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Matthew 5:33-37 개정
33또 옛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35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36네 머리로도 하지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하늘나라(가나안)에 입성하기 위해서는 죄의 나라의 법인 죄를 버리고 하늘나라의 법을 지켜야 한다. 그 범위는 모든 삶에 걸쳐 있다. 내가 산상수훈에서 맹세에 관해 말한 의도에 대해 적어보라
( )
나 예수가 산상수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구약의 그림자로 온 하늘(하나님) 나라와는 다른 신약의 참 하늘나라 백성들의 법을 말하고자 함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를 말함은 가나안 입성에 대한 참 기준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함이다. 이는 결국 하늘나라(가나안)에 들어오기 위한 항복조건을 선포함을 의미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는 항복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들이 들었던 것은 항복조항이다.
구약에서는 단순히 헛맹세를 하지 말 것에 대해 가르쳤다. 헛맹세란 지키지 못한 맹세를 말한다. 그래서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키라고 명했다.
그런데 나 예수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는 구약의 율법을 폐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약은 분명 맹세를 허용하고 그 맹세를 지키라고 했다.
내가 와서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구약의 맹세에 대한 율법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적어보라.
( )
내가 구약의 법을 폐한 것인가? 결코 아니다. 그보다 더 완전한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나는 율법을 완전케 하려 한 것이지 율법을 폐한 것이 아니다. 구약의 법이 인간의 악함을 고려한 법이었다면 신약의 법은 인간의 악함을 고려하지 않은 완전한 율법이다. 이는 신약의 법은 참으로 거듭난 자들에게 주는 법이기 때문이다. 구약의 가나안에 들어간 자들과 신약 이후의 너희는 다르다. 구약은 약속을 바라보고 그 약속한 것을 받지는 못했다.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강림이 있기 전에는 인간들이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었다. 오직 신약의 구원이 성취되고 나서야 그 능력이 부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거듭난 자들 안에 율법을 완전케 하려는 의도로 이와 같은 계명들을 선포한 것이다.
신약에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스스로 인간은 머리카락 한 올도 검거나 희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기반하지만 그 일을 한 결과는 인간의 소관이 아니다. 노력하여 공부를 할 수 있지만 좋은 성적을 꼭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환경이 아닌 수제들이 모인 곳에서 처음 공부하는 내용으로 시험을 친다면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다. 또 그 내용의 난이도가 높아 일반인들이 결코 이해하기 쉽지 않은 내용이라면 그것도 장담할 수 없다. 또한 스스로의 의지를 통제하여 공부에 매진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그것이 인간이다. 스스로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못하다. 수고하여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어도 태풍이나 홍수가 그 전원주택을 파괴하는 것을 인간이 막을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내가 예를 든 것이 머리카락 한 올도 인간이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다. 그런 인간이 반드시 그것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만용이요 오만이다.
인간의 겸손한 태도에 대한 야고보의 언급은 다음과 같다.
James 4:13-15 개정
13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아
14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15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바로 겸손히 우리의 뜻을 살피는 것이다. 우리의 뜻을 살피고 예하고 복종할 것에 복종해야 하고 금지할 것(악)을 거절하여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예와 아니오다. 야고보도 다음과 같이 말했다.
James 5:12 바른
나의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마라. 하늘로도 땅으로도 다른 무엇으로도 맹세하지 마라. 너희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여 심판을 받지 않도록 하여라.
마태의 현 본문(마 5:33~37)과 동일한 내용이다. 인간은 오직 우리의 명령을 따라 예와 아니오를 할 수 있다.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 5:37)." 바로 맹세에 관한 계명의 마지막(마 5:37)에 언급한 내용이다.
바울은 인간의 겸손한 태도를 유지하며 사역에 임했다.
바울은 2차 선교여행 중 고린도에 머물렀다.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이곳에서 만났다. 바울과 그들의 직업은 텐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들과 동역하던 중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회당을 나와 브리스가의 집에 함께 모인 에클레시아가 되었다. 그곳에서 1년 6개월을 복음을 전했다(행 18장).
