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겔 Feb 10. 2023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2)회복된 하나님 형상들의 발자취

목차


3. 인자: 권세 사용자(그리스도인)

    (1) 인자 아담의 후손

         1) 두 번째 아담과 새 피조물

         2) 에덴으로의 회복

         3) 인자 아담의 후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

             A. 하나님의 보좌 우편(스데반)

             B.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최후의 포석

             C. 요셉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

             D. 모세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The Prophet)

             E.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F. 다니엘 샤 한 샤 아래 최고 통치자

             G. 십자가의 왕 예수님

             H.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

             I. 하나님의 형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A. 성경 속 하나님의 아들

                 a. 신약 성경

                 b. 구약 성경

                     a) 창세기 6장

                     b) 욥기

                         ㄱ. 문자적 해석

                         ㄴ. 문학적 해석

                         ㄷ.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가?            

             B. 영원발생설의 오류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의 발자취

             A.  인자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복음

                  a. 하나님의 아들 스데반

                  b.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 4 단계

                  c. 로마시대 이후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 종교개혁 부흥

                  d. 존 후스의 체코 부흥

                  e. 재세례파(침례교)의 순교의 피

                  f. 청교도 부흥

                  g. 존 웨슬리 시대의 부흥

                  h. 미국의 부흥

                  i. 조선 부흥


    (3)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         

         1)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a) 자기노력

                     b) 자기의

             B. 인본주의

             C. 기복주의

         2) 거짓신앙의 심각한 폐해

             A. 복음의 서진: 심각한 역사 해석 오류

                a. 동양: 복음의 박멸

                b. 서양: 복음의 변질


    (4) 살아있는 신앙

         1) 사귐이 있게 하려

         2) 사귐을 거부하는 신학적 오류

         3) 하나님의 임재


    (5) 1세기의 도전 - 1세기 거짓신앙

         1) 갈라디아

         2) 갈라디아 교회의 시작

         3) 율법주의-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신앙

             A. 율법주의의 심각성

             B. 율법의 본원적 기능


    (6)우리시대의 거짓신앙

        1) 우리시대 거짓신앙

        2) 갈라디아 거짓신앙의 핵심- 율법주의

        3) 우리시대 거짓신앙의 핵심- 싸구려 신앙고백

        4) 십자가의 능력


    (7) 사명: 회복된 인자들에게 주신 태초 명령의 회복

         마태복음 28장: 관계 지향적 지상명령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된 것이다. 말은 말을 낳고 소는 소를 낳는다. 인간은 인간을 낳는다. 자신과 본질이 같은 존재를 낳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식을 만드셨다. 자신의 본질을 가진 존재를 만드셨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 꼭 닮아있다. 자식인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졌다고 말한다. 아담이 자신의 형상을 닮은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아담의 형상이었다. 하나님께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 그래서 그 사람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송아지는 소의 아이(아지)다. 망아지는 말의 아이(아지)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이 즉 하나님의 아들이다. 피조세계 안에서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존재다.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다. 그리고 그 만물을 다스리는 힘과 권세를 가졌다. 그 역할과 본질이 하나님의 그것과 닮아있다. 단지 그 범위가 피조세계에 한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힘이 전능이 아니라 한계가 있다. 피조물의 한계 안에 갇혀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본질적인 기능과 성품은 하나님의 그것과 거의 흡사하다. 그래서 시편에서 인간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된 존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A. 성경 속 하나님의 아들

 사실 성경 안에서 자증 하는 증거대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유일하게 인간에게만 사용되었다. 욥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 표현을 문자대로 해석하여 천사들로 해석을 하면 별들이 춤을 추고 있다는 표현도 문자대로 해석하여야 할 것이다. 


a. 신약 성경

 신약의 하나님의 아들들에 관한 구절들은 모두 성도들을 나타내는 말들이다. [1] 모두 인간에게 적용된 것이다.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신 분이셨다. 예수님의 신성에서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지난 세기와 금세기의 가장 극심한 논란의 정점이 되었던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에 대한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지금은 논외로 하고 뒤에 더 논의 하겠다. 그러나 신약 성경에서 공통적으로 찾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거론된 모든 존재는 인간이었다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도 포함된다. 예수님은 인간이셨지 천사는 아니셨다.


b. 구약성경

 그러나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은 그 해석에 있어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 

이런 의견들을 종합해 보면 다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

셋째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태어난 사람들

그런데 구약 성경의 하나님의 아들은 모두 복수로 쓰였다. 최소한 예수님 한 분만을 나타내는 단어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 주장은 구약성경의 자증에 의해 해석 오류임이 증명된다. 그렇다면 둘째 천사들이나 셋째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들일 것인데 이에 대해 구약과 신약을 살펴본 후 결론을 내리겠다.

어떤 사람들은 천사들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특히 욥기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a) 창세기 6장

창 6:2 개정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창 6:4 개정 4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창세기 6장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로도 해석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하나님께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해석하기도 한다.


b) 욥기

 1:6 개정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2:1 개정

1또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서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와서 여호와 앞에 서니

 38:7 개정

7그 때에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느니라


ㄱ. 문자적 해석

욥기의 세 구절 중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라고 주장되는데 핵심적인 역할 을 하는 구절은 마지막 욥 38:7절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찬양하는 곳에서 새벽 별들이 기뻐 노래하며 하나님의 아들들이 다 기뻐 소리를 질렀다는 표현이 나온다.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는 인간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므로 이것은 인간이 아니라 천사들일 수밖에 없다는 추론이 나온다. 

ㄴ. 문학적 해석

그런데 욥 38:7절 후반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들인가?

이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면 천지의 창조에 있어 인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땅이 창조되는 상황 속에서 말해진 것 같아 보여서 사람은 제외될 수 있다. 

