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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Oct 13. 2022

1. 인자: 권세자(첫아담)

하나님의 형상: 아담

1.    인자: 권세자


글을 쓰는 목적: 하나님의 군대에게 동원령을 발령


 하나님은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시는데 사람을 사용하신다. 그런데 사람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 알지 못하면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할 수가 없다. 우리에게 주신 권세와 특권을 알고 그것을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려야 한다. 그런데 성경을 읽으면서 이 부분이 많이 열리지 않아 가려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인자라는 단어를 통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역의 수종자(servant)로서 인류에게 주어진 강력한 권세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 권세로 어둠의 왕국을 무너트리고 세상의 어둠을 점령하는 강한 군대가 세워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써내려 간다.


 이 책은 학자들이나 신학도들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다. 일반 성도들을 대상으로 쓰인 책이다. 그래서 아주 쉬운 설명의 형태로 책을 집필하려고 한다. 현학적 허세나 어려운 학술적인 용어들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주제의 난해함을 고려함과 동시에 독자들의 수준에 맞는 언어의 선택을 위해 일상적인 단어로 자세히 설명한 해설문 형식으로 집필하려고 한다.
 또한 결론만을 제시하는 책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 근거를 도출하는 방식까지 독자들에게 설명하는 책을 쓰고 싶다.


성경문맹의 암흑기를 이기는 군대


일반 성도들도 성경을 연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고 권리이기 때문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만이 할 수 있는 고난이도의 작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현실을 깨뜨리고 싶다. 사실 방법만 알게 되면 어린아이도 나이 든 시골 문맹의 할머니도 한글을 쉽게 배운 후 성경을 연구할 수 있다. 그것도 아주 쉽게 배울 수 있다. 종교개혁으로 만인 제사장직과 성경이 모든 성도들의 것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주입식 교육과 기본적인 문해력의 약화로 성경이 있으나 성경이 없는 성경 문맹의 암흑기가 계속되고 있다. 목회자들조차 기본적인 성경연구의 툴들을 잘 모르고 있다. 배워도 수박 겉핥기식으로 배운다.
 신학교에서 해석학 즉 석의를 배우면 석의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석의의 결과물을 그냥 읽어서 전달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교수나 교수가 신뢰하는 학자들이 이미 해석해 놓은 것을 읽어서 전달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주석 읽어 주기식 수업을 한다. 물론 기본적으로 석의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은 가르친다. 그러나 그 원칙을 어떻게 실행하는지는 가르치지 않는다. 실제로 어떻게 문장과 단락과 장, 책을 읽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실제를 가르치지 않는다. 실제적인 석의 해석학이 없다. 기본적으로 글을 읽고 객관적으로 해석을 하는 방식을 모른다.


