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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Nov 09.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11

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01.3.2.3.10.9.5.5.6. 이웃 사랑과 원수 사랑의 간극


Matthew 5:43-47 개정
43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여호수아서를  기술하면서 여호수아가 구약의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에 전쟁이 그침으로 안식을 준 내용을 살펴보고 있다. 이와 함께 누가  가나안에 들어가는가에 대한 기준을 다루면서 신약에 내(예수님)가 말한 산상수훈의 항복조항들과 비교하여 그 뜻을 밝히고 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의 왕으로 온 나에게 나온 자들에게 하늘의 나라에 들어오려는 자들은 어떤 의를 가져야 하는가를  선포하고 있다. 바로 투항의 조건을 나열하고 있다.

01.3.2.3.10.9.5.5.6.1. 원수와 박해자 사랑 

구약은 네 원수를 미워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를 죽인 자를 미워하는 것도 당연하다. 자식을 욕보인 자를 미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전도연이  출연한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자식을 죽인 살인범이 교도소에서 기독교를 믿었다고 모두 용서받았다는 말을 하는데 그 순간 전도연은  분노에 사로잡힌다. 어떻게 내 자식을 죽인 자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말일가? 물론 극 중의 살인범은 전도연에게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다. 그런데도 그가 용서받았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그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그가 온전한  용서조차 빌지 않는데 그대로 그를 사랑하라는 말인가? 극 중 전도연은 다음과 같은 절규를 한다.

"어떻게 용서를 해요? 용서하고 싶어도 난 할 수가 없어요. 그 인간은 이미 용서를 받았다는데… 그래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는데…" 

"내가 그 인간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그 인간을 먼저 용서할 수 있어요?"

손양원  목사의 아들 둘은 1949년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사상이 다른 무리들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가운데 좌익계열의 학생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손 목사의 아들들은 우익단체에 속해있었다. 기독교인들이 우익단체에 속한 경우들이 많아 우익단체와 기독교에 동시에 속해있던  손목사의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은 죽임을 당했다. 제주도에서는 좌익계열들도 그리고 무고한 시민들도 빨갱이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고  여수순천에서는 제주도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는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 중에는 남로당 계통의 좌익세력도 있고  김구계열의 사람들도 있었는데 모두 반이승만파로 몰려 군에서 퇴출될 위기에 몰려있었다. 이런 정치적 문제들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에서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사상이 무엇이기에 기독교인들인 영락교회의 청년회가 주축을 이룬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야 했으며 또 무고한 전라도의 손목사의 두 아들이 좌익 학생들에게 학살을 당해야 했겠는가? 

아들들의  관 앞에서 통곡을 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을 죽인 아이를 살려 그를 아들로 삼았다면 그가 진정으로 원수를 사랑한 자인가? 과연  아들들의 관 앞에서 원수를 아들 삼은 그는 정상적인 인간이었을까? 그의 심경은 어떠했겠는가? 진정으로 그 원수를 볼 때에 자신의 두  아들이 떠오르지 않았겠는가? 그도 사람이었다. 나환자들의 일그러지고 고름이 가득 찬 몸을 보면 뒷걸음이 쳐지는 인간이었다.  원수를 양아들로 삼고도 다시 돌아서 자신의 아들들의 관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인간이었다. 나환자들 앞에서도 그리고 원수의 앞에서도  그는 며칠을 기도했다. 그리고 결정하여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켰다. 원수를 사형의 위기에서 건졌다. 목숨을 건진 원수는 잘못을 뉘우쳤다. 

