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팔은 전체가 들을 수 있는 정보를 전한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여러 의미를 나타낸다. 특히 우리의 임재를 나타낸다. 또한 그 임재가 결국 옛 세상의 심판과 새 세상(오는 세대)의 도래를 부른다. 그리고 그 변화를 나타내는 단어가 진동이다. 그런데 그렇다 하여 나팔이 의미하는 바가 모두 심판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나팔은 안식일에도 그리고 월의 첫날에도 모두 적용된다. 그리고 드려지는 희생마다 나팔은 적용된다. 그 모든 행위가 우리를 찾고 의지하는 신앙의 행위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의를 의지하는 것이 아닌 오직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철저한 믿음을 의미한다. 어린양의 피를 의지하는 것은 자신을 전혀 의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를 의지하는 자에게만 우리는 임재한다.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오직 우리만을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는 진정한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나팔을 분다는 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우리를 의지하여 그 순간에 우리를 찾는 것을 의미한다. 나팔을 부는 행위는 바로 우리를 기억하여 우리를 찾는 행위다. 그러므로 모든 순간에 우리를 의지하는 것이 나팔을 부는 사람의 태도다. 오직 모든 순간에 우리를 의지함으로 마음의 나팔을 부는 자만이 우리를 의지하는 자다.
그런데 나팔을 분다는 것은 모든 시(time)와 모든 순간에 우리를 의지함이라 했다. 그렇다면 나팔이 단순히 심판만을 나타낸다고 해서는 안된다. 나팔을 붊은 분명 우리의 임재를 구하여 우리를 의지하는 신앙의 행위다. 그런데 특정 시(time)에만 우리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특정 시간이란 예를 들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히 12장에는 시내산의 임함과 나 예수의 임함이 각각 땅과 하늘을 진동시킨 것으로 나온다. 즉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첫 것은 땅을 변화시켰고 두 번째 것은 하늘을 변화시켰다. 첫 번째 것은 땅의 희생의 제도를 내리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 것은 하늘의 희생의 제도를 내리는 것이었다. 첫 번은 땅의 것으로 드리는 피였으며 두 번째는 하늘의 존재로 드리는 피였다. 첫 번째 것은 짐승의 피였으며 두 번째는 나 예수의 피였다. 첫 번째는 땅의 성막에서 드리는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하늘에서 드리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첫 번째는 땅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으며 두 번째는 하늘의 아들들에게 내리는 새 계명에 관한 것이었다.
히 12장은 이를 통해 일어나는 최종적 변화와 회복에 관한 설명을 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나팔이 등장한다. 그러나 나팔은 이러한 최종적 변화나 최후의 심판에서만 그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임하는 모든 장면에 나팔은 임재를 상기시키는 역할로 등장한다.
나팔은 임재가 있는 모든 곳에서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팔의 기능 자체를 특정한 한 가지에 집중시켜서는 안 된다. 또한 나팔이 사용되는 각각의 기능들은 그 나팔이 사용되는 문맥에 따라 결정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나팔절의 나팔의 기능은 무엇일까? 과연 카톨릭이나 개신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팔절은 마지막 심판의 나팔을 뜻하는 것일까? 과연 나팔절의 나팔의 기능의 진실은 무엇일까?
나팔절은 절기상 어떤 문맥에 있을까?
모세오경에서 시작은 창조이며 그 창조의 핵심은 에덴의 동행이다. 사실 동행이라 하기보다 함께 거함이다. 우리와 인간은 함께 거하며 서로 사귐이 있는 존재였다. 우리는 그들의 하나님이었고 그들은 우리의 아들들이었다.
그러한 동행 또는 함께 거함에서 인간의 죄악으로 인한 타락이 있었다. 타락의 결과로 인간은 우리와 함께 함을 거절했고 그 결과 낙원을 잃었다. 이를 실낙원[^1]이라 한다. 낙원을 잃은 인간에게는 지옥과 같은 삶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지옥의 상태에서 돌이켜 우리에게 돌아오는 길이 있는데 그것을 회개라 한다. 회개란 후회하여 뉘우침을 말한다. 그 자체가 돌이킴을 말한다. 태도의 돌이킴이며 존재의 돌이킴이다.
