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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38

by 에스겔

01.3.2.3.10.9.6.12.3.4.5.7.8.2. 계시록의 구조


앞의 글과 같이 7과 77 등은 과거 태초의 안식을 상징하며 그 안식으로 돌아가기 위한 추수와 그 회복의 완성을 나타내는 단어다. 이와 같은 구조들을 가져와 적극적으로 사용한 글이 있는데 바로 계시록이다. 계시록에는 7 외에도 12와 12에 12000을 곱한 144000 또 10과 그 배수들이 사용된다. 또한 구약과 신약에 사용된 묵시적 양식들을 차용하여 사용한다. 이는 계시록의 목적에 기인한 것이다. 핍박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숨겨지고 기독교적인 배경을 아는 자들에게는 그 내용이 환히 밝혀지는 그러한 책을 의도하였기에 이러한 양식들을 적용한 것이다.

계시록의 1차적 기록목적은 1C말의 소아시아 7 교회가 핍박가운데서도 순교자의 길을 가며 신앙을 지키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니엘서는 미래를 위한 예언이 포함된 묵시문학들이 있다. 미래 시대를 위한 내용이므로 우리(하나님)는 다니엘에게 봉인하라고 했다(단 8:26, 12:4). 그런데 계시록은 사도요한에게 봉인하지 말하고 했다(계 1:3, 22:10). 이는 계시록의 계시가 1세기의 교회들에게 닥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마지막 심판과 그에 관한 것은 미래이다. 그러나 소아시아 7 교회에게는 현실보다 더한 진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제 죽음을 목전에 둔 순교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그 죽음 앞에 두려워 떠는 자들이 아니라, 마지막 승리를 바라보며 담대히 서야 할 자들이다. 그래서 마지막 종말의 심판도 저들에게는 죽음을 이기는 초월적 현실이었다. 계시록을 기록한 자는 요한이었지만 모든 묵시를 보여주고 그것을 기록하게 한 것은 우리(하나님)였다.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한 때에는 이미 요한을 제외한 모든 다른 11 사도들이 순교를 당한 후였다.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다. 이제 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저들에게 순교를 의미했다. 핍박의 물결이 거세어지기도 하고 잠시 잠잠하기도 했지만 항상 핍박 중이었다. 언제 어디서 죽임을 당할지 알 수 없었다. 저 유명한 서머나 교회의 감독 폴리갑의 순교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다. 모두 그러한 길을 갔다. 기독교와 유대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도 로마의 타이투스 장군에 의해 훼파되었다. 기독교도들의 주류를 이루었던 유대인들은 이제 고향을 잃고 세계 곳곳에 뿔뿔이 흩어진 유랑민이 되었다. 그 유랑의 생활 속에서도 핍박이 끊이지 않았다. 기독교뿐 아니라 유대교도 핍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제 요한도 밧모섬에서 순교를 당할 처지였다. 그런데 요한은 로마가 죽이려 해도 죽지 않았다. 기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 기름 솥에 들어간 요한을 살렸다. 우리는 요한을 통해 순교를 앞둔 그리스도인들에게 믿음을 부어주었고 다시 불을 지펴 그들의 마음에 열망이 타오르게 하기 원했다. 그래서 그를 마지막까지 살게 하여 요한계시록을 집필하게 하였다. 처음 계시록은 소아시아 7 교회에 회람되었다. 또 그 서신(계시록)의 소식은 로마 전역으로 퍼져갔다. 그리하여 1C의 그리스도인, 저들은 결코 두려워 퇴보하여 배교할 자들이 되지 아니었다. 저들은 로마 곳곳에 있었던 원형 경기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다. 그러나 저들은 결코 우는 사자가 삼키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미는 아이의 손을 붙들고 죽음을 맞이했고 그들이 다시 눈을 뜬 곳은 바로 나 예수의 보좌가 있는 천국이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있을 종말의 증상들의 연대와 세세한 사항들을 예언하기 위해 기록한 책이 아니다. 순교를 앞에 둔 성도들에게 믿음을 불어넣는 오늘의 책이다. 순교를 앞둔 자들이 미래의 세세한 일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오직 저들은 지금 눈앞의 사자를 쳐다볼 뿐이다. 그러나 저들은 사자를 보고도 두려움에 물러나지 않았다.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요한계시록을 읽고 결코 그리스도는 패배하지 않으며 그의 교회는 이기고 이기고 이기어 열방을 차지하고 결국 마지막 승리 후에는 영원한 에덴의 안식으로 회복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들은 요한의 글을 통해 부어진 기름부음으로 아이부터 노년까지 모두 순교의 피를 뿌렸다. 저들은 내가 십자가 상에서 네가 오늘 낙원에 있으리라는 말과 같이 즉시 나와 함께 낙원에 있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믿는 순간 즉시 핍박의 현장에 놓이게 된다. 만약 죽일 듯한 미움으로 원수들이 달려들지 않는다면 저는 버리운 자다. 역사의 어느 곳이든 어떤 때이든 동일하다. 중세의 수도사들의 필독서였던 명상록을 지은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역사상 로마의 가장 잔혹한 박해자였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태평의 시대와 공평과 정의의 시대라 이름할 수 있는 어떤 시대에도 참으로 거듭난 자들은 핍박의 시대를 살아간다. 원수의 교묘한 핍박과 술수는 언제나 정의를 외치고 사랑을 외치지만 진정 믿는 자들을 조롱하며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그러므로 이 글을 읽는 어떤 이든지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으나 핍박이 없다면 어떤 시대이든 어떤 장소이든 어떤 정치제도 아래에 있든 그는 버리운 자이다.