손양원은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신사참배거부로 옥고를 겪었다. 이처럼 주기철 목사도 옥중순교를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 문제로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을 때에 주기철 목사가 자신은 신사참배를 하지 않을 자신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아내가 일본  형사들에게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강간까지 당하는 것을 목격하고서도 돌이키지 않았다. 그는 신앙을 지키다 결국 감옥에서 순교했다.  원래 인간이란 나약하다. 그러나 그 인간이 나의 사랑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을 이긴다. 자신도 뒤돌아 보면 그것을 어떻게 이겼는지 알  수 없지만  내 안에서 넉넉히 이긴다. 그러나 과연 누가 그에게 '당신은 넉넉히 이길 수 있소. 그러니 감내하시오'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핍박을 당하는 것이든 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든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가 감히 두  아들을 잃은 아버지에게 그 아들을 죽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아내를 강간한 강간범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누가 이 의의 기준선을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올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너희는 의문이 들지 않는가? 지금까지 의문이 없었다면 아마 그 통과기준을 알지 못해서일 것이다. 사실  기준을 알고 나면 인간 중에는 그 기준을 통과할 자가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아무리 뛰어나도 이 기준은  통과하지 못한다. 누가 원수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능력이 임하기를 기다려야 한다.


01.3.2.3.10.9.5.5.6.2. 원수를 미워하는 것과 원수와 화해하는 것


복음서에  따라 비슷한 사건을 다르게 배치하는 경우들이 있다. 어떤 경우는 저자들이 시간과 상관없이 의도적으로 동일한 사건을 다른 순서로  배치한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말하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사건을 배치한 것이다. 어떤 경우는 복음서 간에  비슷하게 보이는 사건이 한 사건이 아니라 아예 다른 사건인 경우도 있다. 내가 비슷한 말을 여러 다른 장소에서 반복하여  사용하기도 했고 비슷한 기적을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행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생이 시간순서대로 다 기록되었다면 위와  같이 비슷한 사건이나 동일한 사건에 대한 혼동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의 전 생을 기록한 기록이나 영상은 없다. 성경이 그러한 것  같지만 사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누군가의 전생을 전기로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신약 성경에 기록된 4 복음서조차 전기형식이  아니다. 물론 나의 인생을 기록한 것은 맞지만 그 편집과 구성과 선택되어 기록된 사건들이 사실 나의 전기 기록을 위한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구원을 설명하기 위해 기록된 것이다. 성경의 기록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너희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John 20:30-31 바른
30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적들도 제자들 앞에서 행하셨다. 31오직 이것들을 기록하는 것은 너희들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려는 것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분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원수  사랑에 관한 구절들과 비슷한 내용들이 사복음서의 여러 곳에 등장한다. 여러 글들을 서로 비교하여 살펴 그 내용들이 어떤 연관이  있는지 또는 그 연관성으로 서로의 뜻을 명확히 할 수 있는지 아니면 상관이 없는 본문으로 결론 내려야 하는지 살펴보자.

산상수훈  중 지금 언급하는 마 5:43-47보다 앞에 나오는 마 5:23~26을 살펴보자. 이 구절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화해하라고 한다. 물론 내가 형제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가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단지 형제가 나를 고소할 것에 대해 말한다. 이는  형제가 나에 대해 원한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다. 즉 내가 잘못하여 상대가 나를 고소하거나 상대가 나에 대해 미움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그러므로 이것을 내가 나의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관련된 본문으로 사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정말 그러한가, 한번 본문을  직접 살펴보라.

Matthew 5:23-26 바른

23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네 예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네 형제가 네게 원한을 품고 있다는 것이 생각나거든,

24네 예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와 화해하고 그 후에 돌아와서 네 예물을 드려라.

25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네가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빨리 화해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 고소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겨주고 그 재판관은 교도관에게 내주어 결국 네가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다.

26내가 진정으로 네게 말하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마 5:23~26)과 비슷한 구절이 눅 12:57~59절에도 있다. 그런데 문맥이 전혀 다르다. 용서나 화해와 관련된 문맥이 아니다. 먼저 본문을 읽어보자.

