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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Nov 02.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10

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01.3.2.3.10.9.5.5.5. 합법적 복수와 모두 내어줌의 간극


Matthew 5:38-42 개정

38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01.3.2.3.10.9.5.5.5.1.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

누구나 이 구절의 의미를 알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피해를 당하면 복수를 하는데 상대가 나에게 한 것에 비해 더 큰 복수를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그것이 죄성이다. 가인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손들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창 4장). 그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예외가 없다. 정의로운 모습을 하고 있는 인간도 잔악한 복수심에 사로잡히면 상대의 마지막 숨통조차 조여 잔멸하는 악귀가 된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부인하고 싶어도 언제나 인간들은 경험을 통해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피해를 입은 만큼만 돌려주라는 것이 구약의 계명이다. 이것을 모르는 자가 있는가? 최소한의 복수를 하라는 이 가르침은 세상의 법을 만드는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이 계명을 지키는 주체는 누구인가? 피해를 당한 자인가? 아니면 피해를 입힌 자인가?

이것이 파악되어야 이 계명의 의도를 알 수 있다. 결코 피해를 입혀서 보상을 해야 하는 자가 주체가 아니다. 피해를 입어 보상을 받든지 아니면 그 피해로 인해 복수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피해자가 해야 할 행동 규칙이다.

상대가 나의 이빨을 부러트렸으면 이빨만을 부러트리라는 것이다. 만약 상대가 나를 때려서 눈을 멀게 했으며 상대의 눈 하나만 멀게 하라는 것이다. 보통 이런 싸움이 벌어지면 상대를 죽여버리는 결과가 대부분이다. 특히 유목민이었던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르면 이는 당연한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평상시에도 상대를 약탈한다. 그런데 상대가 빌미를 제공하면 상대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가축을 빼앗는다. 그런 자들에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라는 것은 획기적인 기준이다.

구약의 계명을 받은 자들 즉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 조상 때부터 양을 치는 자들이었고 이집트에서도 여전히 양을 치다가 출이집트한 자들이다. 바로 유목민인 것이다. 유목민의 호전성은 칭기즈칸의 제국사를 통해 모든 인류에게 각인이 되어 알려졌다. 그래서 더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슬람의 호전성 역시 이런 유목민족의 기질에서 기원한다. 이슬람의 정복루트는 바로 유목민의 정복루트와 동일하다. 그들도 초원과 광야와 사막을 달리며 정복하는 유목민의 길들을 갔다. 너희가 이스라엘을 볼 때에 이를 잊고 성경을 해석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성경을 읽을 때에 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도 말을 타고 초원을 누비는 유목민의 후예다. 텐트를 치고 가축을 돌보며 초원과 물을 찾아다니는 그들이 바로 유목민이다. 물론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는 반농반목을 하여 농사와 유목을 병행했지만 그 기본 적인 기질은 변함이 없다. 말을 타던 것이 당나귀로 때로는 바뀌기도 하지만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기질이 고스란히 그들의 속에 남아있다. 이렇게 거친 인생들에게 줄 수 있는 계명은 최소한의 폭력성이었다.

세상의 모든 법들은 이러한 기준과 원칙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런데 너희가 아는 것처럼 너희에게 힘이 주어진다면 이런 기준에 의해 사는 것이 쉽지 않다. 미국이 총기를 허용하는 이유가 노약자나 여성들이 범죄에서 자신을 지키는 방어수단의 제공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최소한의 방어수단이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개척사는 그만큼 위험하고 척박하며 폭력적이었다. 총이 없이는 생명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신대륙은 광대한 기회의 땅이었지만 숲에는 곰과 표범이 그리고 황야에는 퓨마가 사람의 목숨을 노리며 늑대들이 상처 입은 자들을 시시 탐탐 노리는 곳이었다. 그 거친 땅에 정착하여 적응한 사람들도 이와 같아 거친 늑대와 같은 인디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고 그들이 땅을 차지한 사자의 포악함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밤은 무법천지로 밤길을 약자들이 편히 다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총이 필요했다. 그러나 힘이 없던 자들도 총이라는 힘을 가지면 최소한의 방어수단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성을 드러내고야 만다. 인간은 그것을 자제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러한 자들에게 구약의 율법은 참으로 힘겨운 것이다. 그것을 지키는 것은 온순한 농경민에게도 쉽지 않다.