수천 년을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이 나를 박해하고 죽였다. 그런데 너희가 어떤 나라에 속해 있든지 수천 년을 나를 기다린 자들보다 더 경건한 공동체에 있다고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자신의 나라의 정치 제도나 시대가 정의롭고 박애적이라 핍박이 없다고 착각한다면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 가운데 죽을 것이다.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부흥이었던 아주사 부흥은 가장 극심한 공격을 받고 저평가되었다. 그 이전 시대에 부흥을 주도했던 조나단 에드워드는 담임한 교회에서 쫓겨났고 결국 병으로 생을 달리했다. 그의 사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그 시대의 인디언 박멸을 눈으로 보며 그 인디언들과 운명을 같이 하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 죽어 갔다. 캡틴 아메리카와 자유의 여신상이 지키는 미국에서도 이러했다. 나를 참으로 믿는 자들은 어디에서든 이단과 죄인으로 몰리며 거짓 증인들의 모함에 의해 정죄당한다. 그런데 너희에게 그런 표징이 없다면 너희는 버리운 자다.

계시록은 이러한 박해의 시대를 살아가는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책이다. 결코 세상과 벗하여 세상의 향락과 부를 즐기는 가라지들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다. 너희가 믿는 축복과 성공이 그리고 물질과 권력과 인기의 기름부음이 어디에서 왔는가? 이 독사의 새끼들아. 계시록은 너희를 위한 책이 아니다. 그러니 너희 어리석은 모든 거짓해석들을 내려놓고 먼저 회개한 자가 돼라. 조용기와 그의 새끼 무당들아 너희도 너희 죄를 내려놓고 회개하라. 너희에게 부어진 것은 무당에게도 부어지는 신들림이다. 너희 복채와 너희 굿판을 태워 부셔 회개의 물로 정결함을 얻으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비웃는 기름부음이 없는 지식주의 서기관들과 함께 너희도 지옥에 떨어지리라. 신학교를 나와 사람의 계명을 가르치는 자들아! 신인 우리(하나님)는 결코 학교에서 만날 수 없다. 결코 우리의 일은 인간들이 가르치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다. 만일 너희가 속히 회개하지 않는다면 내 입의 검으로 너희를 멸하리라.

나 예수의 시대에도 100년이 지나기 전에 나를 죽였던 유대인들은 심판을 당했다. 너희의 시대에도 그러한 일이 없겠는가? 유대인들은 심판을 당하였고 교회는 박해를 당했다. 너희 시대에도 참교회는 박해를 당한다. 그러므로 정상적인 교리를 가지고도 신천지와 같은 취급을 당하며 거짓 모략과 거짓증인들에 의해 신앙촌과 같은 취급을 당하는 곳이 너희 시대에는 없겠는가?