그러나 욥 38:7절 전반부에 ‘7 그때에 새벽 별들이 함께 노래하며’라고 한 것을 보면 이 구절을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별들이 노래한다는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 과연 여러분들은 별들이 함께 노래하는 것을 눈으로 본 적이 있는가? 그 노랫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이것은 명확한 문학적 표현인 것이다. 무생물인 사물을 의인화한 표현인 것이다. 이 바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모여 기뻐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앞의 별들의 노래가 문학적 수사구이듯 이 구절도 문학적인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문자적으로 받아들일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약의 다음 구절들을 보면 이러한 비유의 형식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 12:1절은 성도들이 영으로 와있다는 것인가? [2]

그렇다면 욥기에 하나님 앞에 사탄과 함께 천사들만 올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성도들도 올 수 있는 것인가? 물론 성도들이 오는 것이 가능하다. 죽어서 영이 된 자들이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는 모습일 수도 있다. 기도하는 성도들이 천상의 회의에 올려진 모습일 수도 있다.


또 유다서 1:14~15를 [3] 보면 마지막 심판의 때에는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부활한 성도들이 이러한 자리에 서게 될 것을 보여준다. 이로 보건대 욥 38:7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꼭 천사로 보아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욥 1장과 2장에서 죽어서 몸을 벗은 성도들과 함께 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는 것이다.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갔는데 그가 하나님과 함께 있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심지어 기도하는 성도들은 살아서 영으로 하나님의 천상회의에 초대되기도 한다. 오히려 아래의 구절들을 보면 에녹의 시대와 멀지 않으므로 성도들로 보아도 타당할 것 같다.

 1:14-15 바른

14 아담의 칠 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해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아라, 주께서 그 수만 명의 성도들과 함께 임하셨으니,

15 이는 모든 이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불경건한 행위와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께 거슬러 말한 모든 사나운 말에 대하여 정죄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1:14-15, 바른)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앞 절인 유 1:13절에서 이단자들에 대해 ‘떠돌아다니는 별들’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사람들을 별로 표현한 것이다. 또 성경에는 성도들을 하늘의 별과 같게 하여 주신다는 구절들도 있다. 욥 38:7절과 같이 별과 사람들이 같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에 대해 ‘애찬의 암초’ ‘바람에 밀려다니는 비 없는 구름’ ‘두 번 죽어 뿌리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 ‘자기 수치의 거품을 내뿜는 바다의 거친 파도’라고 다양한 비유를 사용한다. 유다서의 비유 형식을 그대로 빌어서 욥 38:7절은 비유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욥 38:7 그때에 사람들이(별들이) 함께 노래하며 사람들이(하나님의 아들들이) 모두 환호하였다.

물론 이렇게 번역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원래 의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앞의 것은 그대로 별로 두는 것이 맞다. 이에 대해 사람은 그때 창조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노래할 수 있는가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다. 그렇다면 별들이 노래하는 것은 가능한가? 둘 다 문학적인 표현일 뿐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아직 그 해석이 불분명한 것이 사실이다. 그 본문 자체로는 어떤 해석을 해야 할지 불분명한 것이다. 이런 경우 그 뜻을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은 그 해석이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는지 비교하여 성경 전체의 사상과 일치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ㄷ.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가?

하나님의 아들들을 천사들로 해석하면 신약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 과연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아들로 인정하시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신약성경은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정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를 보면 천사들은 종이다. 예수님과 성도들만이 아들들로 인정되어 상속자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로 표현하는 것이 옳은가?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인간이 아닌 천사로 보는 것은 히브리인들의 천사숭배사상이나, 또는 천사가 인간보다 더 상위의 존재라는 잘못된 사상[4]에서 비롯된 것인 것 같다.  신약 전체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모두 사람이었다. 예수님도 사람이셨다. 그리고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언급된 존재들도 모두 성도들 즉 사람들이었다. [5] 이로 보건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들에 대한 해석은 사람들로 보는 것이 타당한 해석이다. 그래야 성경 전체의 사상과 문맥상 대치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아들로 성경에서 확정적으로 인정하신 모든 대상은 인간이었다. 천사들은 단지 아들들을 섬기라고 만드신 종들이다. 천사들은 만물을 다스리는 존재들이 아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전하는 자들로 사용되지만 그들이 만물을 통치하는 자들로 표현된 성경은 단 한 구절도 없다. 단지 그들은 섬기는 종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를 섬기고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간의 통치를 섬기는 것이다. 그들은 상속자들 즉 아들들이 아니다. 단지 그들은 섬 기는 종들이다. 종들을 아들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이 고대하고 기다리는 것은 천사들의 나타남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인 것이다. 롬 8:19절에 나타날 하나님의 아들들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도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다(롬 1:4)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아담의 계보를 이어 하나님의 아들로 나셨다. [6]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다.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표현은 유일하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아담에게 그리고 아담의 후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형상이 아들 됨을 설명하는 것이다. 말의 아들(망아지)은 말이다. 소의 아들(송아지)은 소다. 그 형상을 닮아 태어나는 것이다. 오직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타고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나 사람은 태어나고 피조된 존재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일하게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이신 예수님은 태초와 그 이전 영원부터 하나님이셨다. 예수님도 독생 즉 성육신하신 이후에 즉 인간으로 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지셨다. 그 이전에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없었다. 

이에 대한 다른 견해는 성경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나 독사의 새끼, 마귀의

새끼가 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육신을 입은 인간 즉

하나님의 아들로 오셨고(태어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시었다.

 성경상에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실하게 표현된 대상은 모두 사람이었다. 아담, 솔로몬, 예수님,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신약성경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모두 추측이요 아직 논란 중이고 확정적이지 않은 구절들 밖에 없다. 그리고 신약과 구약의 확정적인 사상 안에서 이 구절들을 해석하면 그 모든 구절들에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셨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로 [7] 칭해지셨다. 그 이전에는 그분은 영존하는 아버지시요 하나님으로 칭해지셨다. 또한 이 호칭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후에도 동일한 호칭이셨다. 이사야 8장에서 언급될 때에도 이 호칭은 인간으로 태어난 아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셨지만 영존하시는 아버지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으로서 받으신 것이고 영존하시는 아버지는 하나님으로서 가지신 호칭이시다.