01.3.2.3.10.9.5.5.5.2.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너희는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의 이야기]를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입은 피해를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위해주는 이런 삶이 인간에게 가능한 것인가? 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이런 삶을 살려고 할 자는 아무도 없다. 자신이 손해를 보는 것을 싫어하고 세상의 모든 것을 도적질 하기 원하는 인간의 본성으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모두가 자신이 한 일보다 더 많은 보상을 받기를 원하고 할 수만 있다면 이기적인 마음으로 세상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그 욕망의 탑을 향해 구더기들과 같이 똥물에서 꿈틀거린다. 그런 인간에게 피해를 입고도 그리고 억울한 고소를 당하고도 모든 것을 상대가 원하는 대로 내어주라는 것이 가능한 행동강령인가? 불가능하다.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도 어려운데 이가 하나 부러지면 상대의 분풀이를 위해 한대를 더 맞아 다른 이도 내어주다니 이것이 말이 되는가?

유목민의 후예였던 유대인들에게 이는 이로 눈은 눈으로도 불가능한데 바보처럼 모든 것을 약탈당해도 더 내어주라니 이것이 말이 되는 계명인가? 그 당시 유대인들이 이 계명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 어떠하였겠는가? 과연 천국에 들어오고 싶었겠는가? 이런 바보 같은 법을 지키는 억지스러운 법을 강요하는 나라에서 자신들이 얻을 이익이 있었겠는가? 물론 구약의 율법 순종을 목숨과 같이 여기도록 교육받은 탓에 이를 당연히 지키려 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바보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유대인들은 마음속으로 의문을 던졌다.

01.3.2.3.10.9.5.5.5.3. 바보 계명의 의도


질문 1: 바보 천치 계명?

그런데 이렇게 바보 천치가 되어 사기를 당하듯 모든 것을 빼앗기라는 것이 이 계명의 참의도이겠는가? 이러한 계명들을 과격하게 적용함으로 인해 전쟁을 반대하고 모든 전쟁과 관련된 행위를 거부하는 부류들이 있다. 심지어 손해를 입어도 세상 법정에서 소송하는 것이 성경의 법에 위배된다고 하여 소송을 하고 있는 다른 이를 정죄하는 자들도 있다. 그것이 과연 옳은가?

만약 집에 강도가 들어 아내를 겁탈하려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아내(오른뺨)뿐 아니라 딸(왼뺨)도 내어주어야 하는가? 어떤 자들은 타인이 자신을 강간하려 하면 저항하지 말고 상대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베풀라고 가르친다. 과연 내가 말한 계명이 이렇게 우스꽝스럽다 못해 참으로 무지막지한 기준을 제시하는 계명인가?

과연 소송을 통해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어야 하는가? 너희 생각을 적어보라.
(                                                         )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는 나의 의도는 무엇인가?


질문 2: 마태와 누가의 다른 진술?

여기서 잠시 다른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마태는 속옷을 구하는 자에게 겉옷(마 5:40)을 이라고 했지만 누가는 겉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속옷(눅 6:29)을 이라고 했다. 둘 중 무엇이 옳은 기록일까?

두 성경의 저자 중 하나는 기억의 오류를 일으킨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것일까?

과연 성경은 비평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편집되고 조작된 인간들의 기록들일까?

