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절에 관한 앞의 글들은 내용이 너무 함축적이고 난해하기에 이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한 부분 부분을 자세히 설명하면 전체 그림을 볼 수가 없다. 그래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고 그 후에 필요한 부분을 부연설명할 것이다. 만약 앞에서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이 있었다면 이 글을 읽고 나서 다시 앞의 내용을 살펴보기 바란다. 성경 전반에 관한 풍부한 이해가 대부분 없기에 만족할 만한 이해에 이르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고 읽었을 때보다는 훨씬 더 글을 읽기가 쉬울 것이다.
유월절로 시작되는 초반 6개월의 절기의 마지막은 칠칠절이다. 칠칠절이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 7번의 안식일(7)을 지내고 50일이 되는 절기다.
숫자를 통해 의미를 찾으려 하면 그 수를 감동으로 준 성령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경에서 수나 어떤 사건들에 대하여 그 본문 자체에서의 문맥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고 이를 벗어난 모든 것을 배격하려 한다. 그러나 이도 성경을 기록한 저자에게 감동을 준 우리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은 어리석은 성경해석관이다. 우리는 영원을 사는 존재로 성경 각 저자의 시대에만 국한하여 존재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와 창조 이전의 모든 것을 포함하는 일괄성을 우리는 성경에 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에 사용된 상징이나 수사학적 수단이 계시록에 사용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모든 수나 사건들이나 단어들에 대하여 성경 전체의 것을 단일하게 보는 경향도 문제가 있다. 분명 본문의 의도와 성경 전체적인 의도는 서로 상이하지 않기에 본문의 문맥에 맞지 않는 무리한 해석은 지양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과 우리(1위와 2위 하나님)가 기록한 의도를 찾으려 하면 본문의 문맥에서와 성경 전체적 문맥에서의 의미적 통일성을 찾아야 한다.
7이라는 수가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 2장이다. 바로 6일의 창조를 끝내고 여호와가 쉬었다는 표현에서 나온다. 안식의 의미를 조명하는 앞의 글에서 안식은 일을 마치고 쉬는 것을 의미한다. 쉼이란 더 이상 일이 존재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쉼이 필요 없다. 그러나 피조물의 한계를 가진 인간은 쉼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만들 때 안식의 세상을 만들었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하고 시스템을 구축하여 인간은 그 속에서 안락한 삶을 누리도록 만들었다. 인간은 우리가 준 능력으로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존재로 살았다. 모든 세상은 우리가 만든 원래의 질서대로 인간을 향해 복종하고 쉼을 내어 주었다. 인간은 그러한 쉼 속에서 낙원의 삶을 이어갔다. 또한 인간은 물질적 쉼뿐 아니라 정신적 쉼을 누렸다. 스스로 고심하거나 스스로 시련을 향해 도전할 필요가 없었다. 완전한 우리(하나님), 특히 성령이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하고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또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을 부었다. 인간은 창조자, 아버지인 우리의 품 안에서 영원히 지상의 작은 신으로 세상을 통치하며 행복을 누리는 존재였다. 이러한 세상이 태초의 세상이다. 6일의 창조 후에 찾아온 7일은 영원히 안식으로 지속되었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범죄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영원하고도 완전한 안식을 상징하는 수가 7이다. 그래서 성경은 7로 시작하여 7로 끝난다. 태초의 안식에서 시작하여 다시 태초의 안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계시록의 끝이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잎과 열매를 먹는 세상으로 회귀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은 다시 태초의 안식으로 돌아갔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는 유괴당한 아이가 다시 부모의 품으로 돌아와 완전한 보호속에 안식을 누림을 뜻하는 것이다. 성경에 우리가 7이라는 숫자들을 반복하여 사용한 의도가 여기에 있다.