너희 신사참배의 새끼들아 너희도 그 대가를 민족의 분단과 전쟁으로 받았다. 너희 세대는 순교자들과 출옥성도들의 회개로 잠시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너희는 여전히 신사참배의 새끼들이며 독사의 새끼들로 살고 있구나. 화 있을지어다. 너희여, 너희 결국을 시체를 먹는 독수리들이 보리라.

너희에게는 계시록이 가리어졌음은 이와 같은 연유에서다. 그러므로 회개하여 안약을 얻어 눈을 뜨라.

만약 요한계시록이 미래를 위한 계시의 책이었다면 우리는 결코 다니엘서와 스가랴, 그리고 에스겔서와 예언서들에 나타난 환상들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예언에 사용된 숫자들과 상징들을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을 반복한 이유는 이미 그 모든 예언들의 성취를 본 유대출신의 그리스도인들과 성경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확인한 이방 출신의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이루어질 구원과 마지막 세상의 심판과 성도들의 회복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래를 말할 때도 과거 묵시문학을 반복함으로 그 속에서 역사를 움직이고 예언을 성취하는 우리를 믿게 하려 함이었다. 그래서 계시록은 구약과 신약의 책들의 집대성이며 시간의 순서와 공간의 순서가 뒤죽박죽 된 이상한 책으로 보인다. 다니엘서에 기록된 묵시의 예언들은 다니엘 이후의 페르시아와 헬라 제국 시기에 이미 다 이루어졌다. 다니엘 당대에는 미래였지만 신약의 성도들에게는 과거였다. 과거를 읽으며 미래를 듣는 자들이 무엇을 느꼈겠는가? 미래에도 다니엘서의 예언과 동일한 일들이 벌어질 것을 상상했겠는가? 아니면 다니엘서의 예언을 성취한 우리가 미래에도 자신들과 함께 할 것을 믿었겠는가? 그리고 앞으로 자신들에게 다가올 박해가 아무리 극심해도 과거 다니엘이 예언한 시대를 거울삼아 배교의 길을 거부하고 믿음의 길을 가기를 결단했겠는가?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면 과거에 이미 이루어진 일들이 자신들의 미래에 동일하게 펼쳐질 것이라고 상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글은 오직 1세기의 유대인 성도들이 구약성경과 자기 민족의 역사를 아는 상태에서 읽어야 무슨 말인지 알 수 있다. 1세기 로마 제국 교회의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유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방지역에서 났든지 아니면 유대에서 났든지 저들은 바울의 최초의 전도 대상이었다. 바울이 전도하는 지역에서 처음 방문한 것이 회당인 것을 너희는 사도행전을 통해 알고 있을 것이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유대인이며 디모데도 유대인이다. 마가도 유대인이며 대부분의 그리스도인 지도자들이 유대인이었다. 누가를 제외한 신약 성경의 모든 저작은 유대인들의 기록이다. 사도들도 유대인이었으며 심지어 나 예수도 유대인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교회가 순교의 시대에 믿음을 지키라는 것을 구약의 예언들과 그 성취된 것과 믿음을 지킨 자들이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이름을 가진 것을 통해 알리는 것이다.

또한 원수들인 로마의 핍박자들은 읽어도 내용을 알 수 없도록 계시록은 의도되었다. 반지의 제왕과 같은 알 수 없는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계시록을 접한 로마인들은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것을 보고 믿음을 지켜 순교하라는 메시지를 읽을 수는 없다. 마치 2000년 후의 너희가 기본적인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계시록을 읽고 엉뚱한 상상을 하듯이 로마인들도 이상한 재미없는 판타지 정도로 계시록을 보았다. 뭔가 비밀은 있는 듯한데 절대 그 비밀을 풀어낼 수 없는 이상한 책으로 보았다.

계시록은 아시아에 있는 7 교회에게 보내졌다(계 1:4, 11).
어제도 계셨고 오늘도 계시며 장차 오실 분(성부)과
그분의 보좌 앞에 있는 7 영(성령)과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평강을 전하고 있다(계 1:4-6).