Luke 12:57-59 바른

57"왜 너희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58네가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에 너는 길에서 그와 화해하기를 힘써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그 재판관이 너를 교도관에게 넘겨주고, 그 교도관이 너를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59내가 네게 말하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마  5:23~26과 이 본문은 동일한 내용 같아 보이나 그 내용이 다르다. 똑같은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그 문맥적 쓰임새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한다. 마 5:23~26은 앞에 살펴본 대로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 부가적으로 형제도 나를  미워하지 않게 하도록 할 의무에 대해 말하면서 사용되었다. 마 5:23~26은 최소한 나의 원수에 대한 구절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상대에게 잘못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내가 용서를 구해야 할 입장이다. 어찌 되었건 마 5:23~26은 용서나 화해와 관련한  구절이 맞다.

그런데 눅 12:57-59은 전후의 문맥이 마 5:23~26과는 전혀 다르다. 눅 12:57-59은 용서나 화해나 미움에 대한 문맥에서 사용되지 않았다. 

그 문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눅 11장을 살펴보자. 

눅 11:1~13은 기도와 관련한 내용이다. 그런데  그 내용이 산상수훈에 언급된 것과 같지만 그 장소가 산상수훈 산이 아니다. 너희들이 주기도문이라고 부르는 것과 구하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라고 하는 기도에 관한 것이 나온다. 결국 성령을 구하라고 한다. 이를 보면 너희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동일한 내용들을 반복하여 말하였다. 기록한 사람이 기록한 시점과 문맥에 따라 그 내용은 전혀 다른 뜻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이 본문과 같이 그 뜻이 크게 변하지는 않는다.

눅 11:14~26은 내가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축사했다고 비판하는 자들에 대한 답변들이다. 

눅 11:27~28에서는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복이 있다라고 말했다.

눅 11:29~32에서는 믿기 싫어하는 악한 세대가 구하는 표징과 내가 보일 요나의 표징에 관해 말했다.

눅 11: 33~36은 몸의 등불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도  마태복음과는 다르게 등불에 관한 것과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것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마태복음은 등불에 관한 것(마 5:15)과  몸의 등불(마 6:22) 사이에 많은 다른 내용들이 있다. 따로 떨어진 둘을 하나로 이어 말하면 그 문장의 뜻이 차이가 날 수도  있다. 마 5:15에서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고 말했을 때는 세상이 등불과 같이 타인에게 비추이는 등불이 되라는 의미다. 그런데  눅 11:33에서 등불을 등경 위에 둔다는 말은 눈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과 같이 몸의 등불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는 보는  눈이 있어야 자신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보는 눈을 말하면서 눈이 등불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 자신의 눈의 기능을  강조한 것이 아니다. 빛인 나 예수가 있어야 그 빛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도 같은  등불을 등경 위에 둠을 말했음에도 문맥에 따라 그 문장의 의미가 달라진다. 

눅 11:37~54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말했다.

"너희  행동으로는 율법을 지키지만 너희 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38~41). 너희 바리새파는 미가 선지자 시대의 거짓신앙인들과  같이 천천의 수양과 같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공의를 행하지 않고 사랑도 행하지 않고 겸손히  우리(하나님)와 동행하지 않는다(41).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심판(화)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교)회당에서 높은 직분  받기를 좋아하고, 세상에서 높임 받기 좋아한다. 너희에게 저주(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평평하게 숨겨진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엇인지도 모르고 너희 위를 걸어 다닌다. (너희에게 배우고 (교)회당에서 너희에게 복종하는 자들은 너희 속에는 썩은 죽음  외에는 없다는 것을 모른다.)"

율법학자 중 하나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지금 우리를 모욕하신 겁니다."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설교를 하고 사람들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치지만 너희 스스로는 그 설교대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생각조차 없다." 