그 돌이킴의 과정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에게서 우리에게로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성경에 여러 시간에 여러 사람에게서 여러 형태로 등장한다. 모세가 이끌었던 출애굽 세대의 시간에서 돌이킴의 시작은 사실 요셉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보다 직접적인 것은 유월절로 시작한다.
유월절과 그 이후로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구원의 사건들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영원히 구원을 기억하게 했다. 그것이 절기다.
절기의 시작은 유월절로 시작한다. 그리고 유월절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무교절과 그 이후의 초실절 그리고 칠칠절(오순절)이 이어진다. 이는 십자가와 부활과 구원 그리고 그 이후의 부흥의 추수(칠칠절, 오순절)를 상징한다.
그리고 다시 반년이 지난 후에 시작되는 7월 1일의 나팔절이 있다. 나팔절 이후로는 다시 속죄일이 있고 속죄일 이후에는 가을 추수가 있다. 그리고 첫 추수물의 저장과 비슷한 두 번째 수장절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절기가 매년 반복된다.
또한 모든 절기의 시작이 되는 안식일도 안식년으로 반복이 된다. 그리고 그 안식년(7년)이 7번 반복되고 그 이후에는 희년이 찾아온다. 그리고 희년도 속죄와 함께 등장한다. 또한 이 모든 절기에 나팔은 함께 한다. 아래의 표는 레위기 23장 이후에 나오는 절기들에 대해 순서대로 정리한 것이다.
S[^2]. 안식일=7일
B[^3]. 유월절(1월 14일, 15일부터 7일 무교절 )
F[^4]. 초실절
s. 77절(7*7+1=50일)
T[^5]. 나팔절(7월 1일)=7월
b. 속죄일(7월 10일)
s. 초막절(7월 15일부터 7일)
s. 수장절(7월 15일부터 7일)
s. 안식년(7)이 7번
b. 속죄일(7월 10일)=나팔(전국적으로 동시에)
t. 희년(나팔의 해=50년)
위의 구조를 보면 유월절(B)이나 속죄일(b)과 같은 피흘림의 절기가 반복된다. 그리고 안식일(S)의 7과 안식년의 7이 반복된다. 무교절은 7일간이며 또한 나팔절(T)은 7월이며 초막절(f)은 7일 동안 지키며 수장절도 7일간 지킨다. 초막절과 나팔절, 둘은 동일한 기간에 이루어지므로 7이 2번 반복(77)된다. 이는 칠칠절이나 희년에서 77이 반복되는 구조의 선상에 놓여 있다 또한 칠칠절(77절)의 49와 그 후의 50일의 오순절(=칠칠절)과 안식년(7)이 7번 지난 49년 후의 50년의 희년이 반복되고 있다. 또한 특별히 나팔을 불라고 언급하는 절기들이 반복된다. 나팔절과 희년 즉 나팔의 해가 반복되고 있다. 이는 7일의 안식일과 7월의 나팔절과 7년째의 안식년(7년)과 7번의 안식년(7곱하기7년=49년)이 등장한다. 7을 통해 날들이 구성되고 7일의 한주가 모여 달을 이룬다. 그 달들이 모여 12개월을 이뤄 1년을 이루며 일곱(7) 해가 모여 한 안식년의 단위를 이룬다. 그리고 안식년(7년)이 7번 모여 49년이 되며 그해의 속죄일을 시작으로 다음 해까지 넘어가는 희년을 이룬다. 그런데 출애굽기에 유월절을 유대력 1월(태양력 3-4)을 시작으로 하는 1년의 개념과는 다른 7월에 시작되는 해의 개념을 절기 특히 희년을 설명함에는 사용한다. 보통학자들은 이를 포로기 이후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저들의 견해는 유대인들이 앗수르(앗시리아)와 바벨론(바벨로니아)과 바사(페르시아)의 포로로 있으면서 월력을 사용하고 밀과 보리의 추수를 중심으로 둔 달의 체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저들이 아브라함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왔는지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착각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대아 우르로 바로 앗수르와 바벨론이 발원한 지역의 남쪽인 것이다. 우르는 바벨론과 앗수르보다 더 유서 깊은 곳이었으나 역사의 뒤편으로 그 영광이 사라졌을 뿐 결코 바빌로니아와 앗시리아에 뒤지는 곳이 아니다. 그곳도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강역이며 저들이 사용한 년월의 법도 바로 월력이었다. 소위 한국인들이 음력이라 말하는 역법과 별 다를 것이 없는 역법이다. 그런데 저들의 역법의 특징은 밀과 보리의 생장에 초점을 두고 그 시작이 현재의 10-11월(유대력 7월)이라는 것이다. 