7 금 촛대(7 교회) 가운데 계신 인자(예수님)가 7 별(7 교회의 사자=천사)을 가지고 어제와 오늘과 장차 될 일을 보이신다. 요한은 그것을 기록했다(계 1:19-20).

7 교회에게 현재 필요한 말씀을 주셨다(계 2-3장).

7 교회에게 인류 전체 역사를 통한 타락과 구원의 과정과 승리를 설명했다(계 4-22장).

초반 1-3장에서는 발신자와 수신자와 그 메시지를 알리는 사자와 관련하여 3가지 종류의 7이 사용되었다.

1. 먼저 발신자인 성령을 7 영으로
2. 또 수신 자인 교회들을 7 금촛대로
3. 전달자인 천사들을 7 별로 묘사하였다.

1-3에 나타난 이 부분은 소아시아 7 교회에게 직접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이후 중반부에서는 인류 전체의 타락과 심판과 구원을 보이는 과정에서 3 가지의 7이 사용되었다. 이 3 가지 7은 세상에게는 심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성도들에게는 구원이 된다.

4. 먼저 일곱 봉인이 등장한다(계 5:1- 8:5).
5. 또 일곱 나팔이 등장한다(계 8:6-14:20).
6. 일곱 금대접이 등장한다(계 15:1-19:21).

각각은 심판과 구원의 7이 등장하고 이를 부연설명하는 부분이 뒤에 포함된다. 여기에는 1세기의 7 교회를 기준으로 하여 과거(어제)와 현재(오늘)와 미래(내일)를 언급하며 언제나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왕국과 패망하는 원수의 나라를 대비하고 그 가운데 그리스도의 왕국에는 구원이 그리고 원수의 나라에는 심판이 부어진다.

3 가지의 7(봉인, 나팔, 대접)은 각각 하나가 독립적 역사적 순서를 따라 대부분 기록되었다. 셋이 각각 독립된 역사의 종말을 말하고 있다. 3가지가 말하여 짐으로 결국 역사의 종말은 3번 반복하여 말하여진다. 그러나 이 셋은 같은 표현 방식이 아닌 다른 표현 방식으로 말하여 짐으로 이를 통해 세 번의 점층적 반복이 이루어진다. 일곱 봉인 후에 일곱 나팔의 사건이 이어지고 그 후에 일곱 금대접의 사건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 셋은 서로 시간 상 전후의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셋은 각각 역사의 종말 전체를 말함으로 인류 구원사를 세 번 반복하여 말하게 된다. 그래서 7 봉인 중 여섯을 떼고(계 6장) 일곱 번째 봉인을 떼기 전 계 7장에서도 144000이 등장하고 7 나팔을 불고(계 8:6-)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는 중에도 144000(계 14장)이 등장한다. 그러므로 각각은 심판과 구원에 대한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 또한 이 과정들에서 신구약의 많은 부분을 인용함을 통해 성도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읽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러나 같은 이야기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판타지 소설처럼 들린다.

후반부에는 마지막 생명과 사망의 부활과 그리고 어린양의 혼인과 그 신부와 이를 상징하여 반복되는 144가 등장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에덴으로 회복되는 장면을 등장시키고 결국 이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인 나 예수가 속히 올 것을 약속하고 있다.

계 1-3장을 통해 3 가지의 7이 등장한다.

계 4-19장을 통해 3 가지의 7이 등장한다.

이렇게 하여 총 6번의 7이 반복된다. 그런데 성경에 많이 사용된 7이 7번 반복되는 구조를 위해서 7이 한번 더 등장해야 하는 데 그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은 숨겨진 7이다. 그러나 성경을 아는 자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7이다. 바로 창조의 7일에 있었던 안식을 뜻하는 7이다.

7. 계 20-22장을 통한 1 가지의 7이 등장한다.

바로 에덴의 안식이 회복된 것이다. 창조의 안식은 7일이었다. 태초의 7일 다음에는 창세기에 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는 상징적인 것으로 그 7일의 안식은 영원히 계속된다. 만약 인류의 타락이 없었다면 7일은 영원히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 낙원인 에덴으로의 회복이 바로 7일을 나타낸다. 그곳에는 눈물이 없으며 고통이 없으며 슬픔이 없다. 바로 창조 시의 낙원이다. 그곳으로 회복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록은 7이 7번 반복되어 마지막 추수와 낙원으로의 회귀를 나타내는 구원이 나타난다. 이를 통해 안식으로의 회귀를 강조하고 구원의 진정한 목적이 무엇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이는 구약의 절기들이 나타내는 구조와 그 목적이 같다.