우리가 인간들에게 감동을 주어 성경을 기록할 때는 그들의 기질과 인격과 지식을 모두 반영했다. 우리는 결코 인간을 로봇과 같이 사용하지 않는다. 영감을 받아 인간이 글을 쓰고 작곡을 할 때 각자 개인의 개성과 기질과 음악적 역량에 따라 다른 영감을 받고 다른 작품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성경의 글을 쓰게 할 때에도 이와 같다. 결코 각자의 개성과 인격을 말살하고 로봇과 같이 작동하도록 하지 않는다. 심지어 각자의 기질에 따라 기억의 방식과 그것을 표현하는 어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하는 진리의 알맹이는 하나다. 그렇다고 하여 비평주의자들과 같이 알맹이를 캐내기 위해 난도질해야 할 정도의 문제는 성경 안에 전혀 없다. 즉 모든 것은 우리의 의도 안에 안배된 것이다. 각 저자의 기록의 차이도 알고 있는 전지한 우리 아래 성경은 완벽하게 기록되어 완전한 영감을 이룬 책이다. 심지어 저자들도 우리가 완벽하게 선택하여 그들의 어휘로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러니 성경 자체가 오류가 있는 인간들의 기록이라 그 속에서 나 예수의 가르침만을 따로 분류하여 추출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일 뿐이다. 또한 위와 같이 마태와 누가의 글이 상반된 기록처럼 보이는 것들도 사실 두 가지 모두를 내가 말한 것인데 그중 하나씩을 기억하는 경우도 있다. 요한의 말과 같이 나의 말과 행함을 모두 기록하려면 온 세상을 다 사용하여도 그 페이지가 모자란다. 그러니 각 저자의 기록에서 내가 말한 모든 내용을 찾아내려 하는 것도 어리석은 것이다.

마태는 구약을 많이 인용했다. 구약에 대한 지식이 있었던 것이다. 구약에서 겉옷에 관해 언급하는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Exodus 22:26-27 바른
26만약 네가 네 이웃의 옷을 저당잡거든 해가 지기 전에 그에게 돌려주어라. 27그것이 그가 덮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그의 몸을 가리기 위한 옷일 것이니, 그가 무엇을 덮고 자겠느냐? 나는 은혜로우니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을 것이다.

Deuteronomy 24:12-13 바른
12그 사람이 가난하면 그의 담보물을 잡아 둔 채 잠자리에 들어서는 안 되며, 13해가 질 때에 너는 그 담보물을 반드시 그에게 되돌려 주어라. 그래야만 그가 자기의 옷을 덮고 잘 것이며 너를 축복할 것이니, 그것이 여호와 네 하나님 앞에서 네게 의로움이 될 것이다.

Job 22:6 바른
6너는 까닭 없이 형제들의 저당물을 압류하고 그들의 옷을 벗겨 벌거숭이로 만들었으며

Ezekiel 18:7 바른
7누구도 억압하지 아니하며 채무자의 담보물을 되돌려 주고 강도질도 하지 않으며 굶주리는 자에게는 빵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는 옷을 입혀 주며

Amos 2:8 바른
8또한 그들이 모든 제단 옆에서 저당 잡힌 옷들 위에 누우며, 저희 하나님의 전에서 벌금으로 받은 포도주를 마셨다.

구약 히브리인들의 겉옷(심라)은 양털로 통으로 짠 직사각형의 통옷이다. 주로 둘러싸는 옷으로 어깨에 걸치고 다녔다. 양털을 꼰 실로 만든 울 옷이다. 그러나 그 형태가 옷이 아니라 직사각형이며 사람의 어깨에서 종아리 정도 길이의 두 배가 되는 직사각형을 반을 접어 어깨에 걸치는 옷이었다.

직사각형의 네 귀퉁이에는 청색 술을 달라고 성경에서 명했다.

Numbers 15:38 바른
38"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일러라. 그들이 자기의 옷자락에 그들과 그들의 후손 대대로 술을 만들어 달게 하고, 또 그 옷자락 술 위에 청색 끈을 달게 하여라.

이에 더하여 히브리인들은 술을 여덟 가닥의 실을 꼬아 만들었다. 그 실에 다섯 번의 매듭을 묶었다. 겉옷(치치트, צִיצִית, 숫자값 600)과 술의 숫자(8 가닥, 5 매듭)를 합하면 600+8+5=613으로 율법의 조항을 나타냈다.

이 술은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들다 보니 사람마다 그 간격과 모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술은 신분증으로 사용되었다. 유대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돈을 빌릴 때 차용증과 같은 토판에 자신의 술을 눌러 도장으로 찍었다고 한다. 각자 다른 모양의 술이 신분증이나 도장의 역할을 한 것이다.