후에 3차 전도여행 중 바울은 에베소 두란노 서원에서 성경을 통해 매일 복음을 전했다. 회당에서 석 달을 전했지만 반대하는 자들로 인해 두란노 서원에서 2년 동안 전파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심지어 마술 하는 자들이 책을 모아 불태웠는데 은전 오만 개였다. 약 800만 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그 당시 에베소의 규모를 생각하며 에베소에 있는 모든 주술서적이 불탄 것이다. 이렇게 부흥을 경험하고 있을 때 성령이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도록 바울을 감동했다. 그래서 그 감동을 따라 바울은 말했다.
"내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그 후에는 로마도 가보아야겠다."(행 19:21, 고전 2:15)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를 떠나 마케도니아 여러 곳을 두루 살폈다. 그리고 헬라(그리스) 즉 당시 아가야 속주라 불리는 지방에서 3개월을 머물렀다. 이때 고린도에도 방문을 했다. 방문 전에 바울 자신의 방문을 고린도에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고린도전서다.
"성도를 위한 헌금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령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여라.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매주 첫날에 저축해 두어서, 내가 갈 때에 헌금하지 않도록 하여라. 내가 도착할 때에 너희가 인정한 자들에게 편지를 써 주어서,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할 것이다. 나도 가는 것이 마땅하다면, 그들이 나와 함께 갈 것이다. 내가 마케도니아를 지나갈 것인데, 마케도니아를 지난 후에 너희에게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내가 너희와 함께 머물며 겨울을 지내게 될 것 같으니, 이는 너희가 나를 내가 가려는 곳으로 보내 주도록 하려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지나는 길에 너희를 보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주께서 허락하시면 얼마 동안 너희와 함께 머물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는 오순절까지는 에베소에 머물 것이다. 내게 크고 효과적인 문이 열렸고, 또 나를 대적하는 자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1 Corinthians 16:1-9 바른)
고린도에 보낸 두 번째 편지(고린도 후서)에서는 자신의 두 번째 방문이 성령의 지시를 따른 것이며 결코 자신의 뜻(육체)대로 계획한 것이 아니었음을 밝혔다.
"내가 이 확신을 가지고 먼저 너희에게 가려고 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두 번(두 번째)[^1] 은혜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 나는 너희를 방문하고 마케도니아로 갔다가 다시 마케도니아에서 너희에게 돌아가 너희의 도움으로 유대로 가기를 계획하였다. 내가 이것을 계획할 때에 어찌 경솔하게 하였겠느냐? 또 내가 그것을 계획할 때 육체를 따라 '예, 예.' 하고 '아니오, 아니오.' 하려고 계획하였겠느냐? 하나님은 신실하시므로 너희에게 한 우리의 말은 '예.' 하고 금방 '아니오.' 한 것이 아니다."
(2 Corinthians 1:15-18 바른)
그리고 세 번째 방문할 것도 알렸다.
"보아라, 이제 내가 세 번째 너희에게 갈 준비를 하였으나,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겠다. 내가 구하는 것은 너희의 재물이 아니고, 오직 너희이다. 자녀들이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들을 위하여 재물을 모으는 것이 마땅하다. 너희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내가 가진 것을 기쁘게 쓰고 나 자신도 희생하겠다. 내가 너희를 더 많이 사랑하는데, 내가 더 적게 사랑을 받아야 하겠느냐?"
(2 Corinthians 12:14-15 바른)
바울은 자신의 계획 따라 산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말하는 지시를 따랐다. 물론 길이 막히거나 핍박들이 있어 그 길들이 변경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바울은 그 순간들을 물으며 걸었다. 아시아(터키)와 마케도니아 아가이아(그리스)에서 도보와 뱃길로 오간 그 모든 순간들에 에녹과 같이 우리와 동행했다.
그가 돌에 맞아 성밖에 버려졌을 때에도 다음날 일어나 다시 성에 들어가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것도 우리와 동행했기 때문이다.