"너희에게  심판(화)이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다. 결국 너희가 증인이 되어 너희 조상들의  행위를 인정하고 있으니, 그들은 그 선지자들을 죽였고 너희들은 그들의 무덤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너희여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너희는 너희 조상들이 죽인 주기철과 손양원을 기리고 양화진에 묻힌 자들의 이야기를 말하기  좋아한다. 그러나 너희 조상들은 신사참배자들이다. 너희는 지금 주기철과 손양원을 기리지만 너희 행위는 너희 조상들처럼 세상에게  절하며 온갖 우상의 제물을 탐하는구나. 너희는 탐욕이 우상숭배인 것을 알지 못하는가? 역시 너희는 신사참배자들의 뾰족 지붕집에서 난  가라지들이구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도 말씀하셨다. '내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들이 그  가운데 몇몇을 죽이고 또한 박해할 것이다.' 세상의 창조 이래로 흘린 모든 선지자들의 피를 이 세대가 책임져야 할 것이니,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소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가 그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너희 율법학자들에게 화가 있다.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자들도  가로막았다." 

내가 거기에서 나올 때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맹렬히 대적하여 여러 가지를 따져 묻기 시작했고 내 입에서 나오는 것에서 트집을 잡기 위해 노리고 있었다. 

눅 12:1~3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경계

이런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 수만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몰려들어 서로 밟힐 지경이 되었는데 나는 내 제자들에게 먼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너희는  스스로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가려져 있는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진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으니,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이 모두 밝은 곳에서 들려질 것이며,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말한 것이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눅 12:4~7 위의 대적들이 죽이려 해도 두려워 말라.

"내가 나의 친구들인  너희에게 말한다. 몸은 죽여도 그 후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보여 줄 것이니, 죽인 뒤에 지옥에 던져 넣을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으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것들 중 하나라도 하나님 앞에는 잊혀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시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

눅 12:8~12 순교의 자리에 서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누구든지 인자를 거역하여 말하는 자는 그에게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들과 통치자들과 권세들 앞으로 끌고 갈 때에 어떻게  무엇을 변론하며 또 무엇을 말할지 걱정하지 마라. 성령께서 바로 그 시간에 마땅히 말해야 할 것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다."

Luke 12:13-21 땅이 아닌 하늘의 유산을 상속하라
무리 가운데서 어떤 이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 제 형제에게 유산을 저와 나누라고 말씀하소서."

내가 말했다.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 재판관이나 분배인으로 세웠느냐?"

"너희는 조심하여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 사람의 생명이 그가 가진 소유의 풍성함에 달려 있지 않다."

또 내가 그들에게 비유를 말했다. 

"어떤  부유한 사람의 밭이 풍성한 수확을 내었다. 그가 속으로 생각하며 말하기를 '내 곡식을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떻게 할까?'  하며, 그가 말하였다. '이렇게 해야겠다. 내가 내 곳간들을 헐어 버리고 더 큰 것들을 지어 거기에 내 모든 곡식과 물건들을 쌓아  놓아야겠다. 그리고 내 영혼에게 말하기를 영혼아, 네가 여러 해 동안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놓았으니, 너는 쉬고 먹고 마시고  즐겨라.'라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야, 이 밤에 내가 네 영혼을 네게서 도로 찾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예비한 것들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면서도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다."


Luke 12:22-34 하늘의 것을 구하라-모든 것, 목숨까지 버려서라도 천국을 사라

내가 제자들에게 말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다. 까마귀들을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또한 그것들에게는 창고도 없고 곳간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하물며 너희는 새들보다 훨씬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자라도 늘일 수 있느냐? 이처럼 너희가 아주 작은 것도 할 수 없으면서 왜 다른 것들에 대해 걱정하느냐?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생각해 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 않으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솔로몬이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들 중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신다면,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니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구하지 말고 또 염려하지도 마라. 이 모든  것들은 세상 사람들이 찾는 것들이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오히려 너희는 그분의 나라를  찾아라. 그러면 이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적은 무리여,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하신다. 너희 소유들을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않는 전대를 만들어라. 이것은 하늘에 있어 없어지지 않는 보물이니, 그곳에는  도둑도 가까이하지 못하고 좀도 먹지 못한다. 너희 보화가 있는 그곳에 너희 마음도 있을 것이다."