술은 그 사람 자체를 상징하는 의미로 쓰였다. 술을 만지는 것은 그 사람 자체를 만지는 것과 동일한 의미였다. 다윗이 사울의 술을 벤 것(삼상 24: 4~11)도 혈루증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술)을 만진 것(마 9:20~21, 눅 6:56)도 모두 이런 맥락에서였다.

슬픔이나 참담함을 표현할 때도 겉옷을 찢었다. 이는 자신을 찢는다는 의미가 있었다. 자신이 찢겨지는 것과 같은 아픔을 느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울로 만든 겉옷은 깔고 앉는 용도로도 사용되었고 밤에는 반으로 접어 그 사이에 사람이 들어가 자기도 했다. 지금의 휴대용 침낭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사막의 추위를 견디는 든든한 비박용 장비였다. 목동들은 작은 텐트를 가지고 다니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겉옷을 침낭으로 사용하여 노숙을 했다. 양들이나 양몰이 개의 체온을 나누기도 했겠지만 가장 중요한 보온의 수단은 겉옷이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는 겉옷을 저당 잡아도 저녁이 되기 전에 돌려주라는 명령을 했다.

이런 구약의 맥락을 잘 아는 유대인 마태에게 겉옷의 중요성이 각인되었다. 그래서 내가 말한 내용 중에 겉옷을 구하는 자에게 속옷까지 내어주라는 부분을 기억하여 강조했다. 이는 개인이 미리 알고 있는 지식으로 인해 말의 중요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을 반영한 것이다.

겉옷으로 사용된 옷의 종류는 심라와 케수트, 그리고 메일, 에봇, 아데렛, 마드, 미크롤, 게롬, 히마티온, 에펜투테스, 신돈 등이 있다.

신약성경에 사용된 겉옷이라는 단어는 히마티온이다. 내가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사람들이 벗어서 길에 깔았던 옷도 히마티온이었다. 또한 그 옷을 나귀 위에 깔아 내가 탈 수 있게 했다. 히마티온이라는 단어는 원래 코이네 헬라어 즉 알렉산더 시절의 그리스어다. 단어 그대로의 히마티온은 히브리인들의 복장이 아니다. 그리스식의 이 복장은 몸길이의 3배가 되는 장방형(긴 직사각형)의 천이었다. 그리스의 의상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천을 어깨에 걸치고 있는 그 옷이다. 옷의 고정은 핀으로 하는데 앞이 트이는 옷이 아니라 긴 천으로 몸을 둘러 감는 형태다. 그렇다면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전통 의상을 버리고 헬라인들의 옷을 입었을까? 왜 신약 성경에서 이 헬라 복식을 뜻하는 헬라어를 사용했는지 그 이유를 알려면 신약 성경의 집필 과정을 알아야 한다. 현재 남아있는 신약 성경은 히브리어가 아닌 헬라어로 되어있다. 그런데 너희 대부분이 아는 것처럼 신약 성경의 저자들은 누가를 제외한 모두가 히브리인들이었다. 누가만 이방인이었다. 그 당시 유대에서 사용된 언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들은 유대인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히브리어는 이미 사어였다는 견해를 피력하는 자들이 있다. 또한 헬라어가 사용되었으며 일부는 라틴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당시 언어에 대한 여러 학설이 존재하지만 어느 학설에도 당시 유대에서 헬라어가 지배적 언어라는 견해는 없다. 어찌 되었건 당시 유대인들의 주 언어는 헬라어가 아니었다. 신약 성경은 당시 복음이 이방에 처음 전파된 지역인 로마 동부의 공용어로 집필되었다. 신약 성경이 집필된 시기에는 이미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편만하게 전해졌었기 때문이다. 유대에 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낸 서신들이 히브리어나 아람어로 남아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지역에 필요한 헬라어로 복음서와 서신서들이 집필되거나 번역되었다.

마태가 세리였다가 나 예수의 부름을 받은 것을 너희들은 알고 있다. 그는 나의 부름을 듣고 세리의 일을 버리고 그 즉시 나를 좇았다.