거짓 권위와 거짓 선지자를 분별하는 군대


 이러다 보니 설교를 하시는 분들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전달하려는 의도를 전달하기보다 아전인수격으로 해석을 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는 경우가 많다. 성도들이 들었을 때 무언가 잘못되었지만 그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고 적용하면 안 된다는 지적을 할 수가 없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이기에 거기에 토를 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이런 비성경적인 거짓 권위에 대해서도 대항할 근거를 찾지 못한다.
 교회 모임 안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고의 권위이고 유일한 권위다. 심지어 선지자라 하더라도 그 선지자가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이나 다른 영의 말을 전하면 거짓 선지자가 되고 그 선지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명하셨다. 이런 구약의 명확한 말씀을 우리는 읽을 수 있다. 자기 자리를 떠난 천사들에 대해 책망하는 글을 인용한 신약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을 우리는 읽었다. 중세 카톨릭적 사제 주의와 하나님의 권위를 대체하는 거짓의 아비(a holy father)들의 사도(pope)에 대한 종교개혁자들의 선포와 절규를 우리는 잊었다. 저 경건한 청교도들이 살았던 영국에는 목사가 설교한 후 목사가 설교한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성도가 성경을 근거로 예배시간에 공식적으로 일어나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했다는 선례를 잊고 있다. 사도 중 막내와도 같은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사건을 우리는 읽어서 기억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이나 그 직분 자체가 권위가 아님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 직분자가 하나님의 편에 속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때는 권위가 있다. 그러나 선지자가 거짓을 예언하거나 왕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면 일반 백성들이 선지자를 돌로 치는 것을 그리고 아낙도 그 왕의 머리에 말뚝을 박는 것을 기억하는가?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의 권위 외에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그 우상에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단 하나님이 허락하신 권위이기에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존중하는 것이다. 그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임한 기름부음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름부음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지 인간이 만든 학위와 교단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기본적인 소양과 학문을 겸비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과 역사를 통해 내려오는 부흥의 시대를 살았던 그 현장에서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은 부인되고 있다면 우리는 거짓의 현장에서 거짓의 종교를 섬기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이든 평신도이든 아니면 교회의 장로들이든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뜻의 비추심 외에 높아진 모든 것은 우상이다. 설교자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의 눈치를 본다면 그것은 우상이다. 그러한 권력을 성도들이 목회자에게 행사할 수 있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가 세상의 조직이 되고 세상의 서비스업종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 서비스를 위해 교회가 프로그램을 운영하든, 은사를 사용하여 기적을 행하든 그 중심에서 행해진 모든 것은 우상숭배다. 돌이켜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완전히 전환된 회심한 성도들로 채워진 교회에서만 하나님의 뜻이 행해질 수 있다. 그렇지 않고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도 그곳은 교회가 아니다. 그곳은 진정한 에클레시아가 될 수 없다. 그곳에서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과 함께 하는 사귐은 존재할 수 없다. 교회에는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도 그 왕좌를 차지할 수 없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런 교회는 없다'라고 그러나 진리는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의 시대에는 교회가 없다'라고 '하나님은 당신의 시대에 없다'라고, 그러나 ‘믿는 의인이 있는 곳에 하나님은 그 사람의 믿음을 통하여 그 시대를 변화시키시고 강력한 부흥으로 수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그리고 세상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이 있다'라고.



시 14:1-7 바른


1 [지휘자를 따라 부르는 다윗의 시]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속에 말하기를 "하나님은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부패하고 행실이 역겨우며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다.

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살피시며, 명철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보시니,

3 모두 치우쳤으며 한결같이 타락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구나.

4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무지하지 않으냐?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한다.

5 그들이 거기서 두려워하고 두려워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의인의 세대에 계시기 때문이다.

6 너희는 가난한 사람의 계획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께서는 그의 피난처가 되신다.

7 참으로 이스라엘의 구원이 시온에서 나올 것이다.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포로 된 것을 돌이키실 때에, 야곱이 기뻐하고, 이스라엘이 즐거워할 것이다.
 (시 14:1-7, 바른)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는 군대


 세상의 평가를 등지고 하나님의 평가를 따라 살았던 한 인물이 있었다. 영국에서 온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라는 선교사였다. 그는 영국에서 중국으로 온 선교사였다. 그곳에서 그는 아내 캐롤라인을 잃었다. 그리고 선임 선교사와의 불화로 영국 선교부와도 결별했다. 실의에 빠진 토마스는 항구에서 통역일을 하다, 조선인들을 만났다. 조선은 쇄국정책을 펴고 있어서 정상적인 무역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밀무역을 했는데 그 밀수업자들을 만난 것이다. 그런데 그 밀수업자들에게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토마스와 함께 조선인 밀수업자를 만난 윌리암슨 선교사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저는 조선이 현재 어떤 나라인가 하는 것보다 앞으로 어떤 나라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분명히 조선은 큰 역량을 지닌 나라입니다. 조선인들은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부지런하고 빈틈이 없으며 영리하고 게다가 단호한 성품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평가는 밀무역자를 향한 평가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밀무역자가 목숨을 걸고 서양 신부들을 한국으로 안내하는 천주교 신자였다지만 그래도 밀무역을 업으로 하는 사람인데 그 밀무역자나 조선에서 온 동지사들과의 만남을 통해 조선에 대해 평가한 것을 보면 과분하기까지 하다. 아마 하나님께서 남자가 여자에게 반해서 사랑에 빠져드는 것처럼 토마스를 조선을 향한 열정에 불타오르게 하셨던 것 같다. 그는 조선에 가면 순교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조선으로 가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배를 구해서 1차 조선 선교여행을 갔다. 순조로운 듯했으나 한양으로 가던 도중 풍랑을 만나 거의 난파하다시피 하여 북경으로 갔다. 결국 실패를 맛본 것이다. 사람들의 평가는 냉담했다.