가을걷이를 끝내고 보리와 밀을 파종하는 시기인 것이다. 보리와 밀은 이때를 시작으로 겨울을 보내고 성장하여 3-5월 사이에 거둔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거쳐온 길에는 바빌론과 앗수르도 포함되어 있다. 또 우르를 시작으로 바빌론과 앗수르 그리고 하란, 최종적으로 가나안은 모두 밀이 주식인 지역이다. 그러므로 저들의 해의 시작은 밀의 파종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나팔절이 있는 유대력 7월(=태양력 10-11월)은 원래 히브리인들의 해의 시작이었다. 유대인들의 절기가 유대력 1월(태양력 3-4월)에 시작하는 것은 유월절이 바로 추수의 계절(세상 속에 있는 우리의 백성을 모으는 계절)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구원의 역사에 있어 우리(하나님)의 백성들을 애굽(이집트)의 종 된 것에서 구원해 내는 역사의 결정적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기적과 심판으로는 이집트의 파라오가 굴복하지 않았지만 유월절의 역사로 말미암아 굴복했으며 이를 통해 내(예수의) 백성들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므로 구원의 출발점은 유월절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절기의 시작은 유월절인 것이다.
또한 이 모든 절기의 특징은 거둠(수확)에 있다. 유월절과 무교절 그리고 초실절, 칠칠절은 밀의 수확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서 절기의 거둠을 추수라고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추수(秋收)가 가을걷이를 뜻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을 걷이를 뜻하는 이 단어가 이미 모든 수확을 아우르는 단어가 되었으므로 본래의 뜻보다는 현재의 뜻을 따라 이 단어를 그냥 가을 걷이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수확에 적용할 수도 있다. 나팔절과 속죄일, 초막절(=수장절)은 가을 추수와 관련이 있다. 또한 안식년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본문에는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 먹는 거둠(수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추수에는 반드시 피의 절기가 포함된다. 1월에는 유월절, 7월에는 속죄일이 그것인데 이 모든 것은 나 예수의 피를 뜻하는 것이다. 나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유일한 수단은 나의 피다. 그러므로 나의 피가 없이는 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불러 모아 나의 나라에 들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둠(수확)은 세상에 있는 나의 백성들을 구원하여 나의 나라에 불러 모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십자가와 구원과 회복이 반복되고 있는 구조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예표이지만 완성된 구원과 회복은 아니다. 유월절과 속죄일을 통해 나 예수의 십자가를 반복하여 상기시킨다. 또한 매일 드려지는 희생을 통하여 나의 피를 상기시킨다. 이러한 절기들이 50년을 단위로 순환을 하고 그것이 계속 반복된다. 이를 통한 의도는 구원의 완성인 말세지말의 마지막 대추수와 심판이 아니다. 구약의 모든 것은 나 예수가 오는 것을 예비하기 위함이다. 구약에서 최후의 심판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구약의 초점은 나의 초림에 있다. 내가 와서 구원의 십자가를 졌을 때에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네 번의 반복의 싸이클(쓰아이클)이 있다. 1년에 2번의 반복 싸이클이 있다. 처음 시작은 유월절로 시작하는 순환이다. 이는 유월절, 무교절, 초실절, 칠칠절로 이어져 일 년의 절반의 싸이클이 끝난다. 그리고 7월 이후로는 나팔절, 속죄일, 초막절(=수장절)로 이어지는 절기가 있다. 앞의 6개월과 뒤의 6개월이 합해져 1년을 이룬다. 그리고 그런 1년이 7번 모여 7년 째의 안식년을 이룬다. 땅을 6년 동안 경작하고 마지막 7년째에는 안식하게 한다. 