후에 마태는 히브리어로 복음을 전했고 처음에 그의 기록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이에 관한 역사적으로 마태의 시대와 근접한 기록들이 있다. 요한의 제자 폴리갑의 가르침을 받은 이레니우스(AD 130~202)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베드로와 바울이 로마에서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고 있는 동안, 마태는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그들의 방언으로 한 복음서를 출판했다."

오리겐(AD 185~254)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첫 번째 복음서는 한때 세리였으나 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가 되었던 마태에 의해 기록되었으며,
그 복음서는 유대교로부터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을 위해 기록되었고 히브리어로 출판되었다."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4c 초)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마태는 처음에는 히브리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막 다른 사람들에게 가려고 할 때, 모국어로 복음서를 기록하여 보냈다."

폴리갑의 동료인 파피아스는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의 책은 소실되었으나 그중 일부가 인용되어 살아남았다.

"마태가 신탁들을 히브리어로 편집했고, 각자가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그것들을 번역하였다."

이러한 기록을 보면 히브리어로 된 기록들이 어떻게 헬라어로 번역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히브리어로 되었던 겉옷과 속옷이란 표현이 그와 가장 비슷한 형태를 가진 그리스의 명칭으로 번역되었다. 아마 히미티온으로 번역된 원래 히브리어 단어는 심라나 케수트였을 것이다. 케수트는 정방형인 것에 비해 심라는 장방형이다. 그 형태까지 비교하여 가장 유사한 옷은 몸길이의 두 배가 넘는 심라일 것으로 추측된다.

속옷의 종류는 케토넷, 린넨으로 만든 사딘, 미크낫 바드, 키톤 등이 있다.

여기 나오는 명칭들 중에서 키톤은 사실 그리스의 옷 명칭이다. 키톤은 페플로스(peplos), 도릭키톤(Doric chiton), 이오닉키톤(Ionic chiton) 등이 있었으며 도릭키톤과 이오닉키톤은 그 지역적 특성을 유지하면서 길이가 더 짧거나 활동성을 위해 형태를 변형하기도 했다. 키톤은 기본적으로 넓은 천을 몸에 샤워 타월을 두르듯 둘러서 그리스식 블러치인 피블러스로 어깨나 팔을 고정해서 입는 옷이다. 사실 히브리인들의 속옷(케토네트)과 같이 겉에 두르는 겉옷 즉 코트의 안에 입는 옷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형태와 입는 방식등이 차이가 많다.

히브리인들의 속옷인 케토네트는 앞뒤 판의 옷감 양 옆을 바느질하여 만든 형태로 판초우의를 입고 양 옆의 똑딱이 단추를 채운 형태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판초우의에 비해 몸통과 팔이 함께 들어가는 형태가 아니라 몸통 크기에 맞추어 좁게 만든 통옷이었다. 보통 성경에서 속옷이라는 단어를 보면 바로 떠올리는 것이 현대의 속옷 즉 이너웨어를 떠올리는데 히브리나 헬라식의 속옷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너희 시대의 형태로 설명하면 당시의 속옷은 와이셔츠나 바지(팬츠)고 겉옷은 정장의 윗옷이나 코트에 해당한다. 내가 십자가에 달리기 전 입었던 옷은 케토네트 중에서도 양털이나 다른 식물성 섬유를 사용하여 통으로 직조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이 내 옷을 찢어서 나누지 못했다. 일반적인 케토네트(속옷)은 앞판과 뒤판의 옷감 두장을 바느질하여 연결하는데 통으로 짠 케토네트도 있다. 현대에도 울로 된 옷을 뜨개질할 때 통으로 옷을 뜨는 경우들이 있다. 이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이었었지만 반면 누가는 이방인 의사였다. 구약의 율법보다는 의술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그의 고향은 시리아 안디옥이다. 바로 바나바와 바울이 이방인 전도를 위해 파송된 안디옥 교회가 있는 곳이 시리아 안디옥이다. 이 지역에서 누가가 바울의 사역에 동참한 것은 우리(하나님)의 섭리였으며 그를 통해 사도행전이 기록된 것 또한 우리의 섭리였다. 누가복음을 통해 파악되는 그의 면모는 관찰력이다. 일상의 시간 순서와 사건들의 흐름을 잘 파악하는 성향이었다(눅 1:1~4). 이렇게 신중한 자들은 말을 함에 있어 그 강조점을 앞에 두지 않고 뒤에 둔다. 더 중요한 것을 뒤에 말하는 것이다. 말하는 중에도 생각을 하여 그 결과를 마지막에 종합하여 말한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겉옷을 뒤에 두었다. 즉 속옷을 구하는 자에게 오히려 그것보다 더 필수적인 겉옷까지 내어주라고 한 것이다.