B. 영원발생설의 오류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은 이교의 사상일 가능성이 높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영원 전에 하나님으로부터 나셨다. 그래서 창조된 것은 아닌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설. 가설인 이유는 그 근거가 되는 구절이 성경 안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이러한 사상은 이교의 신학에 등장한다. 플라톤과 신플라톤 그리고 스콜라와 스토아 학파에 존재하던 사상을 기반으로 파생된 사상이다.


a. 영원발생설 설파의 목적
 이 이교적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가만히 들어온 목적이 있다.


a) 예수님의 동일 본질설을 공격
    그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삼위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차등이 없는 하나님이심을 공격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일본질이시다. 즉 하나님 보다 하등 하신 분이 아니신 동일한 하나님이다.


b) 인간의 신분을 속여 노예로 삼으려 함
    거짓 사상이 기독교 신학에 들어온 두 번째 목적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숨기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인간을 통해서 효과적으로 실행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인간이 강력한 권세를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 가운데서 효과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의 권세가 무엇인지 자각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를 사용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어 드리는 일에 차질이 생길 수 밖에 없다. 타락한 인간은 원수 사탄에게 자신의 권세를 빼앗기고 그 빼앗겼다는 사실 조차 잊어버렸다. 그리고 그 기억 상실의 상태에서도 자신의 권세를 가지고 있기에 사탄의 조종에 의해 자신의 권세를 사탄을 위해 사용한다. 결국 그 권세를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런 애통할 인간의 처지를 알리고 다시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인간의 권세를 사용하도록 해야겠다. 이를 위해 이러한 원수의 음모를 알리는 것이다.
b. 인간의 본분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각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 스스로 자신의 신분도 아닌 것을 도용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교만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어 주셨는데 그것을 자의적 겸손으로 스스로 거부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외식이요 진정한 교만이다.
    예수님의 영원발생설을 원수가 기독교 안에 심어 놓았다면 원수의 목적은 다음과 같은 논리로 그리스도인들이 귀결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은 감히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로의 권세 즉 하나님의 형상의 권세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의 후손의 권세와 신분을 인간이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교만이다.
    이 논리야 말로 이 땅을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을 통해 다스리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는 어불성설이요, 직무태만이다.
예수님이 인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태어났으나 독사의 새끼들이 되어버린 인간들을 다시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것을 위해 예수님은 피를 흘리셨다. 영원발생설과 같은 거짓 사상들에 의해 인간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임을 자각하는데 문제가 생긴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리신 목적을 헛되이 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인간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었으나 타락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인 인간으로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인간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죄의 형벌을 감당하셨다. 그래서 타락하여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잃어버린 인간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찾아주셨다. 그리고 그렇게 회복된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14:12, 개정)


 인자, 즉 아담의 후손과 같은 의미지만 다른 표현들이 있다. 그 하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그 다른 형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사실 이 말들은 서로 형태가 다르지만 그리고 실질적인 뜻도 차이가 있지만 그 뜻을 알고 나면 서로 같은 뜻을 나타내는 서로 다른 형태의 단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반복해서 이 단어들에 대해 성경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의 발자취

 이렇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은 앞에서 살펴본 대로 구약에 예수님의 예표의 사람들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신약 곳곳에 등장한다. 그들도 예수님과 같이 순교의 피를 흘린다. 그리고 복음은 그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그 예로 먼저 스데반을 살펴보겠다.


A. 인자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복음

a. 하나님의 아들 스데반

 스데반은 성경에 집사로 등장한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가장 먼저 살펴볼 사람은 사도들이 아니라 집사다. 최초의 예수님의 복사판은 스데반이다. 예수님과 동일한 모습으로 순교한 최초의 복사판이다. 그의 순교는  세계역사의 대 전환점이 된다.

 사실 우리는 사람을 그 직업이나 직분으로 또는 그가 가진 지식이나 명예 재산으로 평가한다. 우리는 교회 안에 와서도 그 기준을 가지고 서로를 판단한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권사나 장로나 기관장이 되는 것에 또는 노회장이나 총회장이 되는 것에 집중한다. 그런 것을 구하지 않더라도 자기 위로나 심리적 위안을 찾는다. 친교를 통한 관계의 필요를 구하기도 한다. 결국 자기 필요만을 구하는 소비자들이다. 물론 거듭나지 않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옛사람이 역사하는 결과다. 

 그러나 진정 어리석은 것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고 그 능력을 맛보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엉터리 우상을 교회 안에서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면 최소한 교회에 와서 세상이 구하는 엉터리를 구하며 돌부처에게나 빌어야 할 일에 집중하지 않게 될 것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놀라운 신분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면 더 이상 다른 것을 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신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매일 감격의 눈물을 드리게 될 것이다. 온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다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감사가 넘치게 될 것이다. 당신의 삶에 이런 감격이 없다면 당신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먼저 거듭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 거듭난 생명을 얻고 그 생명 안에서 거룩한 고난과 사명의 십자가를 지기를 바란다. 그것을 위해 영광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로 열방을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바란다. 열방에 죽어있는 독사의 새끼들을 거듭나게 해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아들로 회복시키는 놀라운 은혜가 우리에게 있다. 당신을 이 영광스러운 삶 가운데로 초대하기를 원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 즉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담의 후손으로서 어떠한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지 찾아보자.


