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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Nov 01. 2022

독자들에게 드리는 부탁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다. 예수님의 아들 호칭이 성육신 이전에도 적용되었다는 성경적인 근거나 예수님의 영원발생설, 성령님의 영원발출설의 성경적인 근거를 발견하면 언제든지 누구든지 급하게 저자에게 그 근거를 전달해 주기를 바란다.  제발 누군가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해 주기를 바란다. 언제든지 성경을 근거로 하여 이 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다. 저자는 빨리 받아들이고 발 뻗고 편히 잠들고 싶다. 사실 저자는 이 글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 언제나 원하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 고단한 몸을 누이고 밭 갈고 꽃 가꾸어 그 꽃을 보며 편히 소일하다가 빨리 주님 품에 안기고 싶다. 그 어린 시절만큼 순전한 행복을 누린 때가 없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건강상태의 저자가 이 글들을 쓰는 것도 사실 생명을 담보로 쓰는 것이다. 주님의 강권하심이 아니면 이 글들을 쓰고 싶은 마음도 없다. 내가 쓰는 글에 이런 내용을 왜 포함해야 한다는 말인가? 세상이 어떻게 되던 저자는 빨리 천국을 가고 싶다. 뭐 사명은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감당해도 될 것이다. 저자는 사명에 따르는 상급도 필요 없다. 사랑하는 예수님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다. 천국의 저 말석에서라도 예수님을 빨리 만나고 싶다. 그 천국의 말석도 이 더러운 세상과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 자체가 저자에게는 상급이다. 영원히 말석에 있어도 그 좋은 예수님 하루라도 빨리 보는 게 소원이다. 영원히 그 예수님의 품에서 그분의 눈을 보고 그 사랑 안에 풍족히 배불러 어린아이처럼 잠드는 것이 소원이다. 천국 가서 예수님 가장 가까이 볼 수 있는 것이 천한 종들이 하는 발등상일 것 같아서 그 발등상이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다. 예수님만 빨리 볼 수 있다면 순교도 무엇도 불사할 수 있다. 그래서 선교지에서 위험한 곳들도 다녀 봤는데 하나님은 데려가 주시지를 않으셨다. 심지어 위험한 곳으로는 비자 발급도 안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도 입국하는데 저자는 이유도 없이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공안들이 나의 정체가 선교사라는 것을 알았다. 성도들과 공개적으로 아파트에서 크게 찬양도 했다. 또 그 장소에서 이전에 성도들이 체포된 적도 있었다. 나도 공안으로 불려 갔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네가 어디 사는지를 안다(그곳이 지하교회라는 것을 안다)”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은 나를 체포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중국어 공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하며 풀어주었다. 전환이 사실상 막혀있던 비자까지 전환을 해주었다. 알고 보니 중국 선교사들은 15년 정도 중국에 선교비를 지출하고 그 지역에 영향력이 있어야 체포하여 추방한다고 했다. 사실 다른 지역에서는 단기 방문한 선교사들도 체포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내가 누군지를 알면서도 체포하지 않았다. 중국은 체포당해도 기껏해야 추방이다. 순교당할 일은 없다. 그래서 별로 떨리지도 않았다. 나를 공안으로 데려가는 사람보고 저들이 보석금 요구하면 나는 보석금도 안 내고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 봐야 최후에 내려질 최악의 판결이 추방이나 감옥 행일 것이었다. 물론 나도 공안에 불려 가 조사받기 위해 대기할 때는 잠시 떨리는 마음도 있었다. 어찌 되었건 하나님은 쉽게 데려가 주시지를 않으신다. 이것도 이기적인 마음이라는 것을 안다. 세상이 어떻게 되든 저만 좋은 것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고 예수님을  보고 싶다. 미치도록 보고 싶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 포기할 수 있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고 미쳤다고 해도 좋다. 나는 미친 것이 맞다. 그 예수님이 보고 싶어 미쳤다. 누가 나의 죽음을 슬퍼해도 심지어 나의 부모님이 내가 세상을 일찍 떠났다고 한이 맺힐 수도 있지만 예수님을 너무 보고 싶으니 그것도 상관이 없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미친 것이 맞다. 먼 타지에서 아무도 모르게 이름도 없이 죽어가도 나는 예수님을 일찍 보고 싶다. 지금 이렇게 몸을 입고 세상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만족할 수가 없다.


나의 호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

 하나님께서 나의 호소에 대한 응답을 주셨다. 서구의 신학계에 이전 세기 동안 그리고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가장 큰 논쟁이 바로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임을 알게 되었다. 조직 신학계의 거두인 웨인 그루뎀과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학설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을 주장했다. 웨인 그루뎀의 조직신학 1판을 보면 이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다. 후에 2판에는 이에 대한 견해에 수정이 있었는데 그것은 이단시비를 하는 사람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함일 뿐인 것 같다. 아직도 성경적인 명확한 근거를 찾은 이는 없고 오히려 이 영원발생설이라는 가설이 성경적인 근거가 없음에 대한 주장들이 거센 물결로 흐르고 있다. 해외 신학 잡지와 논문들에서 찾은 내용들이다. 이에 대한 논쟁의 열기는 서구 신학계를  달아오르게 하고 있다. 참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단 시비에 휘말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다. 나는 성경을 연구하다가 발견했는데 그리고 이 진리의 발견을 통해 하나님의 에클레시아 즉 부름 받은 자들을 세우고자 했는데 그것이 걸림돌이 될까 노심초사였다. 그런데 한국교회와 그 안에 있는 나만 깜깜하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었다. 세계의 신학계가 이 부분에 대해 지난 20세기 전체와 21세기 초반 동안  놀라울 정도의 관심과 열의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정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저자는 성경과 교회사 연구를 통해 이 학설이 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오랫동안 교회 안에서 거짓 권력을 행사했는지를 추적할 수 있었다. 또한 현대 논쟁의 최근 시점에 있었던 독생으로 돌아가자는 글에 대한 오류도 발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어거스틴의 이에 대한 주장을 담은 요한복음에 대한 해석에서도 오류를 찾았다. 권력이 찍어 누르고 목숨에 위협을 받으면 그 아래서 살기 위해 오류도 진리라고 억지 근거를 찾아 비굴하게 살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기본 태도인 것이다. 저 대단한 신학자들도 그러했음을 역사를 통해 그리고 성경 본문 안의 문맥을 통해 이를 증명하겠다. 웨인 그루뎀이 한 학자의 '독생으로 돌아가자'라는 글을 근거로 영원발생설을 옹호하는 입장을 밝혔는데 웨인 그루뎀은 다시 자신의 입장 즉 영원발생설 옹호의 입장을 철회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책인 하나님의 아들에서 다루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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