Luke 12:35-48 순교의 자리, 인생 마지막이 오리니 언제나 깨어 나 예수를 기다리라[^1]
"너희의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밝히고 있어라. 너희는 마치 자기 주인이 결혼 잔치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되어라. 그 주인이 와서 종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그 주인이 허리를 동이고, 그들을 식탁에 앉히고, 곁으로 와서 그들을 시중들 것이다. 그가 제이경에나 제삼경에 오더라도 그들이  이와 같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은 복이 있다. 너희는 이것을 명심하여라. 집주인이 어느 시점에 도둑이 올 줄 알았다면, 자기  집이 뚫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했다.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이들에게 하시는 것입니까?"

내가 말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도록 주인이 그 종들 위에 세울 신실하고 지혜로운 청지기가 과연 누구겠느냐? 그의 주인이 와서 이렇게  행하고 있는 것을 본다면 그 종은 복이 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주인이 자기 모든 소유를 그에게 맡길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종이 자기 마음에 '내 주인이 늦게 올 것이다.'라고 말하며, 남종들과 여종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그가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주인이 와서 그를 심하게 때리고 신실하지 못한 자들이 받는 벌을 내릴 것이다.  자기 주인의 뜻을 알고도 준비하지 않거나 그의 뜻대로 행하지 않은 그 종은 많이 맞을 것이나, 알지 못하고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고, 많이 맡은 자에게는 더 요구할 것이다."


Luke 12:49-53 가족이 너희를 순교의 자리로 팔 것이다.

"나는  땅에 불을 던지러 왔다. 그 불이 이미 붙었다면 내가 무엇을 바라겠느냐? 그러나 내가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일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얼마나 답답하겠느냐? 너희는 내가 땅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아니다.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 이제부터 한 집에서 다섯 식구가 갈라져서, 셋이 둘에 대항하고 둘이 셋에 대항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에  대항하고 아들이 아버지에 대항하여 갈라서고, 어머니가 딸에 대항하고 딸이 어머니에 대항하며, 시어머니가 며느리에 대항하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에 대항하여 갈라설 것이다."


Luke 12:54-56 하늘의 뜻을 읽고 판단하라.-천기를 분별하듯 대적들이나 나를 따르는 무리들이 분별하라고 했다.

또 예수께서 무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구름이 서쪽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에는 '소나기가 오겠구나.'라고 말하는데, 그대로 된다.

55또 남풍이 불 때에는 '무척 덥겠구나.'라고 말하는데, 그대로 된다.

56위선자들아, 너희가 땅과 하늘의 현상은 분별할 줄 알면서 어찌하여 이 시대는 분별할 줄 모르느냐?"


Luke 12:57-59 분별력 있게 항복하라.

"왜 너희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에 너는 길에서 그와 화해하기를 힘써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그 재판관이 너를 교도관에게 넘겨주고, 그 교도관이 너를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하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눅 12: 57~59 앞의 문맥에 관해 길게 살펴보았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귀신을 내어쫒는데 그것을 보고 나를 대적하는 유대들이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은 것이라 욕했다. 그래서  나는 눈을 뜨고 바로 보라고 했다(눅 11:33~36; 눈, 몸의 등불). 또 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의 속에  무엇이 있는지 말해주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나를 죽이기 위해 벼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제자들에게 그들의 정체를 알려주었고 이 땅에서의 평안과 행복과 부를 구하지 말고 그들이 핍박하더라도 순교의  자리에 나가라고 격려했다. 심지어 내 제자들의 믿지 않는 가족들이 그들을 순교의 자리로 내몰 것이라고도 했다."

이 요약한 내용의 뒤에 눅 12: 57~59이 붙어있다.

