠는가? 어미는 이미 세상에서 고통을 경험했었지만 아이는 이러한 고통은 처음이다. 너무 어려서 기억하지 못한다고 하지만 아이는 그 모든 고통의 트라우마를 안고 태어난다. 그래서 태어난 인간은 운다. 인간은 울면서 태어난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인간이 이렇게 산통을 겪는 것은 인간의 죄악 때문이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였을 때 이 산통이 인간에게 주어졌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형벌을 겪는다. 어미는 자식을 낳을 때마다 그 형벌을 겪는다. 그렇게 하여 자신들의 유전자 속에 새겨진 범죄를 기억하게 된다.


인간은 태에서 나옴으로 따뜻하고 사랑으로 가득하고 양분으로 가득한 어미의 품에서부터 방출이 된다. 바로 버려지는 것이다. 어미의 사랑의 품을 벗어나 차가운 세상으로 버려진다. 어미가 생명의 양분을 나누어주던 태에서 끊어져 스스로 먹고 숨 쉬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비정한 세상에 버려진다. 태에서는 숨을 따로 쉴 이유가 없다. 어미의 태반으로부터 산소가 공급된다. 그러나 태에서 나와 세상에 나오고 태반이 끊어지는 순간 숨 쉬지 않으면 아이는 질식사한다. 혹 어미의 자궁에서 나오는 시간이 길어지고 그 사이 태반을 통한 공급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아이는 출산 중 사망하게 된다. 아이를 출산하는 중 그 통로가 좁아 아이가 나오지 못할 정도가 되면 탯줄도 눌리거나 끊어질 수도 있다. 탯줄이 눌려도 태반을 통한 혈액의 공급이 끊어지고 그 순간 산소의 공급이 끊어진다. 그렇게 아이는 죽게 된다. 출산이란 이렇게 위험하고 무자비한 생사의 투쟁이다. 출생이란 생명을 낳음이지만 그 출생은 사실 어미의 자궁의 모든 보호에서 퇴출되는 보호종료 신호다. 그렇게 출생은 버려짐이다. 바로 세상으로의 버려짐이다. 이제 어미의 완전한 태의 보호를 벗고 나와 세상과 맞서 생사의 투쟁을 해야 한다. 스스로 숨 쉬도록 아이의 엉덩이를 때려서 울게 해서라도 숨을 틔워야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아이는 스스로 숨 쉬지 않음으로 질식사하게 된다. 이것이 과연 축복이겠는가? 이 척박한 가시와 엉겅퀴-투성이 세상에 떨어지는 것이 과연 축하할 일이겠는가?


아이에게는 태반으로부터 양분이 공급되고 필요한 면역세포들도 공급된다. 그런데 어미의 태반에서 끊어지는 순간 그 모든 것은 사라진다. 아이가 태어나면 어미의 모유에서는 초유가 나온다. 초유에는 강력한 면역성분들이 포함되어 있다. 초유에 이런 면역성분이 포함된 것은 세상에 버려진 아이가 더 이상 어미의 태반으로부터 모든 것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대신하여 아이의 목숨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초유의 면역성분은 어미가 내어주는 생명의 보호막이며 자기 아이를 살리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것이라도 없다면 아이는 당장 외부의 병원체에 감염되어 죽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아이는 스스로 자가면역을 형성하여 외부의 병원체와 싸워 이겨야 한다. 어미의 태에서는 어미가 면역을 형성하여 그것을 아이에게 탯줄을 통해 공급했다. 그러나 이제 아이는 어미와 분리되어 세상과 홀로 싸워야 한다. 출산은 그 시작이요 나중에 성인이 되고 결국 어미가 생을 다하는 순간에는 완전히 홀로 싸우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바로 외톨이가 되는 것이다.

한 번은 늙은 부모님이 바로 세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고아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저분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이제 그 나이가 늙어 자식의 보호를 받지만 모든 것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고 그 대가도 스스로 짊어져야 한다. 더 이상 의지할 수 있는 엄마와 아빠가 없는 것이다. 어릴 때는 울면 해결되고 동네 아이가 괴롭히면 집으로 뛰어가 어미와 아비의 품을 의지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무도 없다. 인간은 출생과 함께 이런 과정을 시작한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는 완전히 홀로 서야 한다. 그것을 대신할 자도 그 고통을 덜어줄 자도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렇게 철저히 홀로 버려지는 과정을 인생이라는 처절한 고통 속에서 경험해야 한다. 출생은 이러한 운명의 서장이다. 바로 버려짐의 서장이다.