또 어떤 경우에는 겉옷이 양모로 된 울이 아니라 얇은 린넨으로 된 경우들도 있었다. 이는 대부분 귀족들이나 부유한 자들이 사용하던 것이었다. 뜨거운 사막과 광야의 기후를 이길 수 있는 옷이었다. 이집트와 같은 뜨거운 사막 기후는 아니지만 이스라엘도 사막 지역은 겨울에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는 30도가 넘어가기도 한다. 물론 동일한 이스라엘에서도 평야와 숲이 우거진 지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귀족들의 경우에는 호화로운 집에 살면서 고품질의 이집트산 린넨을 걸치는 경우들이 많았다. 이스라엘 안에서도 린넨을 자체 제배하였는데 린시드 오일을 추출할 목적과 함께 옷감의 제조도 함께 이루어졌다. 유명한 지역이 여리고였다. 여리고 산 린넨은 이스라엘 안에서 최고의 품질을 자랑했다. 물론 가난한 자들도 여름의 더위를 견디기 위해 품질은 떨어져도 린넨을 재배하여 집에서 린넨을 직조하여 옷을 만들어 입었다. 한국의 과거를 생각하면 가난한 자들도 삼이나 대마, 아마(린넨)로 된 옷을 만들어 입었던 것과 같다.

이런 겉옷과 속옷의 재질 변화는 이스라엘의 주거문화의 변화에 기인한다. 원래 히브리인들의 조상들은 모두 텐트에 거주하며 유목을 했다. 그러다 가나안 정복 이후에는 정착하여 집을 가진 상태에서 가족의 일부나 전부가 정해진 시기에는 유목을 하고 매서운 추위가 몰아치면 정착지의 따뜻한 집을 찾는 반농반목을 하였다. 물론 집에 있는 동안에는 집과 함께 있는 경작지에서 밀이나 다른 작물들을 재배했다. 또한 부유한 자들은 직접 유목을 하지 않고 품군들을 고용했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편안한 대저택에 거주하며 하루종일 음악과 풍류를 즐기며 낮부터 술을 마시는 방탕한 삶을 살기도 했다. 이를 책망한 선지자들의 기록들을 종종 볼 수 있다. 또한 이스라엘 모든 자들도 토지를 분배받아 정착을 했다. 이런 삶의 형태의 변화는 의복의 변화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래서 구약의 율법이 만들어졌던 모세의 시절과 같이 광야를 배경으로 한 옷들과는 다른 형태의 옷들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구태여 신약에서 겉옷과 속옷을 볼 때에 노숙하는 목동들이 밤의 추위를 견디기 위한 겉옷의 역할만을 강조하는 것은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내가 갔을 시기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밤에 노숙을 하지 않고 집 안에서 편안한 잠을 잤다. 그들에게는 여름에 무겁고 더운 겉옷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관점에서는 속옷과 겉옷을 빼앗으려는 자의 약탈 순서가 중요하지는 않다. 어차피 다 그냥 옷이다. 특히 이스라엘에서 성장하지 않은 누가에게는 특히나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그가 살고 사역했던 지역의 문화와 이스라엘의 문화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소아시아 안디옥을 시작으로 지금의 터키와 마케도니아 그리고 그리스를 지나 로마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경험한 복식문화는 마태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마태의 주된 복음 전도지역은 이스라엘이었던 것 같다. 물론 마태복음이 히브리어에서 헬라어로 번역된 것을 보면 마태도 후에는 코이네 헬라어권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와 누가는 그 삶의 배경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또한 글을 처음 쓸 때에 염두에 둔 독자들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이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이스라엘 지역에서 기록했다. 처음 기록한 언어도 히브리어였다. 그 기록을 처음 읽을 자들도 히브리인들이었다.