Luke 12:57-59 분별력 있게 항복하라.

"왜 너희는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에 너는 길에서 그와 화해하기를 힘써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그 재판관이 너를 교도관에게 넘겨주고, 그 교도관이 너를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하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 위의 말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이 말은 그때까지 듣고 있던 나를 대적하는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천기를 분별하여 알듯이 내가 심판하러 오기 전에 깨달아 알고 나에게 알아서 항복하라"라고 한 것이다. 

마  5:23~26은 바로 위의 눅 12: 57~59의 쓰임새와는 다르게 화해를 촉구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문장 "네가 너를  고소하는 자와 함께 행정관에게 갈 때에 너는 길에서 그와 화해하기를 힘써라. 그렇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서, 그  재판관이 너를 교도관에게 넘겨주고, 그 교도관이 너를 감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내가 네게 말하니, 네가 마지막 한 푼까지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가 뜻하는 것이 글의 문맥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John 5:39-47 바른 
"너희가  성경을 자세히 살피니, 이는 그 안에 영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않으나, 너희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알고 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는데,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이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가  그는 영접할 것이다.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바라는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니, 그가 나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그의 글도 믿지 않으니, 어떻게 내 말들을 믿겠느냐?"

마  5:23~26에 대한 해석을 위의 글(요 5:39-47)과 관련하여 해석함으로 고소하는 친구를 모세 즉 모세오경에 기록된  율법이라 생각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마 5:23~26의 화자는 형제에게 고소를 당할 잘못이 있는 자다. 그는 형제에게 빚을  갚거나 잘못에 대한 배상을 해야 하는 자다. 그리고 그를 고소하는 자는 형제다.  마 5:23~26의 바로 앞에는 형제를 용서해야  할 것을 말한다. 그리고 더 앞과 뒤에도 모두 용서와 사랑에 관한 내용이 언급된다. 마 5장은 팔복을 제외한 모든 것이 형제  사랑과 관련한 새 계명이다. 팔복 이후의 5장은 대인 계명이다. 즉 형제 사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6장 이후와 7장 거의  대부분은 대신 계명이다. 바로 하나님 사랑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문맥으로 보았을 때 요 5:39-47과  마 5:23~26을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은 문맥을 벗어난 해석이다.  마 5:23~26은 형제와 형제의 관계에서의 고소에 관한 것이다. 요  5:39-47은 나 예수나 하나님이 믿지 않고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고소하여 심판하는 것에 관한 내용이다. 나 예수나 하나님이  고소하지 않는다면 율법 즉 그들이 존경하는 모세 오경의 율법이 그들을 고소할 것이라는 말이다. 둘은 하나( 마 5:23~26)는  대인관계요 하나(요 5:39-47)는 대신관계에 관한 본문이다. 그러므로 둘을 같이 놓고 해석하는 것은 대신 관계와 대인 관계를  혼동시키는 것이다.


마 5:23~26의 뜻을 밝히기 위해 마태가 마태복음 뒷부분에 언급된 마 18:23-35을  사용하려는 자들도 있다. 그러나 복음서 각 저자들의 글도 또 각자가 기록한 복음서 자체 안의 동일해 보이는 글들도 모두 문맥에  따라 해석되어야 한다. 동일한 문구라 하여 항상 동일한 뜻이 아니다. Matthew 18:23-35은 우리가 용서해 준 자에 대한  이야기다. 즉 신인 우리가 용서해 준 자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가 용서해 준 자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마 5:23~26은 자신이 형제에게 용서를 받아야 할 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 그 둘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것이다. 자 과연 그러한가?, Matthew 18:23-35을 한번 읽어보라.