참고로 성경에 6이나 6의 배수들이 등장하는데 이 모든 것은 태초의 창조와 관련이 있으며 모든 것들을 만들고 마지막 6일에 만든 인간과 관련이 있는 수다. 7은 창조나 일을 끝마치고 쉬는 것을 뜻하지만 6은 창조나 일, 또는 활동이 계속되고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6일 동안 일하고 7일은 쉬라고 했다. 물론 창조 이후에는 다시 창조가 있지 않지만 세상 속에서 창조와는 근원과 격이 다르지만 생산하고 세상의 역사를 진행하는 것을 인간의 창조적 역사라 한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날들이 6일이다. 또한 시간에서도 이것이 적용되어 하루는 6시간이 네 번 있는 24시간으로 이루어 진다. 또한 밤은 저녁 6시간과 자정을 지난 새벽 6 시간으로 12시간을 이루며 또한 낮은 오전 6시간과 오후 6시간을 합하여 12시간을 이룬다. 밤과 낮을 합하여 24시간이 된다.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시간과 날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을 우연이나 사람의 결정으로 여기는 자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다. 이는 창조의 질서를 따르는 것으로 시간과 세상의 모든 만물의 각도에도 이것이 적용되었다. 이것이 확장되어 원은 360도이며 이는 시계의 회전으로는 12시이다. 360은 12시의 30배이며 24시의 15배가 되는 수다. 30도는 24시와 관련이 있기보다는 12시와 관련이 있다. 시계의 12시간이 회전으로 360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12를 각도 전체의 수로 하기에는 각도를 쪼개는데 문제가 있다. 정수로 쪼갤 수 있는 각도의 수가 제한이 있다. 즉 12의 약수들은 1, 2, 3, 4, 6이 전부이며 또 12를 쪼갤 수 있는 정수의 갯수도 12개 즉 1~12의 정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각도를 쪼개는데 제한이 있으므로 12에 30을 곱한 360도를 각도의 기본단위로 만들어 쪼갤 수 있는 각도의 정수 종류를 1~360으로 하여 360가지를 만들어내었다. 또 정수가 아닌 유리수 즉 소수나 분수는 그 수가 무한하다. 그러나 고대인들도 수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정수로 표현할 수 있는 각도의 수를 360가지로 하여 그 편리함을 찾았다. 또한 각도를 360도로 한 것은 지구의 공전주기와 1년의 날의 수를 계산하여 만들어 낸 것이다.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공전하는 주기가 1년인데 이것이 360도다. 그런데 날(지구의 자전)의 수가 360에 가깝다. 그런데 고대인들이 360을 고안한 직접적인 연유는 달의 공전에 있다. 고대인들이 1년의 날수를 세어 전체를 360으로 한 데에는 달이 30일에 한 번씩 1년에 12번을 공전하여 360일을 이루어 이것이 1년이 된 것으로 추측한데 그 기원이 있다. 사실 태양을 관찰하기보다는 1개월에 한 번씩 동일한 변화(달의 공전)를 가지는 달이 관찰의 대상으로는 훨씬 쉬웠다. 이를 근거로 태양과의 관계에서의 공전도 360을 이루어 1년을 이룬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러한 월력의 계산은 오류가 있는 것으로 후에 수정을 거쳐 너희가 가지고 있는 365일의 역법이 이루어졌고 그것도 정확하지 않아 음력은 윤년에 윤달을 두어 그 오차를 수정하기도 하고 태양력에서는 특정한 달의 날의 수를 28일로 하며 윤년에는 29일로 하여 그 오차를 수정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하나님)가 세상의 날의 수를 6일과 일주일의 7일로 만들었기에 파생된 수의 개념들이다. 날들의 수를 이렇게 함으로 인간들은 어쩔 수 없이 6과 7이라는 수에 계속 노출이 된다. 이러한 도구를 사용하여 히브리인들에게도 날과 주와 월과 년의 경계를 이루게 하고 또한 안식일과 절기들과 안식년과 희년의 절기들을 두게 하여 태초의 안식으로의 회복을 기억하게 하였다.
일주일을 6일과 그 하루 후의 7일로 하여 계속적인 7, 7, 7, 7이 반복되게 하였다.
절기에도 이러한 장치들을 두었다. 절기에서도 성회가 있는 날들은 7일을 간격으로 두게 하였다. 무교절의 7일이 그러하고 77절의 7일이 그러하다. 또한 초막절 즉 수장절의 날도 7일이다. 이를 통해서도 안식을 생각하도록 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1년에 두 번 77이 반복되는 절기를 두었다. 앞의 6개월에서는 77절이며 뒤의 6개월에서는 초막절(7일)과 무교절(7일)이다. 초막절과 무교절은 같은 기간의 날로 둘 모두 7일을 이루어 이 둘이 77을 이룬다. 물론 77절이나 초막절과 무교절의 수가 숫자 칠십칠(77)은 아니다. 별개의 7이 두 번 반복되어 그것을 77이라 한 것이다. 이것은 7이 7번 반복되거나 또는 7이 두 번 중첩됨을 뜻한다.
안식년은 7년에 한 번 있다. 6년은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7년째는 농사를 쉰다. 이러한 안식년(7년)이 7번 지나고 그다음 해에 희년이 온다. 여기서도 77이 등장한다.