아시아에서 살 소망을 잃어버릴 만큼 힘들었던 시간들도 그는 나와 함께 있었다. 바울이 내 안에 그리고 내가 바울 안에 있었다. 눈물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바울의 눈에서 눈물이 날 때도 그는 나와 함께 했다. 굶어서 일어날 힘이 없을 때에도 그는 나와 함께 길을 걸었다. 추운 겨울밤도 더운 여름도 그리고 아름다운 봄 꽃들 속에도 그는 나와 함께 걸었다. 여름의 찬란한 햇살 가운데 터키(소아시아)의 피스타치오 나무가 작은 잎들을 반짝일 때에도 그는 파스텔톤 황토 길을 나와 함께 걸었다. 풍랑 속에서 배가 난파될 때에도 그는 나와 함께 있었다. 나는 바울 안에서 그 모든 여정을 함께 하며 그를 통해 이방에 빛이 비취게 했다. 그는 내 안에서 이방의 빛이 되어 세계 선교의 역사를 썼다.
인간이 자기 존재적 의존성을 깨닫고 겸손히 우리에게 나올 때 그 존재가 가장 겸손한 존재다. 그리고 온전히 우리를 의지하고 세상의 모든 도전을 깨트리고 응전하여 이기고 이기고 이길 때 그가 겸손한 존재다. 세상은 항상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아집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한 존재는 우리의 뜻만을 소중히 여긴다. 다른 모든 것을 진리의 검으로 베어버리고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뜻 안에서 순종하여 십자가를 진다.
그런데 세상은 본능적으로 거듭난 겸손한 존재를 대적한다. 그리고 자신들과 같지 않기에 자신들의 길을 가지 않는 그를 향해 교만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인간으로 갔던 나 예수에게도 그들은 교만의 죄를 물었다. 나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적용하려 했다. 교만하여 가장 교만한 신성모독을 저지르는 자로 평가했다. 그리고 말했다. 너는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의 권세로 이렇게 하는가? 그들은 내가 바알세불의 권세로 일을 한다고 했다. 돼지들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 바알세불의 권세를 의지하는 자들의 눈에는 바알세불의 권세를 의지하는 자만 보인다. 교만한 자의 눈에는 교만한 자만 보인다. 그들은 내가 귀신들의 왕을 힘입어 역사한다고 했다. 그들이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은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나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자기 교만과 열등감 속에서 헤매는 어리석은 맹인들일뿐이다. 진실과 거짓도 구분하지 못하는 미성숙한 저능아들이다. 그것이 인간의 존재적 정체성이다.
그것을 깨닫는 자는 겸손한 존재가 되고 우리를 찾고 찾아서 만난다. 목이 마른 자라야 사막의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게 된다. 갈급하고 허덕이는 마음으로 우리를 찾고 우리를 의지하며 우리를 사랑한다. 그것이 겸손한 존재다. 그리고 모든 판단도 오직 우리에게 귀 기울여 듣는다.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서는 모든 믿는 자는 우리와 함께 한다. 바울이 함께 했고 에녹이 함께 했던 것처럼 그들은 우리와 함께 한다. 함께 하여 모든 것을 묻고 모든 길을 우리와 함께 한다. 그들은 모든 것에 우리에게 묻고 그 들은 길을 따라 우리와 함께 한다.
그렇지 않은 모든 자는 교만한 자요. 우리와 상관이 없는 악마의 종들이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이다. 누군가 '나는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성경 지식과 나의 판단을 의지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가장 교만한 자의 정점에 서있는 자다.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길에 서있는 자다. 우리(하나님)와 사귐이 없는 자는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 세상에 속한 자다. 그런 그가 감히 자의적인 판단을 내린다면 그것도 성경을 핑계하여 그렇게 한다면 그 판단은 우리와 상관이 없다. 수백 년 전 홍길동전을 일고 홍길동의 길을 짐작하여 자의적 판단으로 홍길동의 뜻을 행하는 자와 그가 무엇이 다른가? 그런데 그 판단을 성경을 통해 자의적으로 생각하였다 하여 그 판단이 옳은 줄 생각하므로 그는 반드시 우리의 일을 대적하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세상에 속하였으며 또한 세상의 임금인 사탄에게 속하였기 때문이다. 자신도 알지 못하지만 그 스스로는 사탄에게 속하여 사탄이 집어넣는 생각들을 따라 행동하며 복음을 대적하여 나 예수를 부인하며 대적한다. 사탄이 집어넣는 생각을 자신의 사상으로 형성하여 세상의 풍조를 따라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다. 그의 모든 행동은 나의 나라를 대적하는 길로 귀결된다.