내가 이것을 기록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경험한 나 자신의 감정을 전하는 것이다. 스스로 느낀 것도 있지만 타인의 마음을 읽어 공명되어 아는 것도 있다. 세상은 온통 흥미로운 것으로 가득 찼지만 세상은 고통이다. 특히 다른 이의 마음을 읽는 자는 더 심하다. 스스로 억눌러 그 모든 것을 모른척했지만 그래서 아무것도 표시를 내지 않았지만 나는 태어날 때부터 다른 이들의 감정을 읽었다. 그리고 그 생각들이 느껴졌다. 그것은 공포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사람들에게 아무런 표시도 내지 않았다. 심지어 내 유형의 사람들은 상대의 감정을 잘 느끼지 못하기에 그렇게 스스로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도 스스로 부정해도 사실 늘 긴장이 되었다. 상대들의 감정과 생각이 느껴지니 그런 사람들의 속마음을 아니 나는 늘 초긴장 상태였다. 상대의 표정을 읽을 필요도 없었다. 그 이전에 이미 상대가 느껴졌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축복이 아니었다. 나이가 들고 은사적으로 발현이 되었을 때는 보지도 않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느껴질 때가 많았다.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에 대해 말을 할 때 그 사람의 생김새와 성격, 평소 습관처럼 사용하는 말들까지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니 앞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은 너무 깊이 느껴진다. 상대들의 의도와 그럴 수밖에 없는 그들 마음의 병듦도 느껴진다. 심지어 상대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것도 나는 느껴진다. 그런데 그 마음들을 보는 것은 지옥이다. 그런 사람들 앞에 내가 선다는 것은 지옥이다. 이런 세상에 내가 내팽개쳐진 현실은 지옥이다. 내게 사람들의 마음은 지옥이다. 결코 아름답거나 따사롭거나 편안하지 않은 존재들이다. 타인의 마음은 지옥이다. 그냥 일반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도 세상에 버려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형벌은 그런 세상의 존재들의 마음을 읽는 것이다. 동물들도 그것을 아는 것 같다. 내가 불쌍히 여기거나 어여삐 여기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저 멀리 있는 강아지들도 나를 향해 달려온다, 처음 보는데도 주인의 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도록 나를 향해 목이 졸리도록 몸짓을 한다. 그렇게 달려오는 이유는 하나다. 이런 인생에 버려진 나 자신이 한없이 가여운 존재임을 알기에 그렇게 함께 놓인 타자들도 가여운 줄 안다. 그렇게 가엽게 여기는 것을 동물들도 안다. 특히 인간 중에는 어린아이들이 본능적으로 잘 안다. 본능적으로 알고 웃음을 보인다. 이 세상은 한 없이 가여우며 또 한 없이 공포스럽다. 공포스러운 마음들의 세상이라 공포스럽고 그런 세상에 버려진 것이 한없이 가엽다. 한낱 작은 인간의 느낌도 이러한데 무소부지(無所不知)한 지존자(至尊者)의 마음은 어떠하랴? 영원을 사시는 지존자는 영원히 그 마음들을 느끼는 지옥에 살게 되지는 않을까? 그 마음은 이미 지옥도가 아닐까? 그런 지옥을 지존자에게 경험케 하는 지옥의 마음을 가진 인류는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 대가가 죽음 이후로 한정된 지옥이라도 그것은 가벼운 것이다. 지금 당장 지옥으로 들어가 지옥을 느껴야 지존자와 공평한 형벌을 당하는 것이다.


이런 지옥도에 내던져지는 것이 출생이다. 그러니 인생이여 생일을 축하하고 기념하랴? 아니면 인생의 본질을 깨닫고 고심하랴? 그리고 그 죽는 날을 유념하고 겸손히 지존자의 앞에 나아오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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