 사람들의 조롱에도 토마스의 조선을 향한 열정을 꺼질 줄 몰랐다. 길들이 막혔지만 그는 제너럴 셔먼호라는 영국 배가 아닌 미국 상선에 타고 조선에 갔다. 학자들의 짐작으로 그 배는 정상적인 상선이 아니라 밀수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위험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길이 주어지지 않았음에도 토마스의 열정은 꺼질 줄 몰랐다. 그는 열정에 불타올라서 비정상적인 루트라 할지라도 조선에 복음을 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은 열매도 없이 대동강에서 사그라드는 듯했다. 그는 죽임을 당했다. 허무하게 그뿐만 아니라 그가 탔던 배도 불타올랐고 함께 했던 선원들도 죽임을 당했다.


 그는 중국에서도 내륙에 중국인과의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선교방식으로 인해 선교사들과 선교부에서 배척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의 길이었다. 우리가 아는 허드슨 테일러도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동일한 선교 방식을 고집했고 결국 그 선교를 통해 중국이 변화되었다. 그러나 그들도 사람들과 동료 선교사들에게 배척을 받았었다. 토마스가 대동강에서 순교당했을 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선교사 동료들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아마 중국 내지 선교와 직접 접촉 선교를 반대했던 그 반응 그대로 그의 조선행은 잘못된 것이며 그래서 그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의 선교방식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었을 것이다. 요즘 말로 그는 개죽음을 당했다는 것이 그들의 평가였을 것이다.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마지막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은 토마스의 삶이었지만 하나님은 그의 삶을 통해 조선에 부흥을 가져오셨다.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 하나님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의 삶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신다. 그들을 세상에 내어놓으시고 그들을 회심케 하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부흥을 준비하신다. 그러니 이 세상에 그러한 교회는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우리 민족의 역사에도 그러한 부흥의 시기들이 있었다. 지금도 개인적으로 작은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부흥을 맞아 토마스와 같은 삶을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은 그들의 산제사를 통해 죄 많은 민족을 놀랍게 부흥으로 타오르게 하시어 열방을 섬기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작은 단체들과 큰 단체들을 통해서도 이미 그러한 부흥들이 개별적으로 일어나서 열방의 미전도 종족들을 섬기고 있다. 여러분들은 오늘날 그 옛날 영국의 웨일즈 남부의 한 곳에서 온 수많은 배척을 받았던 이름 없는 선교사에게 내렸던 비판을 지금도 그들에게 가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도 그 의인들의 세대에 계신다. 화형을 당한 쟌 후스의 하나님은 후스가 탄 재에서 그의 열정을 다시 일으키시어 100년 후 종교개혁의 불길을 타오르게 하시며 루터를 통해 로만 카톨릭이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부흥을 가지고 오셨다. 하나님은 의인의 세대에 계신다.