그리고 7년 안식년의 싸이클이 7번 반복하면 그때에는 50년째의 희년이 온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월절을 포함한 1월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49년째 7월에 희년이 시작된다. 또 나팔절로 시작하는 7월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50년이 희년인 것이다. 이러한 피의 속죄와 이를 통해 용서받은 나의 백성을 세상에서 천국으로 모아들여 추수하는 추수가 반복된다. 네 번의 반복을 통해 이것을 강조하고 마지막 희년의 반복을 통해 우리(하나님)의 의도가 세상 속의 백성들을 원래의 고토, 즉 에덴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임을 보인다. 우리의 모든 계획은 원수의 꼬임에 넘어가 원수의 종이 된 우리의 아이들을 죄의 중독에서 건져내어 다시 낙원인 에덴으로 돌아와 행복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소원이 무엇인지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위해 우리는 우리의 전능의 능력을 동원하여 모든 것을 걸고 나아간다. 그런데 실패할 수 있겠는가? 전능의 우리가 어떻게 실패할 수 있겠는가? 만약 어떤 인간이든지 우리의 뜻을 알고 믿는다면 결코 구원받지 못하는 일은 생길 수 없다. 사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사탄은 결코 우리의 대적이 될 수도 없다. 심지어 태초의 인간의 상대도 되지 못했다. 그래서 사탄은 속이는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사탄은 완전한 우리(하나님)는 속일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을 속이는 길을 선택했다. 태초의 인간을 속이고 후에는 구원받아야 할 인간들을 속여 그들의 마음을 혼돈스럽게 했다. 지금도 세상에서 사탄과 그 졸개들은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혼돈하게 하여 복음을 가리고 있다.
내가 구약을 통해 그렇게 반복하여 가르쳤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구약의 안식일과 7일의 한주와 모든 절기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뼈에 피의 복음의 진수를 새기려는 의도였다. 7일의 안식은 태초의 6일의 창조 후 7일째 날의 안식으로 모든 구약의 절기와 희생들과 그리고 그 원형인 나 예수의 피의 복음이 태초의 안식으로 나의 백성들을 다시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도임을 명확히 보이는 상징이다. 이렇게 선명하고 분명하게 나의 의도들을 선지자들을 통해 나타내었다. 그럼에도 원수는 선지자들이 길렀던 이스라엘조차도 속여 복음에서 벗어난 자의적 선민으로 만들고 멸망의 길을 걷게 했다. 그럼에도 나 예수는 그곳에 찾아가 나의 백성들을 부르고 부흥의 물결을 일으켜 열방의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했다. 이제 너희는 멸망의 길을 갈 것인가? 마귀의 새끼들과는 다르다는 교인이라는 자부심의 선민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복음 앞에 무릎을 꿇고 하늘의 꿈을 품고 하늘의 물을 머금고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될 것인가? 만일 너희가 알고 있는 뾰족지붕집의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어찌 너희는 성경에 기록된 그리스도인들과 상관도 없는 가라지가 되어있는가? 생각하여 보라. 지금 내(예수님)가 말하는 것은 뾰족지붕집의 것은 아니지만 하늘의 것이다. 처음 내가 와서 말했던 그때에도 나의 백성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자칭 유대인이라던 사탄의 회가 나를 거역했다. 그리고 여전히 세상에서 자신들이 그리스도인이라 주장하는 무리들 중 많은 자들이 나를 대적하고 있다. 너희는 뾰족지붕집 사람의 가르침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오늘이라도 성경이라는 거울을 보고 자신을 비추어 돌이켜 나(예수님)에게 돌아오겠는가?
[^1]: 밀턴의 시의 제목으로도 사용되었다.
[^2]: Sabbath=안식일
[^3]: Blood=피
[^4]: First=처음=초(初)
[^5]: Trumpet=트럼펫=나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