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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Oct 14. 2022

(1) 인자 아담의 후손

인자: 그리스도인

차례


서문: 인자의 기도


1. 인자: 권세자(첫 아담)

     (1) 인자 아담의 후손

              1) 구약의 인자

               2) LXX의 인자 

              3) 신약의 인자

     (2) 아담의 권세 사람의 권세

              1) 첫 번째 아담

              2) 하늘과 땅과 바다의 모든 권세 

              3) 권세의 상실

2. 인자: 권세 회복자(예수님)

     (1) 두 번째 아담

     (2) 두 번째 아담의 권세 

               1)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

               2) 바다의 권세가 빠진 이유

     (3) 예수님께서 신성이 아닌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으로 사신 증거들

               1)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심

                       A.  세례 시 너는 내 아들이다

                       B.  로마서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

                       C.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2) 인자가 죄를 용서하는 권세

               3) 안식일의 주인은 인자

               4) 예수님의 사역이 가능한 이유는 성령님을 한량 없이 부어주심

     (4) 예수님께서 회복하신 권세

3. 인자: 권세 사용자(그리스도인)

     (1) 인자 아담의 후손

              1) 두 번째 아담과 새 피조물

              2) 에덴으로의 회복

              3) 인자 아담의 후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

                      A. 하나님의 보좌 우편(스데반)

                      B.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최후의 포석

                      C. 요셉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

                      D. 모세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The Prophet)

                      E.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F. 다니엘 샤 한 샤 아래 최고 통치자

                      G. 십자가의 왕 예수님

                      H.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

                      I. 하나님의 형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A. 성경 속 하나님의 아들

                           a. 신약 성경

                           b. 구약 성경

                               a) 창세기 6장

                               b) 욥기

                                   ㄱ. 문자적 해석

                                   ㄴ. 문학적 해석

                                   ㄷ.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가?

                         B. 영원발생설의 오류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의 발자취

                         A. 인자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복음

                             a. 하나님의 아들 스데반

                             b.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 4 단계

                             c. 로마시대 이후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 종교개혁 부흥

                             d. 존 후스의 체코 부흥

                             e. 재세례파(침례교)의 순교의 피

                             f. 청교도 부흥

                             g. 존 웨슬리 시대의 부흥

                             h. 미국의 부흥

                             i. 조선 부흥

     (3)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

               1)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a) 자기노력

                               b) 자기의

                       B. 인본주의

                       C. 기복주의

               2) 거짓신앙의 심각한 폐해

                        A. 복음의 서진: 심각한 역사 해석 오류

                            a. 동양: 복음의 박멸

                            b. 서양: 복음의 변질

     (4) 살아있는 신앙

               1) 사귐이 있게 하려

               2) 사귐을 거부하는 신학적 오류

               3) 하나님의 임재

     (5) 1세기의 도전 - 1세기 거짓신앙

               1) 갈라디아

               2) 갈라디아 교회의 시작

               3) 율법주의-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신앙

                        A. 율법주의의 심각성

                        B. 율법의 본원적 기능

     (6) 우리시대의 거짓신앙

               1) 우리시대 거짓신앙

               2) 갈라디아 거짓신앙의 핵심- 율법주의

               3) 우리시대 거짓신앙의 핵심- 싸구려 신앙고백

               4) 십자가의 능력

     (7) 사명: 회복된 인자들에게 주신 태초 명령의 회복

                  마태복음 28장: 관계 지향적 지상명령

4. 인자: 권세 있는 심판자

           (다시 오실 예수님)




3. 인자: 권세 사용자(그리스도인)

(1) 인자 아담의 후손

1) 두 번째 아담과 새 피조물(아담의 후손) 

 예수님은 인간으로 성육신 하셨다. 바로 사람(히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두 번째 아담으로 오신 것이다. 왜 두 번째 아담이라고 불렀는가에 대한 부분은 이미 언급했다. 실패한 아담이 아닌 새 아담 즉 새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아담 즉, 두 번째 아담인 것이다. 

사람으로 오신 이유는 죽음이 두려워 평생에 육신에 매여 종노릇 하는 자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스스로 대제사장이 되시어 자신의 몸으로 단번에 완전한 속죄와 화목을 이루셨다(히 5:1~9)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 되었지만 두 번째 아담 안에서 모든 믿는 자는 의인이 된다. 첫 사람 아담은 육을 입은 사람이었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시어 신령한 몸으로 거듭나셨다. 부활하시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우리도 결국에는 첫 아담의 몸을 벗고 예수님 안에서 신령한 몸을 입고 만물 위에 교회로 즉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물을 다스리는 자리로 가게 된다(행 6~7장, 엡 1장) 이제 우리는 첫 아담 안에서 실패한 죄인들이 아니요 두 번째 아담 안에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만유의 통치자이신 예수님의 몸이 되어 함께 하늘에서 만유를 통치하는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하나님의 아들)과 독사의 새끼

 아담의 후손들은 원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었다. 그러나 원수에게 속아 타락한 이후에는 독사의 새끼들이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들과 독사의 새끼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표현이다. 이런 대조를 잘 보여주는 본문이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시고 시험을 받으시는 장면에 등장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등장하시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독사의 새끼들로 등장한다. 세례 요한은 회개하러 온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 세례를 받으러 왔는데 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하면서 그들을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 역사상 가장 경건했던 부류였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불렀다면 회개하지 않은 우리들을 향한 호칭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말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었다. 교회 안에서 가장 경건하다는 부류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다. 교회 밖에 있는 자들에 관하여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말할 필요도 없이 어둠에 속한 자들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지만 어둠에 속한 자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 그리고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 주어진 사도 요한의 그 말씀과도 같은 맥락의 판단인 것이다. 그 판단의 목적은 단지 정죄를 위한 것이 아니요 돌이켜 회개하여 살 길을 얻으라는 긍휼의 선포인 것이다.

 우리는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두 번째 아담에게 속한 새로운 아담들(사람들)이 된다. 첫 번째 아담 안에서가 아닌 두 번째 아담 안에서 신 인류(아담)가 되는 것이다. 새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다시 아담의 후손이 된다. 이전에는 우리는 타락하여 독사의 새끼들이었다. 그 독사의 새끼들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원수에게서 하나님의 아들로 돌이키는 길을 예수님께서 열어주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다시 아담의 후손이 된다는 것은 태초의 아담의 지위로의 회복인 것이다. 다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존재로 하늘과 땅을 다스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2) 에덴으로의 회복

새 하늘 새 땅 새 피조물


새 에덴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성경은 모두 태초에 창조된 때 하나님과 맺었던 하나님과의 관계로의 회복의 계획이요 그 성취를 말씀하고 있다. 새 하늘 새 땅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새 예루살렘(새에덴)에서 다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처음(에덴)으로의 회복이다. 에덴으로의 귀환이며 한 차원 더 깊은 은혜로의 새 언약인 것이다. 새 에덴으로의 침노인 것이다. 


안식

 하늘의 안식으로의 진입인 것이다. 조상들에게 예표로 주셨던 언약의 성취인 것이다. 조상들이 받았던 언약은 이 현세에서의 땅이 아니었다. 영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통치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아들들 장자들 상속자들로 부름 받는 것이었다. 그 땅 가나안은 단지 예표의 현현에 불과했다.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만이 완전한 안식을 줄 수 있다. 그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로의 회복이 성경의 마지막인 계시록인 것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이 성도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주시고 완전한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쉬게 하시는 그 안식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독사의 새끼인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회복되는 것은 이러한 안식으로의 초대인 것이다.


새 피조물

그리고 첫 사람 아담의 첫 몸은 실패했지만 두 번째 몸으로 화하여 새 피조물로 영의 몸이 되신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들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정되는 회복인 것이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힘입어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 예수님의 영광과 권세를 양자인 우리가 황송히 누리는 것이다. 


새 관계-하나님과의 친밀함

 죄인인 우리가 감히 하나님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로 서로 사랑으로 친밀해지는 것이다. 신랑과 신부로 세상이 알 수 없는 극도의 친밀함으로 서로의 마음과 마음이 하나 되는 것이다. 그 사랑의 밀월의 예표가 아가서인 것이다. 그 아가서의 사랑의 관계와 같이 하나님과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이미 그러나 아직

 이러한 회복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직 최종적인 완성에 이르지는 못했다. 예수님의 초림과 예수님의 재림의 사이에 있는 우리의 위치는 이미 그러나 아직이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회복이 시작되었지만 그러나 아직 최종적인 완성에는 이르지는 못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서 인자 아담의 후손의 지위를 누린다. 그러나 아직 아담의 후손을 통한 이 세계의 통치가 땅의 모든 곳에 적용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 심판 때에는 악인들은 심판을 받아서 불못에 갇힐 것이다. 그리고 새 하늘 새 땅에는 믿는 의인들만 남아서 모든 곳에 하나님의 통치가 임할 것이다.