예수님의 복사체 스데반

사도행전 6장 이후의 스데반의 모습을 보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다. 그의 모습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있다. 그의 순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의 순교의 자리에서 말해진 말도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말씀과 거의 동일하다. 예수님의 복사판 최초의 순교자는 사도가 아닌 작은 사람 집사 스데반이었다.


작은 예수 스데반

l  은혜, 지혜, 능력, 성령님 충만

l  민간에 표적과 강력한 기사

l  지혜와 성령님으로 말함을 대적들 능히 당하지 못함

l  사람을 매수하여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들었노라 하게 했다. [9]

   예수님에게도 동일한 일이 있었다.

l  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했다고 모함받았다. [10]

l  나사렛 예수님이 성전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라고 말함을 들었다.

l  행 7:51-52 바른 51"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자들이여, 너희는 너희의 조상들처럼 항상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 52 너희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선지자가 있었느냐? 의인이 올 것을 미리

   전해준 자들을 그들이 죽였는데, 이제 너희들이 그 의인을 배반한 자와 죽인 자가 되었다.

l  행 7:53 바른 53 너희가 천사들이 전해 준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

l  행 7:55-56 바른 55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바라보았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았다. 56 그가 말하기를 "보아라, 내가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의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본다." 하니, [11]

l  행 7:59 바른 59 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니, 그가 부르짖어 말하기를 "주 예수님, 내 영혼을

   받으소서." 하고, [12]

l  행 7:60 바른 60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외치기를 "주님,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하고,

   잠들었다. [13]

l  동일한 모습으로 순교하는 자들이 생김

   예수님은 스데반이 동일한 모습으로 순교. 

   스데반은 사도바울이 같은 모습으로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자와 같이 됨

l  그 순교적 죽음을 통해서 강력한 부흥이 찾아왔다. 

  예수님을 통해서 사도행전 2장의 부흥이 왔다. 예루살렘을 가득 채운 부흥이 온 것이다.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서는 복음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른다.


 물론 사마리아 이후 안디옥에서 땅끝으로 복음이 전파되기에 앞서 다시 야보고의 순교가 있었고 그리고 그 외에도 이름이 알려진 순교, 이름 없는 순교를 통해 수많은 의인들의 피가 땅에 뿌려졌다. 스데반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이렇게 예수님과 비슷한 죽음을 가진 자는 없었다. 그를 기록한 사도행전 6~7장 두 장의 기록은 예수님의 삶과 수많은 오버랩을 가지고 있다. 그는 예수님의 예표적 인물들이었던 구약의 어떤 인물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예수님과 그 죽음이 닮아있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복음의 세계전파에 있어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의 죽음을 통해 최초의 이방 선교가 시작된다.


스데반의 설교

 스데반의 설교의 길이 54개 절이다.  사실 7장 전체가 스데반의 설교다. 그리고 앞의 6장도 스데반에 관한 내용이다. 그 내용에 포함되어 함께 연결되어 하나의 내용으로 되어있는 것이 6장과 7장이다. 신약에 등장하는 내러티브 본문들에 언급된 설교 중 예수님의 설교를 제외하고는 가장 긴 설교다. 물론 4 복음서를 제외하고 신약에 이야기체인 내러티브로 기술된 성경은 사도행전이 유일하다. 그 내용 중에 상당히 긴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사도행전에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에 관한 기록들이 초반에는 길게 나타난다. 그리고 스데반 사건 이후에 기록된 내용들은 모두 바울에 관련된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의 내용이 이렇게 길게 등장하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유일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지상에서 남은 사역을 하고 그 작은 예수님의 삶을 살아간 사람들의 기록 중 예수님과 가장 닮은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스데반이 유일하다. 그리고 전반부의 예루살렘에 온 부흥과 후반부의 바울 주도의 이방 선교 부흥과의 연결고리도 스데반이다. 무엇보다도 사도바울이 사울에서 바울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이 스데반의 순교다. 스데반의 순교 이후 사울은 마치 죽은 스데반을 옷 입고 살아가는 스데반의 복사체처럼 살아간다.

사도행전의 전반부의 내용은 스데반의 순교로 마무리된다. 또한 스데반의 설교에 등장하는 사람들도 모두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다. 예수님처럼 건축자들의 버린 돌들이었다. 모두 순교자적인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다. 그 돌들이 모두 모퉁이 돌이 된다. 즉 버림받은 자들이 구원자로 세워진다. 앞에 언급한 보좌의 우편에 앉은 삶을 살았던 구약의 예표들 즉 요셉, 모세, 다윗 모두 스데반의 설교에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다. 스데반의 설교의 내용은 버림받은 자를 구원자로 세우시는 하나님 즉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다. 

그 설교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결국 참 모퉁이 돌이신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모든 설교의 핵심은 예수님이었다. 십자가에서 버림받으시고 다시 하나님 아들로 부활하신 예수님이다. 그 예수님을 전한다. 그 버려지신 그분이 바로 인자이신 분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이다. 

그것을 말하고 스데반은 자신도 십자가의 길을 따라갔다. 영문 밖으로 끌려가 순교를 당했다. 자신의 삶을 통해 그 피가 땅에서 말하게 한 것이다. 그 피의 호소가 세계선교의 시발점이 되었다.


세계선교의 시발점

 스데반의 순교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다. 스데반의 순교 이전에 복음은 거의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었다. 스데반의 순교가 시발점이 되어 복음은 확장되었다. 핍박으로 인해 성도들은 흩어졌다. 심지어 이방 땅인 다메섹과 안디옥까지 목숨을 건지고자 도피를 했다.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고 그러던 중 이방인들에게까지 복음이 전파되었다. 스데반의 순교(버림받음)를 통해 복음이 예루살렘에만 아니라 온 유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파되게 된다.


