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단락 나팔과 떨림(진동)에서 히브리서와 출애굽기를 연결하여 설명했다.
나팔은 나(예수님)의 임재를 알리는 신호다. 이스라엘은 모든 안식일과 절기들에 그리고 헌신물을 드릴 때에 나팔을 불었다. 전쟁을 앞두고 나팔을 불었으며 광야의 출발과 멈춤에도 나팔을 사용했다. 나는 이스라엘에게 나팔을 불어 나로 이스라엘을 기억하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나팔을 불며 이스라엘이 가는 모든 곳에 함께 있는 우리(여호와 하나님)가 모든 곳에서 자신들을 기억하기를 원했다. 기억하여 자신들의 편이 되며 자신들의 신이 되기를 원했다. 이렇게 그들이 인격적으로 우리를 원할 때 우리는 임재하여 그들을 보호하며 지켰다. 여리고에서는 저들이 마지막 나팔을 불며 함성을 질렀을 때에 성벽을 무너트렸다. 아이에서도 나는 함께 하여 저들에게 전략을 주었다. 그 이후의 모든 곳에서도 이스라엘이 나팔을 불 때마다, 나는 저들과 함께 하여 저들의 신이 되어 싸웠다. 저들은 나의 백성이요, 나는 저들의 하나님이다. 우리는 저들이 매주 있는 안식일과 매달의 첫날에 저들이 나팔을 불 때에 함께 했다. 그리고 매일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부는 나팔에 우리는 함께 했다. 그 나팔의 소리와 그들이 우리를 생각하여 찾는 것에 함께 하여 어린양의 피와 함께 저들에게 강림했다. 우리는 언제나 저들과 함께 하고 저들을 우리의 눈동자와 같이 보호했지만 우리는 특별히 저들이 나팔을 불며 우리를 찾을 때에 마음이 동하여 아픔과 열정과 사랑과 다급함을 가지고 저들과 함께 했다. 이것이 우리의 임재다.
그런데 왜 나팔이었겠는가? 그 도구가. 그것은 나팔이 멀리 모든 사람들에게 들리는 도구였기 때문이다. 나팔을 부는 자뿐만 아니라 멀리까지 전해지는 나팔의 소리를 듣는 모든 자들마다, 나팔을 불 때에 우리가 자신들, 이스라엘을 기억하리라는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팔을 임재를 요청하는 간절하고 절박한 도구로 이스라엘에게 주었다.
우리는 항상 저들의 편이었으며 저들이 범죄 할 때에도 저들이 죄를 깨닫도록 도왔다. 그것이 징계나 심판의 형식이 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저들을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저들을 회개시켜 구원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따르는 자들에게 우리의 임재는 축복이었지만 우리를 거역하는 자들에게 우리의 임재는 심판이었다. 우리를 거역하는 중에 우리가 임한다는 것은 저들에게 심판이 다가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인용한 출 19장에서 우리가 시내산에 임재했을 때에 이스라엘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모세조차 두려움에 떨었다. 하늘을 덮은 흑암과 검은 구름들에 숨을 죽였다. 그 검음을 배경으로 불타 오르는 산과 번개의 번쩍임은 모두를 공포에 떨게 하기에 충분했다. 만유의 주가 임재하였는데 그것 조차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사실 나의 모든 능력으로 그곳에 우리가 임재하였다면 이스라엘은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우주의 어떤 것이라도 티끌조차 보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앞에서 어떤 존재가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은혜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임재한다는 것은 피조물에게는 심판이다. 특히 죄인에게는 말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시작하는 저주의 시작이다. 거룩한 우리의 앞에 선 죄인은 발가 벗겨지며 그 속의 모든 추함과 더러움이 흘러나와 우리의 앞에 나열된다. 어떤 것은 사진과 같은 이미지로 어떤 것은 동영상으로 어떤 것은 음성으로 녹음되어 재생된다. 심지어 그것이 보이고 들려지는 순간 그 모든 말과 행동들의 의도가 모두 드러나고 모두에게 알려지게 된다. 그 어떤 것도 감출 수 없다. 그 감추인 모든 것이 드러날 때에 인간은 자신의 비참한 존재의 밑바닥을 보게 된다. 그 속에서 인간은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드러낸 우리를 향해 이를 갈고 달려든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광채 앞에 순식간에 불타 탄화되고 그리고 그것도 흩어져 사라진다. 그 인간도 크기를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불타는 연못에 들어가게 된다. 불타는 연못은 옛 하늘과 옛 땅을 삼키고 우주의 모든 것을 삼킨다. 그것을 마지막 심판이라 부른다. 그 일을 향해 우주는 달려가고 있다.
나팔은 이러한 우리의 임재를 알리는 도구다. 나팔을 불 때에는 모든 이스라엘이 우리가 이스라엘을 기억한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저들은 우리가 자신들과 함께 함을 깨닫게 된다. 출 19장 이후의 시내산 사건에서는 이스라엘은 두려움에 산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된다. 저들은 죽음이 두려워 자신들에게 직접 말하지 않기를 간청했다.
Exodus 20:19 바른
모세에게 말하기를 "당신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면 저희가 듣겠으니,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직접 말씀하시지 않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Hebrews 12:18-21 바른
너희가 이른 곳은 만질 수 있는 불붙은 산과 어두움과 흑암과 폭풍과, 나팔 소리와 말씀하는 음성이 아니다. 그 소리를 들은 자들은 자신들에게 더 이상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간청하였으니, 이는 "짐승이라도 그산에 이르거든 돌에 맞아 죽게 하여라." 하신 명령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보이는 것이 얼마나 두려웠던지 모세도 "너무나 두렵고 떨린다."라고 말하였다.
이렇게 우리의 임재는 두려움을 부르고 임재 자체가 심판이 된다. 시내산에서도 거대한 나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매년 7월 1일, 나팔절은 마지막 심판의 나팔을 상징하는가? Hebrews 12:18-21의 다음 구절들을 보라. 과연 어떻게 보이는가?
Hebrews 12:22-29 바른
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 곧 하늘의 예루살렘과 무수한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총회와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온전하게 된 의인들의 영들과, 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님과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려진 피이다. 너희는 말씀하시는 분을 거역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만일 땅에서 경고한 자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다면,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시는 분을 배척하면 우리가 어찌 피할 수 있겠느냐? 그때에는 그 음성이 땅을 진동시켰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약속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또 한 번 땅뿐만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시킬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또 한 번'이라는 말씀은 진동하지 않는 것들을 남아 있게 하시려고 진동하는 것들, 곧 창조된 것들을 옮기실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하지 않는 나라를 받았으니, 감사를 드리자. 그리하여 경건함과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자.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히 12:25에서 만일 땅에서 경고한 자는 모세다. 또한 하늘로부터 경고하는 자는 나 예수다. 모세의 시대에는 시내산에서 우리가 강림함으로 나팔 소리와 음성이 땅을 진동하게 하였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광야의 백성들을 두려워 떨게 했다. 우리의 음성과 천둥과 번개와 거대한 나팔 소리로 인해 백성들과 모세는 두려워 떨었다. 그런데 이것이 땅을 흔든 것인가? 구약 출애굽기의 어떤 기록에도 땅이 진동하였다는 말은 없다. 또한 신약에 나 예수가 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것이 하늘을 흔들리게 했는가? 진동하게 했는가? 또한 모세의 시대에나 나 예수의 시대에 심판이 있었는가?
너희가 성경을 읽을 때에 지혜롭게 생각하지 못한다면 내가 경에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닌 엉뚱한 것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