이미 주어진 완전한 권세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필요한 권세는 유보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권세는 이미 완전히 회복되었다. 예수님 안에서 하늘과 땅의 권세가 모두 주어졌다. 우리는 이 완전한 권세로 아담의 후손의 권세로 이 세계를 하나님께로 드리는 일을 하면 된다. 이 세계를 어떻게 하나님께 드릴 수 있을까? 이 세계는 하나님께서 아담의 후손인 사람들의 통치 아래 두셨다. 그러므로 그 땅의 통치자인 아담의 후손들을 하나님의 통치 아래 불러들이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그 사람들에게 속한 땅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데 그 핵심은 그 땅의 통치자들인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땅들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전도다. 그 전도를 외국에 나가서 하면 선교가 된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전도와 선교에 모든 힘을 쏟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충성하는 착한 종이 되는 것이다.


3) 인자 아담의 후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


하나님 보좌 우편

 아담의 후손 즉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사도행전 6~7장은 스데반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다. 스데반의 순교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장면들과 많이 겹쳐진다. 예수님 때도 스데반과 같이 거짓 증인들을 사서 거짓으로 참소했다. 스데반에게 참소한 내용과 예수님에게 참소한 내용도 거의 같다. 심지어 예수님의 마지막 십자가상에서의 말과 스데반의 순교의 마지막 말도 거의 같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34[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다. 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들을 나누었다.(눅 23:34 바른)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씀하셨다.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누가복음 23:46 바른)


스데반의 마지막 말

59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니, 그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60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잠들었다.(행 7:59-60, 바른)

 

 또 죽음의 원인이 되는 말들도 비슷하다. 사도행전 7:55~56에서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라고 스데반이 말을 하고 그 말과 동시에 유대인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자신들의 귀를 막고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읍 밖으로 끌어내고 돌로 스데반을 쳐서 죽였다. 이 한마디의 말이 스데반의 죽음을 불러왔다. 예수님께서도 인자가 보좌 우편에 앉게 될 것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말하심으로 성문 밖에서 마지막 십자가형에 처해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부른 결정적인 말씀

 

69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자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다."

70그러자 모든 이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그이다."라고 하시자,

71그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 우리가 이 사람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라고 하였다. (눅 22:69-71 바른)


스데반의 순교를 부른 결정적인 말

55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56그가 말하기를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 하니,(행 7:55-56, 바른)


 물론 그 이전에 여러 가지 말씀하신 것도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십자가형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을 말한 것이었다. 이것이 무엇이 문제이기에 유대인들이 이렇게 발악을 하며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인 것일까? 먼저 이 세대의 사람들이 인자라는 단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아야 한다. 인자는 앞에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시고 고치신 사건을 다루면서 해석했듯이 일반적인 사람 즉 인류를 사람을 뜻하는 단어로 유대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과 보좌를 나란히 하고 그 오른쪽에 앉는 것이다. 이것은 신성모독이다. 어떻게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나란히 앉는다는 말인가? 사도바울은 유대교에 있을 때의 자신의 열심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스데반의 처형 현장에서 청년들이 그 겉옷을 놓아 맡긴 자가 바울이었다.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한 산헤드린에도 있었다. 이 두 장소에서 모두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단죄하는데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들이 인간으로 받아들인 분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분은 참으로 아담의 후손 인간이셨다. 그리고 인간의 몸을 입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이것은 신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신데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 앉으신 분을 지칭하는 용어가 하나님이 아니고 아담의 후손 즉 인간이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갈릴리 출신 평범한 이웃집 목수의 아들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좌 우편 즉 하나님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자격으로 그곳에 앉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즉 사람으로 오신 분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말해지고 있는 부분인 것이다. 최소한 그 시대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이 받아들인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고 받아들였다는 것이다.[1]


왕의 보좌 우편

 먼저 성경에서 왕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에 대해 언급한 다른 본문들을 살펴봄으로 그 뜻을 찾고자 한다. 

왕상 2:19 바른

19밧세바가 아도니야를 위하여 부탁하기 위해 솔로몬 왕에게로 나아갈 때 왕이 맞이하기 위해 일어나 굽혀 절하고 자기 보좌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왕의 어머니를 위해 한 자리를 마련하여 자기의 오른쪽에 앉게 하였다. (왕상 2:19, 바른)


 솔로몬이 자신의 어머니 밧세바를 위하여 자기의 오른쪽에 한 자리를 마련한다. 이것은 왕의 어머니를 앉히는 자리인 것이다. 왕의 오른쪽에 앉는 자의 신분을 짐작하게 한다. 왕의 어머니는 왕보다 지위가 높은가? 사실 법적으로 왕의 어머니가 왕을 능가하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왕이 예의를 갖추고 대해야 하는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사실 왕보다 높지만 정치적 영역에서 왕보다 높지는 않은 것이다. 사실 이런 관계들은 우리가 뭐라고 정확히 말하기에 쉽지가 않다. 왕이 존대를 하고 왕이 자신보다 높은 대우를 해주는 사람임은 틀림없다. 이런 경우 개인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110:1,5, 바른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받침대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하셨습니다.

…………….

5주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 분노의 날에 왕들을 치시고

( 110:5, 바른)


 여기서 오른쪽에 계신 주께 여호와께서 ‘앉아 있어라.’하고 명령법을 쓰신다.

오른쪽에 앉았고 호칭은 두 분 모두 ‘주’이지만 한 분이 다른 분에게 명령하고 계신 것이다. 이 관계가 동등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명령이지만 일반적으로 동등한 관계에서도 이런 ‘앉아라’ 하는 말을 쓰기도 한다는 것도 고려해보아야 한다.

 그런데 너는 멜기세덱과 같은 영원한 제사장이다라고 하심으로 이 관계가 단순히 동등한 관계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이 관계도 동등한 관계에 대한 표현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이 관계는 하나님과 메시야이신 예수님에게 적용되어진 것이다.[2]


 이 관계에서 신격이신 두 위격의 하나님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와 사역적인 공적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관계가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이 본문에서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것이 된다. 그러면서 그 인자는 또한 하나님과 같은 주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다윗의 자손인데 다윗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향해 주라고 부르느냐 즉 여호와께서 내 주(그리스도)께 라고 했느냐라고 질문을 하실 때 인용하신 본문도 이 본문이었다. 유대인(바리새인)들이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3]


 예수님은 그 시작도 끝도 없는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하나님이신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 그 자체가 사실 인간의 이해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우리가 그냥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할 수 없는 은혜를 헤아리지는 못한다. 이 부분을 어느 날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셨을 때 말로 할 수 없는 그 은혜에 감격하여 몇 시간을 울었다. 그 후로도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감격으로 죄인은 항상 감격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 오셨기에 일어난 신비이기에 인간이 그 깊이를 미루어 짐작하기에 한계가 있다. 

 20:20-21 바른

20그때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가 아들들과 함께 예수께 다가와서 절하며 무엇인가를 요청하였다.

21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니, 그 여자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 중 하나는 주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말씀하소서."( 20:20-21, 바른)

 

 여기서도 예수님과 동등한 관계로 앉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지위가 결코 일반적인 신하의 자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최소한 왕의 사촌이나 그 이상 되는 자리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왕과 완전히 동등한 자리는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25:33-34 바른

33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둘 것이다.

34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자들에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아, 나와서 세상의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상속하여라. ( 25:33-34, 바른)


 여기서는 왕의 오른쪽 자리에 앉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오른쪽에 두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오른쪽 보좌에 앉는 것과는 다른 표현인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본문들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왕의 오른쪽에 앉는 것은 왕과 같은 귀한 신분인 것은 확실하지만 왕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때로는 왕보다 친인척 관계에서는 상위에 있는 사람일 수도 있지만 법적인 지위로는 왕의 신하인 사람들이 앉는 곳이다. 때로는 왕의 어머니와 같이 왕보다 더 높은 분이 앉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다른 나라의 왕과 왕이 서로 보좌를 나란히 하고 앉을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서로 대등한 지위에서 서로 같은 높이에 같은 자리에 앉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누가 누구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개념은 없을 것 같다. 누군가의 오른쪽에 앉는다는 것은 그 누군가가 중심이고 왕이라는 뜻이다. 물론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만 왕의 왕, 만 주의 주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 계시고 그 우편에 앉는다는 것은 엄청난 영광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그 우편에 앉는 것은 하나님으로 앉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약 하나님으로 앉는다면 우편이 아니라 나란히 또는 옆에 앉는다고 표현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대등한 왕과 왕 사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신성모독

유대인들이 말한 것과는 다르게 인자가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은 신성모독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 하나님의 보좌 오른쪽에 앉는 것은 영광의 자리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서 그 자리에 앉으신 분은 원래 그 본질이 하나님이신 3 위격 중 한 위격의 하나님 예수님이심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의도는 신성모독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의 의도와는 달랐던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스데반에게 그러한 장면을 보이시고 감동하셨던 성령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주님과 인자

시편 110편과는 달리 예수님과 스데반이 죽음을 앞두고 이를 인용할 때에는 ‘주님(여호와님)과 주님’이라는 인칭을 쓰지 않고 하나님과 인자라는 용어를 썼다. 이것이 특이하다. 사실 여기에 하나님의 의도, 예수님의 의도, 성령님의 의도가 있는 것이다. 시편 110편은 주께서 내 주님의 우편에 앉으시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에도 계시의 점진적 발전이 있는 것이다.