스데반의 순교의 피에서 피어난 꽃 바울

 스데반의 순교의 또 하나 더 놀라운 결과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우두머리였던 사도 바울이 회심하여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데 쓰임 받게 된 것이다. 그는 이방 선교의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사도행전 후반부의 대부분의 기록은 바로 이 바울과 관련된 기록인 것이다. 복음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사도 바울인데 이 사도바울이 돌아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스데반의 순교였다. 

사도행전 7장 이후로 신약 성경의 역사가 바뀌어버렸다. 

 바울을 통해 복음이 열방으로 나아가는 것은 스데반의 순교의 피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초대교회 이방 선교의 최전방에 섰던 사울은 스데반을 죽였지만 돌이켜 회개한 후 스데반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 그는 불꽃으로 살았다. 바울은 예수님을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그리고 성도들을 박해한 짐을 어깨에 지고 살았다. 그래서 그의 삶은 순교의 피에서 피어난 꽃처럼 자신을 불사르는 삶이었다. 그 짐을 어깨에 지고 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도 바울을 통해 이루어진 선교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스데반의 순교에 빚져 쫓기는 절박함에 의해 꽃 피었다고 할 수도 있다. 

b. 사도행전 복음 전파 4단계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는 4기로 나눌 수 있다. 간 단계별로 복음 전파의 범위가 넓어지는 계기가 되는 곳에는 모두 순교의 피가 그 시발점이 된다. 복음은 순교의 피를 먹고 전파된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열방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도구가 되어 즉 작은 예수가 되어 자신을 드리고 그리고 마지막 하나님 앞에 영광의 부활로 다시 나아와 그 상급을 얻을 상속자들이 되었다. 이 일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세계복음화의 1기 

 세계복음화의 1기는 예수님 사건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자리를 버리고 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 예수님은 그 삶을 통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에 복음을 전하셨다. 그러나 그 복음은 십자가와 부활이 있기 전에는 완전한 것이 아니었다. 무리들은 따랐지만 제자의 수는 적었다. 사도행전 2장 이후를 보면 제자의 수가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그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제자들도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알지 못했다. 예수님의 피가 이 땅에 뿌려지고 세상을 위한 대가를 지불하셨을 때에야 성령님은 이 땅에 참 믿는 자들에게 오셨다. 그리고 성령님이 오신 이후에야 사도들과 제자들은 예수님이 자신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구원자인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성령님이 오신 이후에야 그들은 참된 성령님의 증거를 받았고 예수님의 참 증인 들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세계복음화는 2기에 진입하게 된다.

 

세계복음화의 2기

행 1:8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오시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신약의 사도행전의 부흥에 의한 세계복음화의 2기에는 복음은 예루살렘에만 거의 머물러 있었다. 

세계복음화의 1기의 시발점이 되는 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에 사도행전 2장의 부흥이 찾아온다. 물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구원의 시발점이 된다. 단지 예루살렘의 부흥뿐 아니라 모든 인류 구원의 근원이 되는 사건이다. 그와 동시에 사도행전 세계복음화 1기의 시발점이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도행전 2장의 부흥이 왔고 그 부흥은 예루살렘을 휩쓸었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 이 복음이 세계 열방으로 나아가는 시발점이 되는 것은 스데반이라는 집사의 순교를 통해서다. 그의 피가 땅에 뿌려지고 그 의인의 피의 호소가 하나님께 들려지고 그 피의 호소의 응답으로 세계복음화는 제3기로 진입하게 된다.


세계복음화의 3기

 복음의 전파는 피를 먹고 자란다. 예수님의 피를 먹고 그리고 스데반의 피를 먹고 자란다.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 복음은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일부 이방지역에까지 이른다. 이스라엘에 근접한 시리아의 다마스쿠스, 키프로스와 페니키아, 안디옥까지 복음이 전해졌다. 사실 스데반의 순교는 사도행전에서 가장 극적인 세계복음화의 전환점이 된다. 그의 죽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너무 흡사하게 닮았다. 그 이전에 복음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있었지만 그의 순교를 통해 복음은 열방으로 나아갔다. 처음으로 복음이 이방지역에 전파가 된 것이다.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에는 이미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지역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제 완전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이방인들도 복음을 듣고 회심하여 성령님을 선물로 받게 되었다. 이방의 개들에게 복음이 전해진 것은 유대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핵심에 스데반의 순교가 있었다. 그 이방지역 출신들이던 그중에서도 핵심세력이었던 헬라파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스데반의 순교가 그 이방지역을 복음화하게 한 것이다. 그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다. 그 피는 땅에 헛되이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 피의 호소가 바로 그를 죽였던 자들이 왔던 헬라 지역을 향해 복음의 불덩이를 던졌다. 그 불은 타올랐고 그 불을 끌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 불은 로마와 땅 끝으로 나아갔다. 그 불이 로마와 땅 끝으로 나아가는 데는 성경에 단 한 줄로 초라하게 기록된 야고보의 순교가 있었다. 야고보의 순교의 피를 먹고 복음은 로마와 땅끝으로 나아간다. 야고보의 순교를 통해 세계복음화는 제4기에 진입하게 된다.


세계복음화의 4기

 로마와 땅 끝을 향한 바울의 3차 전도여행이 야고보의 순교의 피를 먹고 시작된다. 그것도 우연이 아니다. 사도행전 12장의 야고보의 순교 사건은 그 전후가 모두 바나바와 사울의 사건들이다.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 구제헌금을 가지고 올라가자 야고보의 순교 사건과 관련한 일련의 사건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12장이 끝나고 13장이 시작되면 바로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신다. 사도행전 12장을 빼고 11장과 13장을 이어서 읽어도 문맥상 이상이 없이 성경을 읽을 수 있다. 심지어 12장은 누가 의도적으로 원래 있던 본문에 삽입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다. 12장이 없이 읽는 것이 어떻게 보면 문맥적으로 더 매끄럽다.