우리(하나님)의 목적은 오직 유괴된 아이들을 구해 우리와 함께 행복한 낙원에 있게 하는 것이다. 원수가 이를 방해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이기고 이겨 우리의 아이들을 다시 낙원에 우리와 함께 있게 할 것이다.

이를 읽은 자들과 들은 자들과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두려움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은 우리와 함께 낙원에 있다.


결국 이것을 읽음으로 세상(바다)[^1]과 그 세상을 지배하는 수도(바벨론, 음녀)와 그 지배 세력들(짐승)은 심판을 당할 것이며 그리스도의 나라는 언제나 핍박가운데서도 이기고 이기고 이겨 마지막에는 옛 세상을 멸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맞아 새 예루살렘에서 만물을 다스리며 에덴의 생명나무와 생명수를 누리게 될 것을 모든 세대의 성도들은 깨닫게 된다.


[^1]: 유리바다 위에 선 자들은 세상 즉 물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고 세상의 위에 선 자들이다. 그래서 저들이 선 바다는 유리바다다. 유리바다 위에 선 자들은 물로 된 바닷속으로 빠져드는 자들이 아니다. 저들은 세상을 이기고 그 위에 선 자들이다. 이를 장소의 개념으로 이해하여 어린양의 보좌 앞에 유리바다가 펼쳐진다고 하여 유리바다는 세상 속의 바다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설명하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의 주장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 바다가 세상을 나타내는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유리바다는 바다는 바다이되 빠져들어 그 속에서 숨 쉼을 잃어버리는 바다는 아니다. 성도들은 세상을 이기고 세상 위를 걷는 예수님과 베드로와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들이다. 저들은 세상에게 잠식당하여 세상에 속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유리 바다는 바다의 속성이 바뀐 것이 아니라 그 바다 즉 세상을 이기고 선 믿음을 가진 자들이 세상에 속한 자들과 달라져 그 속성이 바뀐 것이다. 바다는 여전히 빠져드는 바다이되 그 바다 위에 선자들이 바다 위를 걷는 믿음을 가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또한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공간적 개념은 육을 가진 우리들에게 속하는 개념이다. 그런데 육신을 벗은 영적 세상에서 하늘과 땅과 바다의 위치에 대한 개념을 육신에 속한 현재의 개념으로 놓고 이해한다면 문제가 생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님의 나라는 현재도 이 땅에 침투하여 내려오며 육신의 공간이 아닌 영적 공간 안에 우리의 영과 마음과 생각 안에 그 영역을 확장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나라에 우리는 속하게 된다. 그 나라는 우리 안에 있고 우리 또한 그 나라 안에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개념을 육신의 개념으로 이해하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버려야 하겠다. 그러므로 환란의 불이 타오르는 유리바다 즉 세상을 이기고 그 바다 위에 선 자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라 할 수 있으며 그들은 참 이스라엘로 12 지파에 속한 진정한 12 즉 12000이다. 이들을 모으면 144000으로 이들이 거하는 곳의 치수는 144다. 그러므로 12가 12번 반복되는 저들은 12를 강조한 진정한 12 즉 참 이스라엘이다. 이러한 수를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진정한 성벽의 길이로 보는 자들은 없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영적인 것이 어찌 육신의 것과 같이 육신의 길이를 가진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계시록을 이해하려면 다니엘과 요셉과 요한과 같은 7 영님을 통해 들은 지혜를 얻든지 아니면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한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엉뚱한 교만에 빠져 어리석은 해석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마음의 샛별이 떠오르고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주시기 전까지 겸손히 기다려야 한다. 그것이 평생이라도 그것을 기다려야 한다. 또한 무엇보다 우선하여 순전함으로 그 말씀을 사모할 수 있도록 회개하여 거듭나는 은혜를 얻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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