첫 번째는 최소한 신적인 두 분의 관계인 듯하다. 그러나 두 번째는 인자와 하나님 즉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묘사되어진 것이다. 사실 시편 110:4절에 여호와께서 그 오른쪽에 앉으신 주님께 멜기세덱과 같은 제사장이라 칭하신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시편 110:4절은 제사장인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로 시편 110:1절에서 보다 명확한 형태로 표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에 대한 표현은 시편 110:1절을 다르게 인용한 것이 아니라 동일한 맥락에서 인용한 문맥적 인용이 맞는 것이다. 


최후의 포석

 그런데 왜 ‘주(여호와)께서 내 주께’를 ‘하나님과 인자’라는 용어로 표현했을까? 그것으로 인해 신성모독이라는 참람한 평가를 받아 순교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데도 이러한 표현을 사용한 데에는 하나님의 의도가 포함되어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마지막 최후의 포석이 바로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을 살펴보겠다. 먼저 시편 110편에서 여호와님의 우편에 내 주께서 앉으시는 장면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10:1-7 바른

 

R  

1~2 여호와께서 내 주님(멜기세덱, 의의 왕)을 왕으로 삼으시고 원수들을 다스리게(밟게) 하심

1[다윗의 시] 여호와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 받침대로 삼을 때까지 내 오른쪽에 앉아 있어라. " 하셨습니다.

 

2여호와께서 시온으로부터 주님의 능력의 지팡이를 보내실 것이니, 주님은 그 원수들 가운데서 다스리소서.

 

M  

3~4 제사장 멕기세덱 백성은 자원헌물, 초태생의 대속물을  주님께 드림(히브리어 참조)

3주님의 권능의 날에 주님의 백성은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주님의 청년들이 새벽이슬같이 주께 나옵니다.

 

4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다." 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 것입니다.

 

 

r  

5~7 공의의 왕(멜기세덱)께서 원수들을 밟으심

5주님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 분노의 날에 왕들을 치시고 6민족들을 심판하셔서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며 넓은 땅의 우두머리를 치실 것입니다.

 

7그분께서 길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 머리를 높이 드실 것입니다.

 

 R과 r로 표기한 부분은 원수를 정복하시고 다스리심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M으로 나타낸 부분은 제사장으로서 백성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부분이다.

이러한 구조는 아래와 위에 심판(정복과 다스림)을 그리고 가운데에 제사장의 직무를 두심으로 그 구조상 핵심이 제사장의 직무에 있게 되어있다.

 이 본문은 의의 왕이 제사장으로 백성들은 취하고 나머지 땅의 반역자들은 심판하신다는 내용인 것이다. 그중 핵심은 당연히 의의 왕(멜기세덱)이 제사장으로 백성들을 자원헌물과 초태생의 대속헌물로 취하심[4]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성경이 인용하고 있는 시 110:1절 ‘너는 내 우편에 앉아 있어라’는 정복과 다스림에 관한 부분이다. 즉 예수님을 통한 심판과 관련한 부분인데 그 시작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올려지심부터인 것이다. 또한 그 올려지심으로 심판을 위한 모든 근거가 완성되어짐을 뜻한다.

이에 관해서 구약의 예수님을 예표하는 본문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요셉과 다윗 그리고 다니엘을 통한 예표를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시는 장면의 뜻을 설명하겠다.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은 것을 봄으로 순교를 당한 스데반의 마지막 설교에도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버림받은 자들의 하나님 그리고 그 버림받은 자들의 왕 예수 그리스도님을 주로 삼으신 하나님을 설교한 스데반의 설교의 주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요셉 왕의 버금 수레를 탄 통치자


형제들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요셉은 아버지를 떠나 형들에게 버림을 받고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서 비참한 노예의 삶을 살았다. 어려서는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도 받았다. 요셉의 삶이 그 어린 시절의 목가적인 풍경으로 이어졌다면 행복한 생이었을 것이다. 그의 조상들은 계속 목자의 삶을 이어갔고 형들도 그런 삶을 이어갔다. 그러나 요셉에게는 가족들이 누렸던 평범한 일상이 허락되지 않았다. 요셉은 성경에서 가장 비참하게 버림받는 삶을 살게 되었다. 형제들이 죽이려고 달려든 것이다. 옳지 않은 시기심 때문에 그의 생명을 끊어 놓으려고 했다. 르우벤과 유다의 도움으로 목숨은 건졌지만 노예로 팔려 머나먼 땅 이집트로 끌려갔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신을 배신했을 때다. 다윗도 비슷한 고백을 했다. 자신의 벗이 자신을 해치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린다고 했다. 버림받는 고통은 인간이 느끼는 고통 중 가장 강렬한 고통이다. 가족을 잃었을 때도 사실 그 고통의 본질은 죽은 사람이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고통과 동일하다. 실연을 당했을 때도 그 고통의 본질은 연인이 자신을 버렸다는 버림받음에 대한 고통이다. 인간이 이러한 경우들에 느끼는 것은 존재를 거부당하는 거절감인 것이다. 그 거절감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 어떻게 저를 버리실 수 있습니까?’라고 고통을 쏟아놓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십자가 이후에 단 3일 만에 부활이 있을 것을 아셨다. 또한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속물로 단지 3 일 동안만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것을 분명히 인식하셨다. 그러나 그분의 입에서는 고통의 신음이 새어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바로 삼위 하나님 안에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하나이신 하나님 안에서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십자가형은 로마 안에서 받는 형벌 중 가장 극심한 고통을 동반하는 가장 비인간적인 형벌이었다. 그러나 그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한 것이 버림받는 고통이었다. 그 입에서 새어 나온 신음은 ‘아프다’가 아니었다. ‘어떻게 저를 버리실 수 있습니까?’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버리운 자였다. 그리고 온 세상이 버린 자였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셨다. 그래서 그분은 버림받은 자들의 왕이 되셨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요셉은 노예로 팔려가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주인의 인정을 받는 노예가 되었다. 자신의 최선을 다해 주인의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그 주인이 또다시 요셉을 버렸다. 거짓 모함에 대해 한 번의 확인도 거치지 않고 이집트 안에서 가장 악독한 감옥에 투옥시켰다. 왕에게 죄를 지은 자들이 갇히는 감옥이었다. 가장 큰 죄(대역죄)를 지은 대역죄인들과 같은 죄수의 자리에 버려진 것이다.


왕의 신하에게 버림받은 자 요셉

 거기서 그의 버림받음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라오의 술 맡은 신하에게 버려졌다. 목숨이 오가는 파라오의 재판을 앞둔 술 맡은 신하에게 꿈을 해몽해주고 그 대가로 자신의 억울함을 파라오에게 호소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신분이 회복이 된 술 맡은 신하는 요셉을 잊어버렸다. 버려져 감옥에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버려져서 잊혀진 존재가 된 것이다. 버려진 것도 억울한데 아무도 자신의 사정을 들어주는 자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온 세상이 버린 상태인 것이다. 버려져서 그 존재마저 잊혀진다는 것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의 비참함이다. 


온 세상이 버린 자 요셉

 술 맡은 신하에게 까지 버려져 모든 희망을 빼앗기고 가족과 세상에게 완전히 잊혀졌다. 그리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할 방법이 없었다. 그 말은 그 감옥에서 언제 나올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요셉에게 씌워진 누명대로 그 죄목이 확정된다면 그는 주인의 아내를 강간하려던 강간범이었다. 그는 평생 주인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가 바로(파라오)에게 호소하려 한 것도 그 주인 보디발의 권세를 능가해 자신을 자유케 할 수 있는 권세자가 바로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좌절되고 종신형을 살게 된 것이다. 아니면 최악의 경우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한 날에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한 곳이 요셉을 가둔 보디발의 감옥이었다. 그러한 절망의 기간이 만 2년이었다. 만 2년이라는 것은 그냥 2년이라는 표현과는 다른 표현이다. 그냥 2년을 꽉 채웠다는 뜻이다. 보통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1주일도 버티기 힘들다. 그곳에 살아남더라도 모든 소망을 잃고 죽지 못해 사는 삶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2년을 꽉 채웠다. 만 2년은 요셉의 절망에 완전함에 이르기를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2년이 완전히 찼을 때 요셉은 완전한 절망에 이르렀다. 그는 폐인이 되었다. 수염이 길어서 턱을 가렸다. 그 시대 사람들은 수염을 깎았는데 그는 수염이 턱을 가린 것이다. 그 표현 자체가 요셉이 만 2년 만에 절망에 이르러 폐인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죽음의 감옥에서 부활하여 왕의 버금 수레를 탄 자 요셉

 온 세상이 버린 자 요셉은 만 2년 만에 파라오의 부름을 받는다. 2 년을 꽉 채우고 나서야 왕궁에서 일이 벌어졌다. 파라오가 꿈을 꾼 것이다. 일곱(7) 마리 살진 암소와 일곱(7) 마리 마른 암소, 일곱(7) 잘 여문 이삭과 일곱(7) 여물지 못한 이삭에 대한 꿈을 꾸었다. 그리고 파라오가 그 꿈의 해석을 구하자. 술 맡은 관원장이 보디발의 감옥에서 꿈을 해석을 하던 요셉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요셉을 불러낸 파라오는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다. 그리고 파라오의 버금 수레를 태우고 요셉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렸다. 파라오의 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 꿈을 파라오에게 주지 않았다면 요셉은 평생 죽기를 기다리며 감옥에 있어야 했다. 