행 11:27~30, 12:25~13:2 바른 

27그 무렵에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들이 안디옥에 내려왔다. 28 바른 그들 중에 아가보라고 하는 한 선지자가 일어나 장차 온 세상에 큰 기근이 있을 것을 성령으로 지시하였으니, 이 일이 글라우디오 때에 일어났다. :29 바른 제자들이 각자 능력에 따라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보내기로 결정하고, 30 바른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편으로 장로들에게 보냈다.

/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직무를 마치고 마가라고 불리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왔다.

행 13:1 1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고 불리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왕 헤롯과 함께 양육되었던 마나엔과 사울이었다. 2 그들이 주께 예배하며 금식할 때에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들을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위의 편집된 내용은 사도행전 12장의 내용 중 마지막 절을 제외하고 모든 구절을 삭제하고 편집한 것이다. 읽어보면 자연스러운 것을 알 수 있다. 12장의 내용을 읽어보면 문맥과 전혀 맞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에 바나바와 사울이 구제헌금을 들고 올라간 것과 관련 있는 내용은 전혀 없다. 마치 없던 행 12:1~24절의 내용이 후에 삽입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창세기 38장의 후대 삽입설과 같이 논란을 일으킬 수 있는 내용이다. 창세기 38장이 그런 논란을 일으켰지만 구속사적으로 핵심적인 본문이고 창세기와 구약 전체의 문맥 상 그것을 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이 야고보의 순교 본문도 그것을 빼고는 사도행전을 말할 수가 없다. 야고보의 순교가 있어야 복음은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 로마로 땅끝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야고보의 순교 이후 안디옥에서는 성령님께서 바나바와 바울을 금식하고 따로 세우라고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의 세계복음화 제4기는 야고보의 순교의 피를 먹고 시작되었다. 


c. 로마시대 이후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 종교개혁 부흥 

역사를 보면 항상 복음은 순교의 피를 먹고 열방으로 전파되었다.

 

종교개혁 부흥

로마시대에 변절한 메트로폴리탄[14] 목사들과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순교당한 이름 없는 수많은 참 믿는 자들의 피를 통해 복음은 루터의 시대에 다시 기치를 들고 살아 부활했다. 국제적인 정세를 보면 루터의 복음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그와 그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살리셨다. Revival 바로 부흥이었다. 그 부흥이 열방을 휩쓸고 다시 하나님의 교회는 살아있는 복음을 가지게 되었다. 


d. 존 후스의 체코 부흥

그러나 그가 나타날 것을 100년 전에 예언한 존 후스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루터가 “Here am I God”(여기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이라고 말했던 종교재판과 동일한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을 당했다. 후스는 동일한 하나님의 진리를 전했고 종교개혁 다시 말해 성경적 복음으로의 회복을 주장하다 순교의 길을 갔다. 후스의 예언대로 후스(기러기)[15]가 화형 당한 재에서 다시 부활한 백조가 루터였다. 후스와 같은 수많은 순교의 피를 뿌린 참 신앙을 가진 자들이 중세에 있었다. 중세의 암흑기 1200~1300년 동안 최소한 500~600만 정도의 순교자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제2의 도시인 부산의 인구가 600만 명 정도 된다. 한 초 거대도시의 인구가 모두 학살을 당한 것이다. 우리들에게 이러한 숫자들은 익숙하지 않은 숫자들이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당했는데도 우리는 역사를 배울 때 그들의 순교에 대해 구체적 언급도 읽지를 못했다. 그들 대부분은 이름도 없이 스러진 사람들이다. 이 숫자에도 포함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마녀로 또는 악마를 숭배한 마법사로 누명을 쓰고 정죄되어 화형 당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으로 몰려 화형을 당했다. 마녀나 악마 숭배자로 몰린 사람들은 실제로 그들이 마녀였는지 아니면 누명을 썼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이러한 불분명한 자들을 제외하고도 500~600만 명이 순교를 당했다. 이들의 피를 통해 복음은 열방에 전파되게 된다.

 후스는 체코 사람이었다. 그 체코에서 루터의 종교개혁이 있기 100년 전에 종교개혁이 있었다. 후스는 화형을 당했지만 후스의 신앙을 따르던 체코 개혁교회는 전쟁도 불사했고 그 전쟁이 결국 패배로 끝났지만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모라비아 지역에 있던 참 믿는 자들이었다. 그들 중 일부가 독일의 진젠도르프 백작의 영지로 가서 모라비아 교회를 세웠다. 그 작은 모라비아 교회가 모라비아 선교회의 사람들인 것이다. 

복음은 피를 먹고 꽃피고 전파된다. 후스와 그와 함께 믿음을 지켰던 자들의 피는 종교개혁의 꽃을 피웠고 또 모라비아 선교회를 통해 열방에 복음의 씨앗을 퍼트렸다. 모라비아 교회에서 단 몇 년간 파송한 선교사가 신약 이후의 교회사의 모든 선교사의 숫자보다 많았다. 그들은 북극의 그린란드로부터 아프리카, 신대륙까지 우리가 알던 모든 땅끝을 향해 갔다. 복음이 유럽에서 종교개혁으로 꽃을 피우고 열방으로 나아간 것은 바로 후스와 그의 형제단들과 중세 암흑기의 이름 없는 수많은 순교의 피로 말미암아 가능했다. 


e. 재세례파(침례교)의 순교의 피

 종교개혁 이전과 이후에 믿는 자들 중 재세례파(침례교)나 여타 분파들은 개신교회와 카톨릭 모두의 공적이 되었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의 피를 뿌렸다. 사실 종교 개혁 100여 년 후대에 나타난 영국의 청교도는 개신교보다 이들을 더 닮아있다. 특히 회중교회는 그 뿌리가 조지 폭스에게 있지만 이들은 재세례파나 모라비안인 체코의 존 후스를 너무나도 닮아있다. 이 이름 없는 유럽의 수많은 순교의 피는 영국과 유럽에서 그리고 열방에서 다시 부흥의 불길을 올렸다.