구약에는 모든 개인이 우리(하나님)에게 나올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묻고 모든 일들을 처리할 수 없었다. 이는 약속을 하고 맹세를 할 때에도 동일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개인적인 약속을 하고 맹세를 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는 맹세를 하라고 허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율법의 의도를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인간들이 맹세하고 함부로 자기의 길을 약속하고 타인과 언약을 하는데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결코 맹세하라고 한 것이 아니다. 인간은 머리카락 한 올도 희고 검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모두 자유의지로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불가항력적 운명 앞에서는 태풍 앞에 날려가는 가냘픈 존재가 인간이다. 그러니 그가 맹세를 한들 지킬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 헛된 맹세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고 주변의 다른 사람들에게 희생을 요구할 것인가? 여기 헛된 맹세의 길을 갔던 자의 허무의 기록이 있다.
##### 01.3.2.3.10.9.5.5.4.5. 맹세하는 자들의 길
맹세하는 자들의 길을 살펴보자. 보라 입다의 길을.
그때 우리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 그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고, 길르앗의 미스베를 지나 암몬 자손에게 건너가며 우리(여호와)에게 서원했다.
"만일 주께서 암몬 자손을 참으로 제 손에 넘겨주시면, 제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 제 집 문에서 나와 저를 영접하는 자가 여호와의 것이 될 것이니, 제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습니다."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가서 그들과 싸우니, 우리가 그들을 그의 손에 넘겨주었으므로, 그가 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살육하니,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하였다.
입다가 미스바 자기 집에 왔을 때, 보아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며 그를 맞으러 나오고 있었는데, 그는 무남독녀이었다.
입다가 딸을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말하였다.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를 비참하게 하며, 나를 괴롭히는 자들 가운데 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내 입을 열었으므로 돌이킬 수 없구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므로 아버지의 입으로 말씀하신 대로 제게 행하십시오.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기 때문입니다."
"저를 위하여 이 일을 허락해 주십시오. 두 달 동안 제게 자유를 주신다면, 산에 올라가서 제가 처녀인 것 때문에 저와 제 친구들이 실컷 울겠습니다."
입다가 말했다.
"가거라."
입다가 두 달 동안 딸을 보냈다. 그 딸이 자신이 처녀인 것 때문에 자기 친구들과 산 위에서 슬피 울었다. 두 달이 끝날 때, 그가 자기 아버지에게 돌아왔으며, 입다가 자기가 서원한 대로 그에게 하였는데, 그는 남자를 알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스라엘 가운데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집을 떠나 나흘 동안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애도하였다.
(Judges 11:29-40 바른)
맹세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어리석은 자는 자기 맹세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모르고 맹세한다. 또한 인간은 자기 계획의 결과가 무엇일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맹세하는 자여 너는 가장 어리석은 자이며 가장 교만한 자다.
그런데 앞에서 나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여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맹세에 관한 의를 찾아보자.
Matthew 23:1-39 바른
1그때에 예수께서 무리들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3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행하고 지키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
4그들은 짊어지기 힘든 무거운 짐들을 묶어서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면서 그 짐들을 나르는 데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려 하지 않는다.
5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다. 그들은 차고 다니는 성구 주머니들을 크게 만들고 옷술을 길게 늘어뜨리며
6잔치에서 높은 자리에 앉고 회당에서 높은 곳에 앉는 것을 좋아하며,
7또 장터에서 인사를 받고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한다.
8그러나 너희는 랍비라고 불리지 마라. 너희 선생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9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10또한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리지 마라. 너희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기 때문이다.
11너희 중 큰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12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다."
13"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하늘나라의 문을 닫아 놓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14(없음)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그러나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과부들의 집들을 삼키고, 남에게 보이려고 길게 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 엄중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가 13절 앞에나 뒤에 첨가되어 있음.
15"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개종자 하나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16"너희에게 화가 있다. 맹인된 인도자들아, 너희는 '누구든지 성전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든지 성전의 금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17어리석은 자들과 맹인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금이냐, 아니면 그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18또한 '누구든지 제단을 두고 맹세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누구든지 그 제단 위에 있는 제물을 두고 맹세하면 지켜야 한다.'라고 말한다.