 이 장면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요셉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바로가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완전한 대리자로 신뢰했을까?라는 의문이다. 그 질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 째, 요셉은 다니엘과 같이 바로가 말하지 않은 꿈의 내용을 맞힌 것이 아니었다. 다니엘은 왕이 말하지도 않은 꿈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알게 되어 맞혔다. 그러나 파라오는 요셉에게 꿈의 내용을 맞히라고 문제를 내지 않았다. 그 내용을 스스로 다 말해 주었다. 여기서도 요셉은 파라오에게 특별한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왜 요셉을 특별한 존재로 인식했을까?


둘째, 요셉이 한 꿈의 해석이 맞는지 틀렸는지 아무것도 증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해석의 내용만을 듣고 바로는 요셉과 요셉의 꿈의 해석을 믿었다. 그 꿈의 내용대로 7년의 풍년과 흉년이 실제로 일어난 것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는 요셉의 꿈의 해석이 맞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요셉을 이집트의 총리로 삼았다. 그리고 파라오의 버금 수레를 태우고 요셉에게 최고의 지위를 내렸다. 파라오는 단지 2년 전에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꿈을 해석해준 대로 술 맡은 관원장이 다시 복권이 된 것 하나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요셉이 한 모든 말을 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로 믿었다. 어떻게 처음 본 요셉을 믿고 그런 대단한 권력을 맡겼을까?

파라오가 이렇게 행동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파라오의 행동을 잘 관찰하다 보면 우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파라오는 요셉에게 사브넷 바네아라는 이름을 주었다. 그 뜻은 ‘신이 말씀하신다. 지금도 말씀하신다’였다. 요셉의 입을 통해 나온 말은 신의 말씀임을 고백한 것이다. 요셉이 모세와 같이 지팡이가 뱀이 되는 기적을 보이거나 10가지 재앙을 일으키지 않아도 그의 말만 듣고 그를 신의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는 신의 대리자로 인정을 한 것이다. 모세를 대적한 후대의 파라오와는 대조되는 모습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선물인 것이다. 파라오에게 이런 믿음을 주신 분도 하나님이셨다. 파라오에게 꿈을 주고 그 꿈에 대한 요셉의 해석을 신뢰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셨다.


 요셉이 기근에서 온 세상과 이스라엘을 구하고 앞으로 출이집트할 때까지 300년이 넘는 시대를 준비하려면 파라오의 완전한 지지와 신뢰가 필요했다. 


 요셉은 마지막 2년을 감옥에서 세상에서 버려져 죽은 것과 같이 완전히 잊혀진 폐인으로 살다가 3년이 되는 날 파라오의 부름을 받았다. 파라오는 요셉을 감옥에서 건져냈다. 폐인이 된 요셉의 수염을 깎아주고 새 옷을 입혀 주었다. 요셉은 죽음과 같은 감옥에서 부활하여 파라오 바로 우편의 버금 통치자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죽으셨다.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표한 장면이었다. 


 예수님과 같이 요셉은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자신을 버린 자들에게 원수를 갚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보다 좀 더 나아가면 그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 그 정도만 해도 성인의 반열로 추대될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그 원수들의 생명을 대기근에서 구원한다. 그도 배신의 아픔을 아는 인간이었다. 이집트로 형들이 양식을 구하러 왔을 때 가장 이성적인 기질로 추측되는 요셉도 그 터져 나오는 원망과 아픔을 통제할 수 없어 통곡을 했다. 그러나 요셉은 예수님과 같이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을 산 요셉은 그 삶의 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음을 알았다. 그는 앞으로 다가올 이스라엘의 후대 즉 출이집트(Exodus)까지를 믿음으로 준비하는 삶을 살았다. 그러한 삶을 살기 위해 그에게 필요한 지위가 바로 이집트의 총리였다. 바로 왕의 버금 수레를 탄 통치자가 된 것이다. 이 모습이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 모습이다. 그 자리는 요셉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지금 야망에 찬 자들이 서울대 법대를 가고 또 정계에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요셉에게는 처음부터 없었다. 그의 어미도 자식을 위한 최고의 스펙을 기도로 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구원자 예수님의 예표로서 구약의 이스라엘이 작은 부족에서 국가단위로 커지는 요람 역할을 한 이집트에서의 시기를 준비하는 구원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온 땅의 기근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했다. 그를 통해 온 땅이 구원을 받고 그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은 큰 민족으로 성장할 요람이 될 고센 땅을 얻었다. 이러한 세상의 구원을 위한 구원자로 그는 왕에 버금가는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것이 구원자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이유인 것이다. 사람으로서 사람의 대표가 되시어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위해 그 권세를 위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얻으신 권세를 동일하게 자기 백성들에게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인자로서 그 자리에 오르시어 동일한 아담의 후손들에게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된 자들에게 그 권세를 주시어 그들이 원수들을 이기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사람으로서 앉아 만물 위의 교회로 다스리는 것이다(계 3:21 바른성경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나와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나의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할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몸이 되어 하나님의 명령에만 복종하여 만물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것이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두 번째 아담에게 속한 아담의 후손들이 할 일들이다.


모세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The Prophet)


나면서부터 버림받은 자 모세

 모세는 나면서부터 버림을 받았다. 그의 출생은 파라오에 의해 금지되었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존재 자체가 부정된 것이다.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위협에 놓였다. 상담을 하다 보면 엄마의 태에서 낙태를 당할 위협을 받은 사람들은 그들의 깊은 곳에 사람의 만짐과 상담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지독한 거절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세상이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지독한 거절감에 시달린다. 그래서 사랑을 비정상적으로 갈구하게 되고 그 사랑을 얻기 위해 자신을 망가트리는 선택을 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을 거부하고 생명을 빼앗으려 했던 엄마와 비슷한 사랑을 줄 수 없는 대상을 골라서 사랑한다.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갈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대상을 골랐기에 더 큰 거절을 맛보게 된다. 그러한 잘못된 대상을 선택하고 버림받는 일을 반복해서 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생을 살면 살수록 더 망가져갈 수밖에 없다. 모세의 안에도 이러한 깊은 거절감이 있었을 것이다. 


부모와 형제에게 버림받은 자 모세

 히브리 산파들을 통해 많은 히브리인 사내아이들이 구원을 받았다. 모세도 레위인이었던 부모님의 목숨을 건 도움으로 출생과 동시에 맞을 죽음은 피했다. 그러나 아이가 커가고 울음소리가 커지면 더 이상 숨길 수가 없게 된다. 아이의 생명을 위해서라고 아이를 집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다. 갈대 상자에 석유가 포함된 코르타르를 발라서 물이 스며들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파라오의 공주가 목욕하는 나일강의 목욕탕 조금 위에서 아이를 물에 버렸다. 버렸으나 버리지 않았으니 그 아이의 생명이 불안해서 들켜도 의심받지 않을 자신들의 어린 딸 미리암을 시켜서 아이가 공주에게 잘 도착하는지 지켜보게 했다. 아이는 공주의 양자가 되었지만 결국 부모와 형제에게서 버려져 고아가 된 것이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온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 모세

 공주의 양자가 되어 이집트의 왕자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고아였다. 고아가 입양이 되었다고 고아가 아닌 것은 아니다. 양부모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양부모다. 그는 파라오의 다른 왕자들과 다른 대우와 다른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모가 된 친모를 통해서 자신이 히브리인임을 알게 되었지만 히브리인의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 수는 없었다. 그런 정체성의 고민을 하던 중 자신의 백성 히브리인의 고난을 보았다. 한 형제가 억울하게 매 맞는 것을 보다 견디지 못한 모세는 우발적인 살인을 저질렀다. 그런데 그가 구해주었던 그 히브리인 형제가 자신을 배신했다. 자신이 이집트인을 살해한 것을 공개적인 장소에서 떠벌렸던 것이다. 아무리 다른 히브리인과 싸움 중이라 흥분했다 하더라고 그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을 도와주었던 모세는 체포되어 사형당할 것이라는 걸 생각해야 했는데 그는 너무 쉽게 입을 열어버렸다. 이제 모세는 죽게 되었다. 