f. 청교도 부흥

복음은 영국에서 꽃을 피웠다. 사실 영국의 청교도 중에는 루터나 칼빈보다 모라비안이나 재세례파(침례교)들을 더 닮아있는 부류들도 있었다. 특히 회중교회는 그 뿌리가 조지 폭스에게 있지만 이들은 재세례파나 체코의 존 후스의 후예들인 모라비안을 닮아있다. 회중교회는 주류 교단들의 교회사에서 저평가되었다. 그러나 실상 퀘이커(회중교회)들을 통해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가장 규모 있는 부흥이 나타났다. 조지 폭스가 살았을 당대에 그들은 이미 땅 끝에 가있었고 그들의 부흥은 열방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부흥은 존 웨슬리의 부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강력했다. 그들은 종교개혁 후 100년이 지나 화석화된 장로교와 성공회 같은 개신교회에 경종을 울렸다.

 그들 청교도 중에는 조셉 얼라인도 있었다. 그는 평생을 회개(구원 얻는 회심)에 대해 설교했다. 그의 책 『Call to the unconverted』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많이 발행된 베스트셀러라고 알려져 있다. 그 책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을 했다. 존 웨슬리는 그 책을 읽고 자랐다. 스펄전도 그러했다. 그 책을 스코틀랜드 인들이 쓰는 갈릭어로 번역했을 때 그 책을 읽은 지역들에 부흥이 왔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죽기까지 회심의 복음을 전파하다가 죽었다. 그는 병사했으나 그 죽음은 병사가 아닌 순교였다. 자신의 모든 것을 사르고 불태워 더 이상 기력이 남지 않아 스러졌다. 그는 교회 안에서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떨어지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화석화된 신앙 즉 죽은 정통주의는 이단보다 무섭다는 마틴 로이드존즈의 말은 단지 그 스스로 만들어낸 말이 아닌 것이다. 그것은 기독교회사의 고찰을 통해 성경의 연구를 통해 얻어낸 결론인 것이다. 

 하나님은 수많은 순교의 피를 통해 그리고 순교자적인 삶들을 통해 그 땅에 부흥을 부으신다. 복음은 영국에서 수많은 청교도들의 피를 먹고 다시 신대륙으로 전해졌다. 이 청교도들의 피를 먹고 복음은 열방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다시 100년 후 18세기 존 웨슬리 부흥으로 다시 불타 오른다.


g. 존 웨슬리 시대의 부흥

 알려진 대로 존 웨슬리는 모라비안들을 통해 거듭났다. 또한 웨슬리안 즉 감리교도는 초창기에 예배를 드릴 때 몸이 진동하여 의자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인해 이단시비에 시달렸다. 이 행위자체로 보면 그들은 퀘이커였다. 그 이전 세대의 피와 순교적 삶은 사라지지 않는다. 복음의 온전한 전파 즉 부흥은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다. 이 시대에는 웨슬리뿐 아니라 수많은 이름 있는 그리고 이름 없는 사람들을 통해 부흥이 왔다. 그리고 또다시 복음은 열방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 시대의 부흥들은 그 시대의 순교와 순교자적 삶을 낳았다. 항상 부흥은 순교로 이어지고 순교는 다시 부흥으로 이어진다. 복음은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것이다.


h. 미국의 부흥

 존 웨슬리의 시대 미국에서는 프렐링휴이젠의 부흥운동과 뉴저지의 부흥 뉴브룬스윅(New Brunswick)의 테넌트일가(Tennents)와 통나무대학 출신들의 부흥운동과, 코네티컷 지역(Connecticuts)에서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부흥운동과 영국의 순회설교자 휫필드(George Whitefield)에 의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이들은 그 신앙의 선조들의 순교의 피 위에 피어난 꽃이었다. 또한 이들은 모두 순교자적인 삶을 살았다. 웨슬리는 수많은 곳에서 박해를 받았다. 휫필드도 다르지 않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심지어 자신이 부흥의 도구로 쓰였던 교회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는 그의 생을 마감할 때까지 순교자적 삶을 살았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극찬한 그의 사위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도 그 삶을 보면 순교자의 삶을 살았다. 금과 돈에 눈이 멀어 인디언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박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혔던 그 당시의 풍조를 거스르고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는 백인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심지어 인디언들에게도 박해를 받았다. 인디언들은 악랄한 백인들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브레이너드와 그를 통해 전해진 복음을 거부하고 박해했다. 브레이너드는 그 삶의 무게와 고된 사역으로 인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모든 것을 불사르고 재만 남은 그의 육신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일기가 남아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생명의 위로를 안겨준다. 이처럼 순교자의 삶은 죽음에 이르지만 그들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서 그 피의 호소로 영혼들을 깨운다. 순교의 피는 영원히 살아서 쉬지 않고 우리의 영혼에 경종을 울린다. 그리고 마침내 부흥으로 불타올라 수많은 영혼들을 살아 숨 쉬게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왕 예수님의 복음이다. 버림받았으나 왕이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은 인자의 복음이다. 수많은 십자가는 수많은 부흥을 낳는다. 사망의 골짜기에 수많은 생명의 샘을 만든다. 그들의 피는 찰스 피니 시대의 부흥과 그리고 무디 시대 부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웨일즈 부흥과 미국의 아주사 거리 부흥으로 이어진다. 아마 아주사 거리의 부흥은 들어본 사람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아주사 거리의 부흥은 부흥의 역사상 가장 저평가받은 부흥들 중 하나다. 그 이유가 그 부흥을 주도한 사무엘 목사가 애꾸눈의 흑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눈깔 병신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들이 드리는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다. 당연히 백인들의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을 들어 사용하시는 분이다. 그는 예배드릴 곳을 얻지 못했고 결국 마구간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아주사 대부흥은 시작되었다. 그 부흥은 강력했으며 백인들도 그 부흥을 거부하지는 못했다. 