19맹인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제물이냐, 아니면 그 제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20그러므로 제단을 두고 맹세하는 자는 그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며,
21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자는 그 성전과 그 안에 계시는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22또한 하늘을 두고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아 계신 분을 두고 맹세하는 것이다."
23"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신뢰는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24맹인된 인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다."
25"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26맹인된 바리새인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27"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으니, 이는 너희가 회 칠한 무덤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자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28이처럼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으로는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들을 세우고, 의인들의 기념비들을 장식하며,
30'우리가 우리 조상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그들과 함께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31그러므로 너희는 너희가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하고 있다.
32그러니 너희 조상의 분량을 너희가 채워라.
33뱀들아,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
34그러므로 보아라, 내가 선지자들과 지혜로운 자들과 서기관들을 너희에게 보내니, 너희가 그들 가운데 더러는 죽이거나 십자가에 못 박고, 그들 가운데 더러는 너희 회당들 가운데서 채찍질하거나 이 성읍 저 성읍에서 박해할 것이다.
35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너희가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에 이르기까지 땅에서 흘린 모든 의로운 피가 너희에게 돌아갈 것이다.
36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이것들이 모두 이 세대에 올 것이다."
37"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야, 암탉이 자기 병아리들을 그 날개 아래 모으려 하는 것과 같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들을 모으려 하였느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않았다.
38보아라, 너희 집이 버림받아 황폐해질 것이다.
39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제부터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다.'라고 말할 때까지 너희가 결코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을 거의 완벽하게 지켰다. 그들이 맹세에 관해 부가적으로 말한 규정들도 성경을 벗어난 어리석은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비웃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요구하는 것 이상의 행동으로 우리를 따랐다. 그것도 완벽하게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에는 다른 것이 있었다. 자기 자랑과 명예와 탐욕이 가득했다. 그들도 인간이므로 어찌할 수 없었다.
여기 마태복음 23장에서 인간이 맹세를 하는 근원적 심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자기 과시며 자기 증명이다. 타인들 앞에서 외식함으로 자신을 높이 세우기 위한 수단이다. 그 맹세한 것을 지킴으로 자신은 언행이 일치되며 심지어 하나님의 율법도 지키는 의로운 자임을 밖으로 드러낸다. 거듭나지 않은 자의 동기는 어찌할 수 없다. 그가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 하여도 어쩔 수 없다. 그가 거듭나지 않은 한 그의 속은 부패하여 죄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가득한 부패 덩어리가 자기의와 자기 명예를 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인간들은 이것도 하지 못한다. 심지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일조차 본인이 계획한 대로 지키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너희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에 비해 턱도 없이 모자라다. 그러므로 너희가 성경을 보며 바리새인들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다.
그렇다면 네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보다 나은 의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너는 맹세가 아닌 허락받음을 따라 목숨을 다해 순종해야 한다.
너희는 바울과 같이 모든 일에 묻고 허락을 받아 끝까지 순종해야 한다. 바울은 자기 고백에 의하면 우리를 따라 순종하는 일에 자기 양심에 자신을 책망할 것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순종했다(고전 4:4)
이것이 너희는 가능하다고 보는가? 그렇다 유대인들도 이 항복조건을 듣고 불가능을 깨달았다. 그리고 절망에 이르렀다. 율법의 행동을 준수하는 것도 힘들지만 바리새인들과 같이 극도의 노력으로 지킬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도 완벽하게 그것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와 친밀한 사귐으로 우리의 뜻을 알고 그 즉시 우리에게 순종해야 한다. 너희가 가진 본성을 생각하여 보라 이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애니어그램 1번의 기계 같은 행동능력을 가진 사도바울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그가 대단하다 하여도 인간이면 어떻게 죽을 정도의 돌을 맞고 깨어나서 다시 자신을 돌로 친 그 성읍에 바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겠는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우리에게 물어보고 우리가 들어가라고 했다고 해서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순종할 수 있겠는가?