죽음에 버려진 자 모세

 모세의 인생에 죽음의 위험은 항상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태어나자마자 그는 왕의 명령에 의해 죽음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갓난쟁이로 부모의 곁을 떠나 양모인 공주에게 가는 길에도 그는 물에 의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공주에게 발견되었을 때도 히브리인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를 죽일 수도 있었다. 죽음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그 죽음의 위협에 그는 급히 이집트를 떠났다. 


문명에서 버려진 자 모세

 파라오가 그를 채포 하여 죽일 것이기에 이집트의 힘이 닿는 모든 곳을 떠나야 했다. 모세는 이집트의 힘이 미치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모든 지역을 떠나야 했다. 그는 도시에서의 안락한 삶에서 떠나야 했다. 자신의 유모였던 어미를 떠나야 했다. 파라오의 공주였던 자신의 양어머니를 떠나야 했다. 자신의 형제 아론과 미리암을 떠나야 했다. 자신이 지금까지 왕궁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떠나야 했다. 그뿐 아니라 문명의 혜택을 조금이라도 받을 수 있는 모든 도시를 떠나야 했다. 척박한 미디안 광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모세는 자신이 알던 모든 세상에게 버림받은 자가 되었다.


세상이 버린 자를 세상의 구원자로 삼으신 하나님

 모세는 세상에서 버림받고 40년을 미디안에서 목동으로 지냈다. 청장년 시절의 민족을 향한 열정도 80이 되니 모두 사그라들었다. 하나님이 모세 자신의 민족을 구원하러 가라고 해도 그는 반복해서 거절했다. 그는 살았으나 그의 꿈과 열정은 이미 죽어버린 죽은 자였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를 일으키셔서 이스라엘의 The Prophet이 되게 하셨다. 심지어 예수님에 대한 예언을 한 본문에서 모세가 예수님을 나와 같은 선지자라는 표현했을 정도다. 가장 큰 하나님의 기적과 이스라엘이 처음으로 민족으로 형성되게 한 가장 위대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그를 통해서 나타내신 크기의 역사는 구약의 어떤 다른 선지자를 통해서도 나타내신 적이 없다. 그는 버림받은 자였으나 자신을 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 오른편에 앉은 것처럼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보는 선지자요 통치자가 되었다. 그의 모든 고난은 자기 백성을 구하기 위한 길을 예비하는 길이 되었다. 자신이 40년 동안 살면서 훈련받은 그곳에서 그는 40년을 자기 백성을 이끌었다. 광야는 죽음의 길이지만 그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에 이른다. 이러한 참 구원의 길을 나타내는 선지자로 그는 이스라엘에 왕 같은 선지자가 되었다.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다윗은 왕궁에서의 천 날보다 성전 문지기로의 하루의 삶을 사랑했다. 그는 하나님께 사랑받은 자였다.[5]

그리고 그 사랑을 받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했다. 그 하나님을 알고 그분의 아름다움을 알기에 그는 하나님을 사랑했다. 


버림받은 자 다윗


아비가 버린 자

 다윗은 아비 이새에게 버림받은 자식이었던 듯하다.[6]

어미는 죄 중에 다윗을 잉태하였기에 다윗의 편이 되어줄 수 없었다. 이것을 증거 하는 흔적이 성경 여러 곳에 보인다. 어린 막내를 양 치는데 보내는 아비는 없다. 그곳은 광야다. 언제 비탈 절벽에서 양과 함께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곳이다. 또 곰과 늑대와 사자의 위험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양치기들은 홀로 양을 치지 않는 것 같다. 그런 위험한 곳에서 다윗은 버려지듯 양을 지키고 있었던 것 같다. 다윗이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와 싸웠다는 것은 다윗의 용맹을 증명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다윗의 절박한 처지를 반증하는 증거이기도 하다. 어떻게 어린아이가 양을 위해 사자에게 달려들 수 있었을까? 그만큼 절박해서였을 것이다. 그 양을 잃었을 때 그에게 쏟아질 형들과 아비의 비난은 죽음의 공포보다 더 무서웠을 것이다. 


 이를 증거하는 장면들이 성경에 등장한다. 골리앗 사건에서 형들은 전장에 자신들을 위문 온 동생을 향해 교만와 방자함이라는 말도 안 되는 평가의 비난으로 일관한다. 이때 다윗은 이미 사무엘에 의해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을 때였다. 형들의 반응은 왕으로 기름부음 받은 동생을 향한 반응이 아니었다.


 또한 어린 자식을 전장에 보내는 아비는 없을 것인데 이새는 다윗에게 치즈 덩이와 음식들을 주면서 형들을 보고 오라고 한다. 형들의 안위는 중요하지만 어린 다윗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 군의 진영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고 종과 함께 따로 다닌다. 그렇게 따로 다니다가 적군에게 잡히거나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전쟁터의 상황은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다윗이 가는 길이 언제 전쟁터로 변할지 모르는 것이다.

 또 유목 민족의 특성상 잘 훈련된 정찰 기병들이 항상 전장을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은 따로 훈련시킬 필요도 없이 유목을 하며 말이나 낙타를 타고 다니며 살아온 그대로 타고난 정찰대들이었다. 이런 기마 정찰 부대를 보고 유럽도 따라 한 것이 동유럽의 후사르다. 정찰 부대들이 항상 주시하고 있는데 전쟁터에서 아군의 진영에서 따로 떨어져 이동한다는 자체가 죽음 앞에 나아가는 어리석은 행동일 수도 있다. 전쟁터에서는 차라리 군대의 진영 안에 있어야 안전하다. 그곳에서는 따로 적군에게 사로잡히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은 없다. 단지 군대와 군대의 싸움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위험한 전쟁터 한가운데로 어린아이를 군대와도 떨어져 따로 다니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친자식들이라고 여겨지는 다윗의 형들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자기 아들이 아닌 어린아이를 보내는 것이다. 이런 아비는 없다. 이것은 아비가 자식에게 하는 행동이 아니고 아비가 종에게나 하는 행동일 것이다. 만일 아끼는 종이라면 종에게 조차 이런 위험한 일을 맡기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 자식으로 데리고 있지만 자기 자식이 아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는 것 같은 행동들이다.


 또 이 일 전에 사무엘이 아들들을 찾았을 때에도 이새는 다윗을 부르지 않았다. 양들을 봐줄 사람이 없어서 막내가 지켰을 수도 있다. 그런데 골리앗 사건 때 보면 분명 다른 양치기들이 존재한다. 다른 양치기들에게 양들을 부탁하고 다윗을 부를 수 있었는데 부르지 않았다. 이것도 같은 것이다. 자식으로 여기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사무엘이 다른 아들에 대해 묻지 않았다면 이새는 다윗을 부를 생각이 없었던 듯하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전무후무한 사사요 선지자였던 사무엘에 의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도 형들과 아비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아비 이새는 위험한 곳에 아이 다윗을 보냈다. 결코 이스라엘의 왕이 될 귀한 아들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형들도 왕이 될 다윗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심지어 그냥 자신들의 동생으로도 사랑해주지 않았다. 골리앗을 죽이기 직전의 전장에서도 형들의 그 야유와 비난은 이어졌다. 골리앗을 죽인 이후에도 가족들의 평가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가족들의 비난이 다윗에게 양 한 마리도 잃으면 안 되는 절박함을 만들어 내었을 것이다. 상식적이면 자기 양이 죽더라고 그 양과 자신의 생명을 바꾸지는 않는다. 목숨을 걸고 어린아이가 양을 위해 싸울 만큼 양이 소중한 것이 아니다. 주변에 어른들이라도 있었다면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하는 다윗을 막아섰을 것이다. 양이 잡혀갔다고 해도 어른들이 그것도 혼자가 아니라 무리가 중무장을 하고 자신들의 안위를 돌볼 수 있을 때라야 사자에게 달려들어 양을 구하는 것인데 다윗은 맨 몸에 지팡이 하나와 돌멩이를 들고 달려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가족에게서 버려진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절박한 곳에서 다윗은 친구도 거의 없이 지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과 대화하고 하나님께 찬양을 드렸다. 그곳에서 사자와 늑대와 곰에게서 그리고 형들과 아비에게서 그리고 자신을 버린 세상에게서 어린아이 다윗을 구원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용사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다. 버려진 그곳에서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세상 화려함이 모인 왕궁도 그 세상의 본질을 알기에 사랑 없음을 알기에 시기와 질투, 그리고 신의 없음을 알기에 그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유일한 분 하나님의 집에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세상이 줄 수 없는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고 그 사랑에 감격하여 서는 것이 세상의 천 날의 영화보다 좋았던 것이다. 세상의 본질을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을 만나면 그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지… 그 하나님께 감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온 이스라엘에게 버림받은 자 다윗

 골리앗을 죽인 후 그의 삶은 더 큰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하나님의 원수를 처단했지만 그는 사울에 의해 전국에 수배가 내려진 죄인이 되었다. 왕의 명령에 의해 온 백성들이 그를 발견하면 신고해서 죽음으로 내모는 죄인의 처지가 된 것이다. 이제 가족의 버림뿐 아니라 온 이스라엘이 버린 자가 된 것이다.[7]

나중에는 이방의 왕 앞에서 미친 것처럼 침을 흘려야 목숨을 부지하는 처지로까지 떨어졌다.