7이 두 번 나와 77이 되는 것은 7의 강조다. 태초에는 안식의 상징이었고 타락한 후에는 안식의 회복의 상징이 된 7이 반복되어 안식의 회복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 회복의 수는 또한 추수와 관련이 있다. 봄의 추수와 관련한 절기가 77절이다. 그리고 가을 추수와 관련한 절기가 수장절(=초막절)이다. 또한 7년이 7번 반복되는 안식년과 희년을 설명하는 레 25장에서는 땅을 쉬게 하고 농경을 쉬는 안식년에 심지 않는 것을 거두어 먹게 하겠다는 약속이 있다. 사실 진정한 수확은 자신들이 땀 흘려 일하여 얻은 6년의 수확이 아니다. 이는 은혜가 필요하지만 결국 인간이 땀 흘려 일한 결과다. 그러나 7년의 추수는 오직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일하지 않았음에는 양식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은 오직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뒤에 77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면서 이 오직 은혜라는 개념이 상당히 중요해진다.
77이나 7이 거둠과 관련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구원과 거둠이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 구원은 원수에게서 구해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는 누구이며 원수에게 붙잡혀 있는 감옥은 어디인가? 원수는 마귀이며 그 마귀가 사람들을 붙잡아 가두어 놓은 곳은 세상이다. 세상 가운데서 인간들(아담)은 죄와 사탄과 육적 소욕의 종노릇 하며 지옥을 목적지로 하는 고통의 삶을 살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도 죄를 짓고 타인에게도 고통을 주며 타인이 자신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반복하고 있다. 온갖 범죄와 추악한 배신과 더러운 음행의 죄의 벌을 삶 속에서 스스로 받으며 살고 있다. 그래서 저 인도의 고타마 시타르타는 인생을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라고 했다. 구원이란 사탄과 세상과 죄의 육체에서 건져내는 것을 말한다. 그렇게 건져내어 우리의 품으로 모아들여 보살핀다. 그것이 구원이다. 유괴된 자식을 아비와 어미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구원이다. 이를 추수라고 비유했다. 세상에서 거두어들여 천국에 두는 것이다. 우리의 원함은 단 하나만 구하고 만족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영혼을 구하기를 원한다. 마치 밭에 알곡들이 있으면 그 전부를 거두어들이기 원하는 농부의 마음과 같이 우리(하나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한다. 그 누가 거부하고 심지어 우리를 비방하며 욕하는 자들이라도 우리는 그들이 깨닫고 돌이켜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우리가 가장 바라는 것은 대추수다. 세상 모든 영혼이 구원을 얻기를 원하는 것이다. 저 타르수스 산맥 아래서 자란 타르수스 출신의 바울이 대적자의 자리에서 돌아와 구원받았던 것처럼 그 어떤 자라도 돌이켜 살기를 바란다. 이러한 우리의 바램을 담고 절기는 추수와 관련하여 사용되고 모든 절기의 사이클의 마지막은 추수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가 인간으로 갔을 때에도 비유로 많이 사용한 것이 추수와 관련한 비유들이었다. 추수할 들판과 일군, 포도원, 알곡과 가라지 비유, 100배 60배 결실, 밭의 종류;길가, 돌짝, 가시, 옥토 등 수많은 추수와 열매 맺음에 관한 비유들이 있다.
원수는 성경에서 추수의 개념이 이와 같이 핵심적임을 알고 우리(하나님)의 추수에 대한 공격을 계속하고 있다. 너희 시대에는 SF영화를 통해 추수가 외계인이나 외계의 신적인 존재들이 자신의 DNA를 인간들의 몸에 심어 때가 되면 자신의 죽을 육체를 대신할 새로운 육체를 추수하기 위해 지구의 종말을 가져오고 인간의 육체를 빼앗으러 온다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파하기도 한다. 이와 유사한 많은 장치들을 영화를 비롯한 매스미디어에 함정으로 설치해 두었는데 인간들은 이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십자가와 부활, 거듭남, 추수, 휴거, 우리(하나님)와의 연합, 성령의 내주, 종말, 재림 등을 거부하게 된다. 원수가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그만큼 원수의 세상을 끝내는데 핵심적인 요소들이다. 그중 7로 통해 나타내어지는 안식과 태초의 안식으로의 회복과 그 회복을 위한 추수의 개념은 구원의 최종적 목표이며 핵심적 가치다. 성경의 많은 부분들에서 이러한 기능적인 역할들을 하던 7은 계시록에서 그 마지막 완성된 모습을 보인다. 다음 글에는 이를 살펴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