i. 조선 부흥 

 그 부흥의 불길은 조선으로 전해졌다. 조선은 웨일즈 광부의 부흥의 불 그리고 미국 애꾸눈 흑인의 부흥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그 불을 받았다. 가난한 동방의 무지렝이들에게 전해지기에 가장 적합한 복음을 받았다. 그때까지 조선은 전염병이 돌면 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군대가 한양 성을 포위하고 나오는 자들이 있으면 창으로 찔러 죽이는 나라였다. 물론 왕과 대신들은 남한 산성으로 피신을 갔다. 자신들은 도망가고 남은 백성들은 병에 다 죽어질 때까지 그리고 스스로 면역력이 생겨 살아남은 자들만 남을 때까지 방치한 것이다. 그것이 조선의 현실이었다. 보리 고개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고개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고개를 넘지 못하고 봄날 끝에 이 세상을 등졌다. 세도정치하에 백성들을 향한 수탈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동학혁명도 그때 일어난 것이다. 녹두 꽃이 떨어진 그 시대에 가난한 자들의 복음은 조선으로 향했다. 모두가 버린 어두운 땅에 그 복음이 순교의 피를 머금고 피어났다.

그 조선의 백성을 위해 젊음과 미래를 버리고 온 많은 의료 선교사들도 이 땅에서 전염병을 치료하다. 그 전염병과 풍토병의 역습으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또 루비 캔드릭, 존 헤론, 오웬(오기원), 서서평(쉐핑) 등 말로 할 수 없는 선교사들의 죽음이 있다. 그들은 일찍 순교의 길을 갔거나 아니면 순교적 삶을 살아갔다. 그들 중 도착해 5년이 안되어 죽은 사람이 많다. 그들은 헛되이 너무 일찍 죽어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이 땅에 심어졌고 그 씨앗이 썩어져 100배, 30배의 결실을 맺었다.


토마스

 이 책의 앞 부분에 언급했던 영국 웨일즈의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는 그 가난한 나라 어둠의 나라 조선을 사랑했다. 1866년 9월 2일 그 순교의 피는 대동강에 헛되이 뿌려지는 듯했으나 그 피는 살아서 조선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호소했다. 그의 피는 장대현 교회의 전신인 널 다리 교회를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 직접 세우시게 했다. 그의 피는 장대현 교회를 시작으로 조선을 부흥의 불길로 몰아넣었던 평양 대부흥의 씨앗이 되었다.

조선 그 먼 미지의 선교지에 흘려진 선교사들의 피를 통해 우리에게 부흥이 전해졌다.


우리에게 인자(아담의 후손)의 권세를 주신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그 권세를 이 땅의 자기 백성들을 위해 사용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십자가의 왕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 그분은 왕이 되셨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닌 인자들을 위한 것이었다. 바로 아담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제 사도의 글과 같이 우리도 예수 그리도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자. 그곳에서 불사름을 당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할 길을 예비하자.




          

[1]( 8:14 [바른])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 8:19 [바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 9:26 [바른])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함과 같다



[2] 히 12:1 바른

1 그러므로 이처럼 많은 증인들이 구름같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모든 무거운 짐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경주를 경주하자.


[3] 유 1:12-15 바른

12 이들은 거리낌 없이 함께 먹으며 자기 배만 채우는, 너희 애찬의 암초이며, 바람에 밀려다니는 비 없는 구름이고, 두 번 죽어 뿌리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이며,


13 자기 수치의 거품을 내뿜는 바다의 거친 파도이며, 떠돌아다니는 별들이니, 그들에게 캄캄한 어두움이 영원히 예비되었다.


14 아담의 칠대 손 에녹도 이들에 대해 예언하여 말하기를 "보아라, 주께서 그 수만 명의 성도들과 함께 임하셨으니,


15 이는 모든 이들을 심판하시고 그들이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불경건한 행위와 불경건한 죄인들이 주께 거슬러 말한 모든 사나운 말에 대하여 정죄하시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 1:12-15, 바른)


[4] 유대교 이단 유대교 카발라


[5] (롬 8:14 바른)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 8:19 바른)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 9:26 바른)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신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함과 같다


[6] 물론 이것은 족보상의 분류다. 예수님은 기존의 아담의 혈통이 아닌 새 아담 두 번째 아담으로 나셨다.


[7] 사 9:6-7 바른

6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그 어깨 위에 통치권이 있으며, 그 이름은 위대한 상담자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7 그의 통치력은 확대되고 평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부터 영원까지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이니,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9] 마 26:59 개정

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증거를 찾으매


[10] 마 26:59 바른

59대 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그분에 대한 거짓 증거를 찾으니,


 14:55 바른

55대 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님을 사형에 처하려고 증거를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하였다.


[11] 눅 22:69-71 바른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자의 오른쪽에 앉게 될 것이다."


70 그러자 모든 이들이 말하기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니,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말한 대로 내가 그이다."라고 하시자,


71 그들이 말하였다. "이제 우리에게 무슨 증거가 필요하겠느냐? 우리가 이 사람의 입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라고 하였다.


[12] 눅 23:46바른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말씀하셨다. "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깁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13] 눅  23:34 바른

 34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시여, 저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있으니, 저들을 용서하소서." ]라고 하셨다. 그들이 제비를 뽑아 예수님의 옷들을 나누었다.


[14] 콘스탄틴 황제시절 대형교회 목사들을 이렇게 불렀다.


[15] 후스는 영어의 구스(기러기)와 동일한 뜻을 지닌 체코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는 발음의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유사한 단어들이 많이 있다. 

이 단어 후스와 구스도 그러한 경우다.



작가의 이전글 독자들에게 드리는 부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