버림받은 자들의 왕

 그런데 그 버림받은 자 다윗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목자 같은 왕으로 삼으셨다. 버림받은 그에게 버림받은 자들이 아둘람 굴에서 모여들어다. 그는 버림받은 자들의 왕이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그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그의 모든 고난은 스스로 길 잃고 버려진 하나님 백성, 즉 목자 없는 양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였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 땅 안에 있는 원수들을 정복하셨고 외부에 있는 적들도 정복하셨다. 다윗이 십자가와 같은 고난을 통과해서 마치 부활하여 살아나듯 기적적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 것은 하나님 백성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버려진 백성의 모습으로 오시어 고난을 당하시고 왕이 되시어 그 백성을 구하신 모습의 예표가 다윗인 것이다. 다윗의 승리는 인자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원수를 정복하고 그 백성을 구속하는 장면인 것이다.


다니엘 샤 한 샤 아래의 최고 통치자[8]

 우리는 다니엘과 같이 높은 자리에 올라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원한다고 소원한다. 교회에서 어느 집 아들이 명문대를 들어가고 대기업에 들어가면 축복받았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들이 다니엘과 요셉처럼 높은 자리에 올라가기를 바란다. 아니면 다윗 같은 왕이 되거나 또는 사도 바울 같은 멋진 전도자가 되기를 바란다. 다니엘도 요셉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그 삶이 우리가 그리는 삶과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버려진 삶을 살았다. 다니엘도 요셉도 다윗도 사도바울도 버려진 삶을 살았다. 하나님께 자기 십자가를 제외하고 성공을 꿈꾸는 기도를 한다면 그 사람은 우상숭배자다. 그런 기도를 드리려면 절에 가기를 추천한다. 무당에게 가서 굿을 하고 치성을 드리기를 바란다. 제발 교회에서 수능기도회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소원성취를 위해 일천번제라는 우상숭배를 하려면 절에 가서 천 배를 하기를 권한다. 제발 교회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기를 권한다. 이 말에 반발심이 일어난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않은 그리스도인이다. 그냥 추악한 탐욕에 젖은 입을 닫고 진정한 회개와 회심이 자신 안에 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하여 자기 영혼을 지옥에서 건짐 받기를 권한다. 하나님의 양이 되는 것은 세상의 적이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이해되지 않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런 기독교는 없다. 

세상이 사랑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세상이 사랑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는 지고 싶어서 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핍박이 함께 한다. 이 말에도 의문이나 반발심이 생긴다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당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당신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단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 필수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핍박인데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당신이 세상과 벗한 세상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을 위해서는 지옥의 불길만이 기다리고 있다. 당신이 목사이건 장로인 건 평신도이건 당신의 길은 지옥의 불로 달려가는 불나방의 길이다. 당신의 교회 전체가 이렇게 믿더라도 그 전체가 틀렸다.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게 믿더라고 그 전체가 틀렸다. 당신들 모두가 모여도 하나님 한 분을 이길 수는 없다. 겉으로 하나님 따르기 원한다고 하지만 속으로 당신들이 고난을 피하고 세상을 따르기 원한다면 당신들은 모두 지옥의 불쏘시개 일뿐이다. 당신들은 구원받지 못했다. 이 말을 대적하기를 원한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대적하는 것이다.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고백을 부인하는 것이다. 조셉 얼라인이나 리차드 박스터의 『회심하지 않은 자들에게 주는 하나님의 경고(Call to the unconverted)』를 한번 읽어 보기를 권고한다. 저 모라비안들의 저작들과 조지 폭스의 일기, 요한 웨슬리의 일기를 읽어보고 그들이 어떻게 거듭났는지 읽어보기를 바란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드를 통해 선포된 부흥의 시대에 회심을 독촉하는 경고의 메시지를 읽어보기 바란다. 참고로 조나단은 자신이 설교했던 교회에서 부흥 이후에 쫓겨났다. 진리를 선포한다고 항상 사람들이 환영하지는 않는다. 


 저 독일의 개혁자 루터가 어떻게 회심했는지 자세히 살펴보기를 바란다. 여러분은 루터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하나님의 의를 몰라서 그렇게 오랫동안 방황하며 자신의 죄를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길을 찾았다고 생각하는가? 그가 어느 날 롬 10:10을 성경 안에서 처음 발견하고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그는 신학교 교수였다. 그것도 그는 책을 읽으면 중요한 구절과 페이지를 외워버리는 탁월한 지성을 지녔다. 그런 그가 성경의 기본 진리를 몰랐겠는가? 그런데 그는 왜 그토록 고행까지도 자처하며 구원을 갈망한 것인가? 그는 수 천 km를 걸어가서 로마 교황청의 계단을 기어올라갔다. 그는 수많은 고행과 헌신을 자처했다. “자신의 구원” 오직 그 확신을 얻기 위해. 그러나 그는 그 믿음을 얻는데 실패했다. 자신의 모든 노력으로도 지옥의 불길로 인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자신의 바로 옆에서 벼락을 맞고 죽어간 친구가 간 그 길을 자신도 가야 한다는 두려움은 그를 공포에 떨게 했다. 루터처럼 고심해본 적이 없다면 단언컨대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신앙 고백자인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성경을 읽고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읽고 세례문답을 하고 세례를 받았을지라도 당신 안에 사람으로서는 생성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불덩이가 당신의 전생을 사를 정도로 타올라 당신을 휘몰아치지 않는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했다.


 그 선진들의 글을 읽고도 깨닫지 못한다면 그때는 생명을 걸고 일천번제를 드리며 기도하든 30일 작정 새벽기도를 하기 바란다. 40일 금식기도를 하기를 바란다. 그런 기도들은 이런 목적을 위해 하는 기도들이다. 당신들의 더러운 탐욕을 위해 하는 기도들이 아니다. 아니면 당신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중국 지하 교회의 윈 형제 그룹의 통곡하며 눈물이 터질 때까지 기도하고 예배하는 회심 집회에 가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복음 사자들을 통해 하나님의 기준을 듣고 자기 영혼을 위한 탄식으로 통곡이 나올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않기로 작정하고 기도하라. 그것이 당신이 살 길이다. 당신들이 교회와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기도해서 능력을 받고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고 성도들이 당신을 높이는 자리에 갔다면 당신들은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을 통해서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니다. 그 마음이 속에 숨겨져서 겉으로 말해진 적이 없어도 그것은 어둠에서 온 영적인 힘이다. 그 은사는 출처를 의심해봐야 한다. 당신의 길은 지옥의 길이며 당신을 추종하며 당신에게 복채를 바치는 자들도 지옥의 불쏘시개들이다. 이 말에도 의혹이 든다면 저 영국의 웨일즈 대부흥을 주도했던 에반 로버츠의 『성도들 안에 있는 전쟁(War on the saints)』을 읽고 깨닫고 돌이켜 구원받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당신들이 고난당하기 원하시지 않는다. 단지 당신들의 정체성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지는 순간 세상의 핍박은 함께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피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따르기를 원한다면 풀무 불과 사자 굴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바란다. 성경에 있는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의 가치를 알기에 하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면 하나님을 선택하라. 그렇게 하나님을 선택했을 때 당신은 진정한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것이다. 누군가 지옥의 불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세상의 모든 것 세상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평생 고난만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게 돌이켰다. 다시 세상을 사랑하여 탐욕으로 돌아갔다면 당신은 다시 빛에서 어둠으로 돌아가 지옥 행 하이웨이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길은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주신 죽음이 이르도록 돌이키지 않는 길이 아니다. 오직 비참한 인생의 처지를 인식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 하나님의 구원을 얻고 그 감격에 불타올라 사망의 골짜기도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고 수많은 영혼을 주님께 드리는 생명의 길이다. 


 이 글은 당신을 비방하기 위해 적은 글이 아니다. 그렇다면 특정인을 들어 비판했을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해 이 글을 쓴 것은 당신이 비난받지 않기 원하는 마음에서다. 순교의 현장에서 영문 밖에서 불사른 바 되신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면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한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 우리를 거듭나게 할 것이다. 사람으로서는 성경의 기준에 맞는 삶을 살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거듭나게 하시면 그 삶을 살아야 저녁에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이룰 수 있게 된다. 그 본질이 변화되어지는 것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삶은 사도행전에서 튀어나온 사람의 삶이 될 것이다. 우리의 교회와 옆 교회에서 우리들은 사도 바울들과 스데반들을 볼 것이다.