누가는 아가야(현대의 그리스 지역)에서 누가복음을 기록했다. 당연히 처음 쓸 때부터 헬라어로 글을 썼다. 그리고 그 글을 읽는 첫 독자도 데오빌로라는 그리스인 귀족과 다른 그리스인들이었다.

이런 조건들로 인해 서로 기록의 상이함이 있었지만 그들이 기록한 글은 둘 다 역사적 정확한 사실을 말한 영감 된 완벽한 성경이다. 또한 서로의 기록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며 읽는 독자들에게도 지역적 차이를 극복하고 여러 다양한 성경의 면모를 보게 하는 시각을 열어준다.

모세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글과 엘리야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글이 다르다. 진리가 변한 것이 아니라 전함을 받는 자들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달라진 것이다. 그들에게 맞게 잘 변형하여 전달하는 것이 오류는 아니다. 마태와 누가의 기록의 상이함도 이런 변형이라 보아야 한다.

지금도 너희는 4 개의 복음서의 기록들을 비교하는 연구들을 많이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더 깊은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영감의 원천에서부터 나온 샘물들이다.

그러니 성급하게 역사비평이나 본문비평, 문학비평의 속임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를 바란다. 저것들은 악마의 쏘는 화전일 뿐이다.

질문 3: 디스 or 사랑?

질문 1에 대한 답을 나(예수님)는 아직 제시하지 않았다. 답을 제시하기 전에 내가 질문 2에 대해 먼저 살펴본 의도는 질문 1에 대한 답을 너희가 쉽게 이해하게 하려 함이다.

질문 1의 핵심은 과연 내가 명한 것이 도적과 사기군들에게 바보처럼 모든 것을 빼앗기라는 것인가?이다. 물론 내가 말한 의도는 결코 바보가 되라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실제 행동으로 무조건 어떤 상황에서도 약탈과 도적질을 당할 때 더 많이 두 배로 당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역사비평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손등으로 뺨을 때리는 행위가 모독에 해당하므로 왼뺨을 돌려대어 상대가 나를 모독하였음을 상기시키거나 모독의 죄를 묻는 함정을 파는 것이겠는가? 또한 속옷을 빼앗으려는 자에게 겉옷까지 내어주어 벌거숭이가 됨으로 율법의 적용을 받아 옷을 모두 다시 돌려받으라는 것인가? 또 로마 군인들이 강제로 1마일을 가게 하면 그 이상인 2마일을 가  1마일 이상을 강제동원한 죄로 로마 군인을 정죄하라는 것인가? 과연 내가 전한 것이 역사비평주의자들의 해석과 같이 해학적 디스전을 펼치라는 것인가?

결코 아니다 문맥을 무시하는 저들의 해석은 나의 말을 멸시하는 것이며 결코 나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한 노력들이 아니다. 단지 자신들의 알량한 지식을 자랑하려 했던 저들의 선진과 같이 여전히 자랑질에 바쁘기만 한 것이다. 신박한 해석을 내어놓았다는 자부심에 자신의 목을 곧게 하는 교만의 행위일 뿐이다.