나 예수와 제자들을 생각하여 보라. 우리 대부분은 갈릴리 출신들이었다. 사마리아와 비교하여 우리 갈릴리가 더 신앙적이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개 취급하고 신앙적으로 오염된 이단으로 취급했지만 갈릴리에 대해서는 더 나은 평가를 했다고 너희는 생각하는데 그것은 너희의 착각이다. 사마리아와 우리 갈릴리는 모두 북왕국에 속하여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할 때에 혼혈정책에 노출되었다. 그래서 이민족들과 피가 혼잡하게 되고 신앙적으로도 혼잡하게 되었다. 심지어 갈릴리 지역의 회당에서는 여러 짐승들의 형상들이 나오는데 이는 이교적 숭배들이 이곳에 침투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신앙적으로 사마리아나 갈리리를 비교하여 갈릴리가 낫다고 말할 수는 없다.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유대인들이 구분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사마리아는 적극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내세우고 북왕국의 정통성을 내세워 남왕국 유다의 후신인 유대인들의 신앙에 복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갈릴리는 북왕국의 기득권들이 존재하는 수도와는 거리가 먼 곳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신앙관에 대해 대적하지 않고 고분고분했다. 성전에 가서 제사장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 그리고 사두개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했다. 그래서 사마리아인과 같은 개 취급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갈릴리 또는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는 평가에서 보이듯 유대인들은 갈릴리에 대해 신앙적으로 문제가 많은 혼혈족으로 밖에 보지 않았다.
나 예수와 제자들은 이런 가운데 유대에서 사역해야 했다. 그래서 언제나 그들은 우리에게 물었다.
"너는 무슨 권세로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는가?"
유대인들에게 우리는 혼혈족이요. 이미 죄인이었다. 그래서 내가 기적을 행하면 정상적인 성령의 역사로 생각하지 않고 바알세불을 힘입은 역사라고 조롱했다.
그렇다면 나와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미 죄인으로 낙인이 찍힌 자들이 무엇을 말한다고 해서 종교적 경건을 가졌다는 자들이 정상적인 진리라고 인정을 하겠는가? 과연 그들의 대적을 피할 수 있겠는가? 결국 나 예수는 그들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혔다. 그리고 나의 제자들도 목 베임을 당했다.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 외에도 유대인들은 심지어 거짓증인들을 매수하여 나를 죄인으로 낙인찍었다. 나를 죄인으로 낙인찍어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왜 내가 유대에서 사역해야 한다는 말인가? 결국 고향 갈릴리도 아닌 타향 유대에서 십자가에 달리는 비참한 신세가 될 것인데 왜 그래야 한다는 말인가?
그 답은 오직 하나다. 겟세마네에서 묻고 그리고 아버지께서 지시(허락)하신 대로 순종할 뿐이다. 나의 모든 제자들은 순교를 당했다. 요한은 순교하지 않았지만 다른 순교한 제자들과 같은 죽음의 형들에 여러 번 처해졌다.
이 글을 읽는 너희는 나를 따를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은 너희가 참으로 나를 믿게 되면 모든 거짓과 세상의 모든 수단과 권력을 동원하여 너희를 죽이려 할 것이다. 그래도 자신의 헛된 계획과 맹세를 따라 살지 않고 오직 우리를 참으로 믿고 순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것인가? 그 길이 최악의 범죄자로 평가받고 국가에서 반역자로 낙인찍힌다 하여도 우리를 따를 것인가? 너희가 진정으로 나를 믿는다면 온 세상이 이런 일을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나와 나의 제자들에게 세상은 이렇게 하였다. 로마와 중세의 참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하였다. 죠으르지 폭스와 회중교회에게도 이렇게 하였다. 좐 후스와 모라비안에게도 이렇게 하였다. 요한 웨슬리와 감리교에게도 이렇게 하였다. 그렇다고 너희는 절망하지 말라. 너희는 그 모든 순간에도 순종으로 이기고 이기고 이길 것이다. 결국 면류관을 받고 천국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것은 불가능할 것으로 보이는가? 절망인가? 너희는 이것을 할 수 없는가?
그러나 이 절망은 산상수훈의 마지막에 나오는 길을 통해 해결될 것이다.
[^1]: 고린도 후서는 세 번째 방문 전에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편지다.(2 Corinthians 12:1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