민족과 함께 버림받은 자 다니엘

 다니엘은 자신의 죄가 아닌 민족의 죄에 휘말려 포로가 되었다. 그 민족의 죄가 차면 죄인이나 의인이나 그 민족과 함께 심판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은 귀족들의 행렬에서 철사에 묶이고 코는 큰 낚시 바늘 모양의 갈고리에 뚫리고 옷은 벌거벗겨져서 알몸으로 포로의 길을 걸어서 바빌로니아로 끌려갔을 것이다. 행렬에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코를 뚫고 있는 갈고리는 코를 찢어놓을 것이 분명했을 것이다. 다니엘이 어린아이라서 코를 꿰뚫리지는 않았더라도 벌거벗겨져 철사 줄에 묶여서 갔을 것은 분명하다. 다니엘서의 초반에 다니엘이 포로로 끌려간 장면이 언급되지 않아 그 실상을 우리가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바빌로니아 포로로 버림받은 자 다니엘

 다니엘은 포로의 삶을 살았다. 그가 왕의 소년들로 뽑히고 총리가 되기도 했지만 그는 여전히 식민지에서 끌려온 포로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쓰임을 받는 것은 자신의 민족에게 잘못하면 매국노로 낙인찍힐 수 있는 일이었다. 일제의 앞잡이가 일제에 부역했듯 다니엘도 원수 바벨론에 부역한 매국노로 취급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그리고 바벨론과 이방 민족들에게는 일제가 조센징을 경멸했던 것처럼 경멸당했을 것이다. 일제시대로 치면 조선인이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 총독부의 수장이 된 것이 무슨 자랑이 되겠는가? 잘못된 시각으로 보면 다니엘은 그렇게 비춰질 수도 있는 삶을 살았다. 또 포악한 바빌로니아의 왕들을 생각하면 다니엘이 왕의 진미를 거부하고 신상들에 절하기를 거부한 선택은 사지가 사자에 의해 찢길 수 있는 죽음의 길이었다. 다니엘은 그 길을 포로의 몸으로 걸어갔다. 


죽음에 버려진 자 다니엘

 그는 높은 자리를 구한 적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높은 자리를 구하며 다니엘의 생을 바라보고 그 삶을 흠모한다. 그러나 다니엘의 삶은 대적이 호시탐탐 죽이려고 함정을 파고 기다리는 전쟁터였다. 처음 남 유다 왕국이 망하는 과정에서 그의 목숨은 위협을 받았다. 느부갓네살의 소년들로 발탁되었을 때 왕의 진미를 거부할 때도 그의 목숨은 위협을 받았다. 느부갓네살의 신상에게 절하지 않았을 때도 그는 풀무불에 던져졌다. 페르시아 왕 다리오(다리우스)의 시대에도 그는 왕에게만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의 삶은 항상 죽음에 노출되어있었다. 우리가 기대하는 총리의 부요와 힘의 편리성과는 거리가 먼 삶이었다. 그는 목숨의 위협 속에서도 항상 하나님의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풀무 불과 사자 굴과 같은 죽음을 선택하는 길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선택했지만 그에게 주어지는 것은 항상 죽음의 길이었다. 그는 바벨론과 페르시아라는 대 제국의 왕 중 왕들 아래의 최고의 통치자가 되어 영화를 누린 것이 아니었다. 항상 죽음의 칼날을 마주하고 서는 칼바람아래의 낭인 사무라이의 삶과 같은 삶을 살았다. 언제 길거리의 주검이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불확실한 내일을 품고 잠에 들어야 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들도 둥지가 있으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라고 하신 예수님처럼 의지할 곳이 없는 삶이었다. 자신이 있는 나라는 자기 민족의 나라가 아니었다. 적국에 포로가 되어 그곳에서 쓰임을 받더라도 여전히 경계의 대상이 되었고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언제든지 그 대적들의 음모가 목을 조여올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그는 대적들과 같이 불법과 거짓을 사용하여 대적들의 음모를 방어할 수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법 안에서 진실을 사용하여 움직여야 했다. 법정 공방을 벌여본 사람이라면 거짓의 올무 앞에서 진실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지 경험해보았을 것이다. 다니엘은 그것이 함정임을 알고도 그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했다. 왜냐하면 자신은 예루살렘을 향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절할 수 있는 신앙을 가졌기에 왕의 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거부하고 죽음으로 달려가야 했다. 다니엘 그의 삶은 화려한 권력자의 삶이 아니라 죽음에 버려진 삶이었다.[9]


 다니엘을 하나님은 샤 한 샤(왕 중 왕)라 불리던 제국의 황제들 아래의 최고 통치자로 삼으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준비하셨다. 70년의 형벌 이후 회복의 통로를 준비하신 것이다. 이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포로 귀환 칙령을 발표하게 하셨다.


이 것도 왕 아래의 최고 통치자 다니엘 즉 왕의 우편에 앉은 자와 같은 다니엘을 통해 백성을 구원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예표다. 그 구원을 위해 다니엘은 포로로 버려졌다. 그리고 사자굴과 풀무불에 버려졌다. 불사름과 같은 고난에 버려진 것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버려지셨다. 영문 밖에서 불사름과 같은 고난을 당하셨다. 그 버림받은 왕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왕이 되셨다.


십자가의 왕 예수님

 표면상 하나님의 가장 큰 수치는 십자가다. 이 관점은 세상적 관점이다. 세상에서는 그 누구도 실패한 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그곳에 무슨 영광이 있겠는가? 또한 사탄의 계략의 성공에 의해 하나님께서 실패를 당하고 죽임을 당하신 것이다. 이것은 사탄의 관점이다.

그러나 그곳은 진리의 관점 안에서 보면 하나님의 지극한 영광이 가장 빛나는 장소다. 그 어떤 존재도 미물을 위해 그리고 그 미물들에 의해 자신이 죽임을 당하는 자리에 자신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것은 가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땅을 기는 지렁이를 구하기 위해 교통사고를 감수하고 자신의 목숨을 잃었다면 그 죽은 자를 과연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신이 인간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도 그와 같다. 

그러나 그런 미물인 우리 인생들을 사랑해서 자신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인간으로 오시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죽음에 내어 놓음으로 그 죄에 대한 형벌의 대가를 지불하셨다. 그 죄의 육신을 멸하시고 승리하셨다. 그 사람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드님이 부활하셨다. 죄의 몸은 죽고 의의 몸으로 다시 사셨다. 하나님의 아들로 완전히 새롭게 나셨다. 그리고 그 최종 승리의 자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인간으로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자리에 오르신 것이다. 그래서 우리 인간들을 대신하셔서 원래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지위를 회복해주신 것이다. 이전에 그 지위를 가졌던 첫 아담은 실패하는 인간이었지만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완전한 분이시기에 타락하여 그 지위를 잃어버리실 수가 없다. 그래서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지위 즉 만물의 통치자로서의 지위는 견고하여 불변한 것이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

 이것이 사탄과 세상은 몰랐던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의 포석이었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인 것이다. 

십자가의 왕 그것은 수치가 아니다.

십자가의 왕 그것은 예수님의 지극한 영광의 이름이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께 속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었다. 만물의 통치자로의 지위도 회복이 되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아담의 후손으로 즉 인자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는다. 그 우편에 앉아 만물 안에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위해 기도하며 헌신하며 하나님의 온전한 종으로 자신을 산제사로 드린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른다. 지옥의 불길에서 구원해 주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더러운 죄인을 그 죄에서 구원해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날마다 감격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로 자신의 전생을 주님을 위해 드린다. 저 맨발의 전도자 최춘선처럼 세상은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이 가라시면 비방받는 표적 예수 그리스도님을 따라 고난에서 죽음으로 나아간다. 그가 무식해서[10] 그렇게 전도한 줄 안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길이 무엇인지 눈치조차 채지 못하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던지시는 불길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하나님의 마음을 멀리 떠난 사람들일 수 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강력하게 역사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의 길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길을 가지 않는다면 여러분 속에 주어진 하늘과 땅의 권세는 쓰임을 받지 못할 것이다. 

버림받은 통치자 십자가의 왕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에서 죽음으로 그리고 부활로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그 길만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정도다.


하나님의 형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하나님 보좌 우편의 통치자 아담

원래 하나님 보좌 우편의 통치자 자리는 아담의 자리였다. 그래서 성경에는 벤 아담 즉 인자를 하나님(엘로힘)보다 조금 못하다고[11]했다. 만물의 통치를 하나님께서 맡기셨다고 했다.[12]


이 표현의 다른 표현이 바로 하나님 보좌 우편인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의 거니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살았다.[13]


인자는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가 되어 하늘과 땅과 바다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렸다.