나는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라고 한 것이다. 구약의 율법대로 자신에게 도적질과 폭행, 소송으로 손해를 입힌 자들에게 똑같이 갚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악함을 인해 어쩔 수 없이 모세의 법에 허용한 것이다. 그렇게 똑같이 갚는 것이 법이라면 너희 중 누가 우리(하나님) 앞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너희 죄대로라면 너희 중 누가 우리의 앞에 설 수 있는가? 그래서 사랑하라는 것이다. 원수의 악함대로 갚지 말고 그에게 베풀고 그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으로 상대를 대하여 그에게 우리(하나님)와 너희 안에 있는 우리의 사랑을 전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언급한 것이 꾸고자 하는 자에게 후히 주라는 것이다. 사정이 급하고 안타까운 상황의 사람에게 사랑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그가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고 하여 그가 한대로 아무것도 주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후히 주라는 것이다. 결국 사랑하라는 것이다. 상대들을 디스하고 비웃으며 꾀로 상대의 허점을 파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하되 상대가 피해를 입힌 것만큼 배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배상받을 만큼 오히려 주라는 것이다. 오리를 강제로 가게 했다면 상대도 강제로 오리를 내가 시키는 대로 와야 한다. 그것이 구약의 율법이다. 그런데 오히려 내가 배상받을 만큼 상대에게 베풀어 오리를 더 가주라는 것이다. 한쪽 뺨을 맞았으며 그대로 되갚아야 하는데 그 반대로 내가 배상받을 것(다른 한 뺨)을 상대에게 내어주라는 것이다. 속옷을 빼앗은 자에게 속옷을 돌려받아야 하나 오리려 내가 배상(복수) 받을 만큼 옷을 더 내어주라는 것이다. 구약의 율법을 뛰어넘는 엄청난 사랑을 요구하는데 그것이 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내어줌인 것이다. 이런 기본적인 논리와 문학 기법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역사성과 문학성 그리고 논리성을 논한다는 것이 어리석을 뿐이다. 또 그 해석을 좋게 여겨 따르는 너희도 그들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을 뿐이다. 역사비평적 해석의 핵심은 사랑이 아닌 복수다. 결코 나의 의도와 뜻을 같이 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무거운 짐을 벗겨주려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너희를 죄로 이끄는 무서운 사탄의 화전이다.

나의 이러한 의도를 정확하게 행한 것은 유명한 레미제라블의 신부다. 성당의 재물을 도적질 한 자에게 그것을 빼앗고 벌을 준 것이 아니라 그 죄의 벌을 면하고 그 성당 보물들을 내어 준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그렇게 하여 장발장은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었다. 너희는 가난한 장발장이 빵을 훔쳤다 하여 그를 정죄하고 감옥에 보낼 것이 아니라 신부와 같이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지금 내가 마 5:38~42의 현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의도다.

01.3.2.3.10.9.5.5.5.4. 불가능의 계명

그런데 이 새 계명(항복조항)을 듣는 유대인들은 경악했다.

"사랑이란 바보 천치가 되라는 말이구나. 빼앗기는 것도 모자라 빼앗긴 것을 찾지도 말고 오히려 빼앗긴 만큼 더 내어주라니"

현대의 너희는 이 불가능을 지킬 수 있는가? 모두 내어주는 사랑을 할 수 있는가? 너희 이익에 목마른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와 모든 체제들[^1]의 개들아, 행악자들아, 너희는 어찌할 것인가? 경쟁하여 상대를 도태시키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너희 수전노들아, 너희는 어찌할 것인가? 과연 너희는 이 나의 마지막 질문에 답을 할 수 있는가? 너희는 천국의 초청에 응할 것인가? 아니 너희는 천국에 들어올 수나 있겠는가?




[^1]: 인간은 이기적인 죄성을 타고 난다. 모든 체제는 공익을 위한 것이고 타인의 권리를 보장한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자본주의는 있는 자들(부루주아)의 이기적 욕심을 추구한다. 사회주의는 없는 자들(프롤레타리아)들의 이기적 욕심을 추구한다. 그리고  여타의 모든 제도들도 마찬가지다. 심지어 아나키스트들도 아나키즘을 주장하는 이유가 자신이 착취당하지 않기 위함이다. 모두들  의무와 사랑과 헌신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세상에는 아무리 탁월한 제도를 마련해 주어도 그 결과는 항상 이기적인 도둑놈의 제도로  변질된다. 인간의 본성이 도둑질하고 빼앗고 결국 상대의 모든 것을 빼앗아 목숨까지 취하는 악마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너희  본성으로 노력하여 천국에 들어온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그러므로 너희 노력을 버리고 오직 거듭나게 하는 하늘의 능력을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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