짐승의 권력을 이기는 군대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다. 그 보다 높은 것을 주장하는 자들은 우리를 종 삼으려는 거짓 사도들이다. 중세 카톨릭의 거짓 아비(a holy father)들과 같은 양의 탈을 쓴 늑대들 음녀의 자식들을 향해 속아서 고개를 숙이고 굴종한다면 그 굴종한 자도 음녀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 이는 정상적인 직분과 정상적인 형제들 간의 섬김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를 거스르는 비정상적인 거짓 교사들에 관한 것이다. 막내 사도가 베드로를 책망한다면 권위에 도전하는 것인가? 일반 백성이 왕의 잘못을 책망하지 못한다면 그곳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이다. 오직 힘의 논리만 존재하는 사탄의, 짐승의 세상이다. 짐승의 세계에는 오직 힘의 논리만 존재한다. 짐승적 힘에 복종치 않는 자는 짐승적 힘에 의해 희생된다. 죽임을 당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힘만이 존재한다. 그 힘은 사람을 통해 진리의 선포, 그리고 진리의 실행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것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의를 선포하고 그 의를 실행하는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1]  첫 아담은 죄를 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우리는 아담의 실패로 그 자리를 떠나서 영원히 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귀의 아들(독사의 새끼)이 되어 하나님의 원수로 살기로 선택했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다시 하나님의 아들 됨 즉 양자 됨을 얻었다. 오직 권위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만 있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시오, 주인이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스승이시다. 성령님만이 우리의 스승이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하나님의 뜻이 부어지면 서로가 서로에게 겸손히 나눌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스승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이지 그 사람이 항상 스승이라는 것은 아니다. 누가 말을 하던지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분별됨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분별에 관한 부분에는 교회적인 차원의 장치가 필요하다. 이에 대한 부분은 미국 남침례교의 탁월한 스승이요 저술가인 헨리 블랙까비의 저서들에서 모범이 될만한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이외에도 성경적인 지침으로 가르침을 주는 많은 참고도서들이 있다. 물론 성경에서 바울의 서신서나 구약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기준들이 근원적인 지침이 될 것이다.


임재(Presence)의 성전에서 예배하는 군대


 단지 그 권면을 사랑함으로 예의를 갖추고 겸손함으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오직 하나님의 통치가 왕권으로 역사하는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이스라엘이 왕을 구했을 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셨음을 기억하는가? 사실 하나님 외에는 권위가 필요치 않은 곳이 하나님의 나라다. 나머지 직분들은 불가피하게 부족한 인생들을 위해 만드신 일시적인 것이다. 그것 자체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돌 위에 돌 하도 남지 못한 그 성전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 같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래서 성경 속 선지자는 이렇게 외쳤다.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믿지 말라. 이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것을 믿지 말라. 오직 하나님이 그곳에 임재하실 때 그곳은 하나님의 성전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오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관념이 아닌 하나님의 현존(Presence) 앞에서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감동을 듣고 그분의 일을 행한다. 그곳이 하나님의 성전이다. 모세가 만남의 텐트(회막)에서 하나님을 만난 곳, 어린양의 피로 그룹 사이에 하나님의 발이 머물던 곳, 그곳과 같이 예수님의 피를 들고 성도가 하나님의 면전에 담대함으로 나아가는 곳 그곳이 성전이다. 우리 속이다. 그런 우리가 모여 새 예루살렘의 성이 된다. 그곳에 하나님이 빛이 되시며 영원히 예배가 드려지는 천국이 영원히 지속되어진다.


흰 옷 입은 군대들로 가득한 세상을 꿈꾸며


 성령님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있는 곳에 하나님은 오신다. 그곳에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권위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다. 그 예수님의 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예수님과 함께 죽었으므로 흔쾌히 자신을 포기하고 형제들을 존중하고 섬김으로 다툼이 없다. 그곳에는 오직 하나님이 왕권을 가지고 통치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이 최종 권위가 된다. 그 말씀을 제사장들과 선지자들만이 아닌 모든 거듭난 성도가 읽고 깨닫게 되는 것이 새 언약이다. 성령님의 임재하심과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통해 확증된 진리가 통치하는 곳이 교회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형제들의 모임이 이 땅 가득 세워지기를 열망함으로 이 글을 쓴다.


[1] 누가복음 3:23 개정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 쯤 되시니라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위는 헬리요. ………38그 위는 에노스요 그 위는 셋이요 그 위는 아담이요 그 위는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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