스스로 타락을 선택할 권세

 이 땅을 통치하는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인간이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을 선택한 것도 인간의 권세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자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원망한다. 하나님은 어떻게 처음 만들어진 순진한 인간들을 잘 보호하지 못하셔서 인간이 사탄에게 속아서 죄를 짓고 처참한 지경에 빠지게 하셨는가? 이것이 그들의 원망의 내용이다. 그런데 그런 원망은 그들이 인간의 타락에 대해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태초의 인간은 타락하기 전이어서 그 권세와 지혜가 지금의 인간과는 다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성령님께서 함께 하셨기에 모든 것을 통달하고 알았다. 솔로몬과도 비교도 할 수 없는 완전한 지혜와 명철을 소유했다. 자신이 마취되듯 자고 있었을 때 자신의 갈비뼈로 만든 여자를 만들었다. 그 후 여자를 보았을 때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그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보았다. 그 본질을 보는 눈으로 모든 동물의 이름을 지은 자가 아담이었다. 인간은 만물의 통치자였다. 우리가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인간은 티라노사우로스를 짐꾼으로 부리고 익룡을 타고 다녔을 수도 있다. 태초의 인간에 대해 이런 해석을 하는 학자들도 많이 있다. 그런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모든 것을 알고 한 행동이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거의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던 인간이 생각하기에 선악과만 먹으면 북극성에 올라 전능하신 자와 비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그 타락을 성경 여러 곳에서는 교만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결코 순진해서 사탄에게 당한 것이 아니다.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따르기로 결정했다면 피조물 중 그 어떤 것도 인간을 강제로 끌고 가서 하나님을 대적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악독한 인간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인간은 스스로 선택해서 하나님을 배신하고 악독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한 인간을 하나님은 사랑으로 대하셨다. 하나님은 그들의 명확하고도 그 증거가 확고부동한 반역의 죄를 묻지 않으셨다. 그들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했지만 하나님의 선택은 자기 자식인 인간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었다. 짐승의 피를 흘려 그에게 가죽옷을 입히셨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의 피를 흘려 의의 옷을 입히셨다. 그 누구도 자신의 자식을 죽음의 자리로 내 몰 수는 없다.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아이를 죽음에 내어놓지는 않는다.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다. 그런 사랑으로 하나님은 자신의 자식 인간을 사랑하셨다.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삼위 하나님 중 한 분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놓으셨다. 그것이 미물과 같고 안개와 같은 인생들을 위한 십자가의 사랑이었다. 십자가는 하나님 최후의 포석이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인간은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와 왕의 자리로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로 회복되어진다.



 [1] 사실 이 말씀은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은 하나님의 자리와 동일한 자리는 아니다. 그 자리는 하나님보다 못한 신하의 자리인 것이다. 동등하다면 왕과 같은 자리에 앉을 것인데 이미 중심이 왕좌로 정해지고 그 우편이라고 했으므로 왕의 자리는 아니다. 단지 왕과 아주 가까운 왕자나 왕비의 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왕의 사촌쯤의 자리가 될 수 있는 자리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은 하나님의 자리는 아니다.

[2]
히 5:6 (바른) 또한 이와 같이 다른 데서 말씀하시되 ″네가 영원히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셨으니
히브리서 6:20 (바른) 앞서 가신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곳에 들어가셔서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라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셨다.
히브리서 7:17 (바른) 이는 "너는 영원히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제사장이다." 라고 확증되어 있기 때문이다.

[3] 마 22:41-46 개정_strong
41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42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 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43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44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아래에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있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45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 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
46한 마디도 능히 대답하는 자가 없고 그날부터 감히 그에게 묻는 자도 없더라
 (마 22:41-46, 개정_strong)

[4] 이 해석은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함으로 취할 수 있는 해석이다.

[5] 다윗의 이름 뜻이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였다

[6] 어미가 죄 중에 잉태하였기에 다윗은 자식 취급을 받지 못한 듯하다. 위대한 왕 다윗의 어미는 그래서 성경에 이름조차 등장하지를 않는다. 추측 키로 간음으로 낳았거나 그 당시 자주 침략했던 암몬과 같은 이방 침략자들에게 몸을 더럽혀 다윗을 낳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실질적인 아버지가 이새라고 해도 유전자 검사를 하지 않는 한 그 친자관계를 입증할 수 없는 무언가 알 수 없는 사정이 있었던 듯하다. 삼하 17:25절에 다윗의 누이들인 스루야와 아비가일의 아버지가 이새가 아닌 나하스로 나오는데 삼하 17:27절 이후에 이 나하스가 암몬 사람이며 그 암몬 사람 나하스의 아들 소비와 함께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다윗과 그 백성을 먹인다. 백성들을 먹일 정도면 이들이 일반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던 듯하다. 삼하 10:2에 등장하는 나하스 왕의 아들과 그 주변인들인 듯하다. 그런데 나하스 왕은 이방 암몬의 왕이었다. 그의 아들이 다윗과 그 백성을 먹인 것도 그렇고 삼하 10:2절에 다윗이 나하스를 존경하여 그의 장례식에 사신을 보낸 것도 일반적이지는 않다. 다윗과 나하스가 의붓아버지와 아들 관계이거나 아니면 다윗의 친부가 나하스 왕일 수도 있는 것이다. 유대대백과에도 이런 주장이 나온다. 그리고 일부 랍비들도 이러한 주장을 하는 랍비들이 있었다(Nahash p142 Jewishencyclopedia)  이렇게 보면 성경에 나오는 이새의 납득할 수 없는 행동들이 이해가 갈 수도 있다.

[7] 물론 다윗이 사울 왕에 의해 쫓기게 되었을 때 가족들은 아둘람굴에 있는 다윗에게 내려갔다. 그러나 가족들이 다윗에게 갔다고 해서 다윗을 사랑해서 간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왕의 대역죄인이요 지명수배범인 다윗으로 인해 모든 가족이 위험에 처해졌기에 어쩔 수 없이 다윗과 함께 도망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증거하는 성경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아둘람굴에 모여든 자들은 정상적인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세상에서 지명수배 당하거나 버려진 자들이었다. 이런 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족들이 간 것이다. 결코 영화로운 자리로 나아간 것이 아니고 버림받고 쫓기는 도망자의 신세가 된 것이었다. 결코 목숨의 위험을 당하는 급박함이 없으면 가족들이 가고 싶지 않을 길이었을 것이다.

삼상 22:1-2 바른 
1다윗이 그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니,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거기에 있는 그에게로 내려갔으며,
2환난을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모두 그에게 모여들었고, 그가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니, 그와 함께 있는 자가 사백 명가량 되었다.

[8] 샤 한 샤는 페르시아어로 왕 중 왕이라는 뜻이다.

[9] 아마 우리의 어리석은 관점으로 이 시대에서 다니엘 같은 사람의 삶을 보았다면 우리는 죄로 인해 또는 조상들의 죄로 인해 저주받은 삶을 사는 줄 알았을 것이다.

[10] 그는 부요한 집안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일본 유학파 출신의 학자 풍의 사람이다. 그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그가 탁월한 지성을 소유했고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해석은 다른 곳에서 들어본 적도 없는 수준이었다고 증언한다. 그 증언을 하는 사람들도 일반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소유한 사람들이다. 그런 그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숙자의 모습으로 전했다. 

 그런 그가 집에서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때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영혼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체계적이고 정상적인 대화들을 나눴다. 부족한 지적 수준으로 인해 그렇게 광인처럼 외치고 다닌 것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쉽게 광인으로 보았다면 그렇게 본 사람들은 먼저 관찰력이 부족한 것이다. 그리고 성급한 판단을 내리는 급한 성격의 소유자들임에 틀림없다. 

 또 영적으로 죽어있거나 잠들어 있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김우현 감독의 팔 복 속에 나오는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는 영혼을 전율케 하는 힘이 있었다. 평생을 하나님을 향해 달음질했던 노 사도의 혼 속에서 나오는 기이한 힘이었다. 그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달음질을 해본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영혼의 힘이었다. 일상적인 말에도 강력한 성령님으로부터 오는 힘이 느껴졌다. 그리고 자신의 전생을 통해 하나님의 길을 추구한 흔적을 통해 뿜어져 나오는 깊이가 한 마디 한 마디에서 느껴졌다.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저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로 인해 사람들 속에 있는 그러한 것들을 볼 수 있는 감각이 발달했다. 그 안에 있는 것을 나는 세상의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했었다. 그렇게 꾸밈이 없고 온화하면서도 강력한 그 빛을 다른 곳에서는 본 적이 없다. 죠지 폭스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을 때와 같은 그런 감동이 있었다. 죠지 폭스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그것은 글들이었고 팔복 영상은 살아있는 인격의 실체였으므로 더 생생했다.

 하나님은 그 안에 있는 것을 사도들의 행전을 쓰시듯 김우현이라는 감독을 통해 기록하게 하셨다. 그 기록들에는 이 시대를 질타하는 그리고 깨워서 하나님께로 다시 돌이키는 강력한 메시지가 들어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그 전체 영상 속에 배어있어 마치 배경처럼 그려져 있었다.

[11] 시 8:5 바른
5주께서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습니다.

[12] 시 8:6-8 바른
6주께서 그로 주님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양 떼와 소 떼와 들짐승과
8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물길 따라다니는 것들입니다.

[13] 창 3:8 바른
8날이 서늘할 무렵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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