Matthew 18:23-35 바른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결산을 하려는 어떤 왕과 같다. 그가 결산을 시작할 때에 만 달란트를 빚진 한 종이 그에게 끌려왔으나,  그가 갚을 것이 없으므로, 주인이 그 자신과 아내와 자녀들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서 그 주인에게 절하며 말하기를 '저에 대하여 참아주십시오. 제가 주인님께 모두 갚겠습니다.' 하니, 주인이 그 종을 불쌍히  여겨 그를 놓아주고 빚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기 동료 하나를 만나자, 그를  붙잡아 목을 조르며, 말하기를 '네가 빚진 것을 갚아라.' 하니, 그의 동료가 엎드려 그에게 간청하며 말하기를 '나에 대하여 참아  주게. 내가 자네에게 갚겠네.'라고 하였으나, 그는 들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나가서 빚을 갚을 때까지 그 동료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의 동료들이 그 일어난 일을 보고 몹시 마음 아파하여 자신들의 주인에게 가서 일어난 모든 일을 보고하니, 그의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그에게 말하였다. '악한 종아, 네가 나에게 간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면제해 주었다. 그러면 내가 너를  긍휼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긍휼히 여겼어야 하지 않느냐?' 그의 주인이 노하여 그 종이 빚진 모든 것을 갚을 때까지  그를 간수들에게 넘겨주었다. 너희가 너희 형제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구절은 용서에 관한 문맥에서 사용되었다. 내가 형제를 용서해야 할 것에 관한 본문이다. 마 5:23~26과 같이 내가 형제에게 용서받아야 하는 내용과는 상관이 없다. 

Matthew 18:23-35 바로 앞의 글을 보자.

Matthew 18:21-22 바른 

21그때에 베드로가 다가와서 예수께 말하기를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제가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니,

22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해 주어라.

마  18:21~22 이후에 연결된 18:23~ 이후의 이 본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파악하려면 앞의 용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것이 문맥이다. 앞뒤를 잘라버리고 상관없는 해석을 한다면 원래 말했던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해석이 된다.


용서해야 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용서받아야 할  마 5:23~26과는 전혀 다른 문맥임을 알 수 있다.

성경을  해석할 때는 본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성경의 원저자인 성령과 그리고 그를 통해 글을 쓴 여러 저자들이 원래 말했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개똥철학과 같이 자신이 원하는 내용에 대충 성경을 갖다 붙이면 그것은 나의 글을 훼손하는 것이며 결국 성경의  원 저자인 성령을 대적하는 것이다.

알레고리한 해석이나 영해를 주장하는 자들이 진정한 알레고리한 해석이나 영해가  아닌 거짓된 영들의 속임의 논리로 성경을 왜곡하는 경우들이 많다. 또한 자기 지식의 명예를 드높이려 똥탑에 오르는 자들의 새롭다고  하며 독특하다고 하는 오래된 마귀의 유전들도 버려야 한다. 그 오래된 유전은 여전히 인간들을 선악과로 유도하여 타락시킨다.  그러므로 새롭다는 해석을 접할 때에 그 속의 영들을 분별하고 그들 속에 있는 논리적 속임을 엄밀히 검증하여 그것들이 너희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진리에 붙어있어야 한다. 




[^1]:  인자(예수님)의 오는 것은 마지막 심판 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인 심판의 때를 의미하기도 한다. 때로는 국가나 민족의  심판의 때가 이른 것을 말하기도 하며 가족이나 마을 공동체에 심판이 이른 것을 나타낼 때도 있다. 그러므로 주의하여 복선적이며  다층적인 의미의 구조를 분석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 삶에 인자(예수님)가 오는 것은 그의 죽음이 이른 것을 말한다. 즉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일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한 말씀이 이루어질 때가 온 것이다. 이것도 개인적인 심판(재판)이다.  그러므로 인자(예수님)가 온다는 것은 복선적 뜻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눅 12장과 같이 개인적인 죽음인 순교에 관해  언급하는 본문에서는 더욱 그렇다고 보아야 한다. 이는 개인적 심판과 마지막 심판을 동시에 나타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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