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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Feb 14. 2023

3. 인자 권세 사용자; (3)~(7)

목차


3. 인자: 권세 사용자(그리스도인)

    (1) 인자 아담의 후손

         1) 두 번째 아담과 새 피조물

         2) 에덴으로의 회복

         3) 인자 아담의 후손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다.

             A. 하나님의 보좌 우편(스데반)

             B. 하나님의 인간 구원을 위한 최후의 포석

             C. 요셉 왕의 버금수레를 탄 통치자

             D. 모세 이스라엘의 그 선지자(The Prophet)

             E. 다윗 전능자의 그늘 아래의 왕

             F. 다니엘 샤 한 샤 아래 최고 통치자

             G. 십자가의 왕 예수님

             H.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인자

             I. 하나님의 형상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

         1)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A. 성경 속 하나님의 아들

                 a. 신약 성경

                 b. 구약 성경

                     a) 창세기 6장

                     b) 욥기

                         ㄱ. 문자적 해석

                         ㄴ. 문학적 해석

                         ㄷ.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천사는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가?            

             B. 영원발생설의 오류

         2)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의 발자취

             A.  인자들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라는 복음

                  a. 하나님의 아들 스데반

                  b. 사도행전의 복음 전파 4 단계

                  c. 로마시대 이후의 순교의 피를 먹고 자란 종교개혁 부흥

                  d. 존 후스의 체코 부흥

                  e. 재세례파(침례교)의 순교의 피

                  f. 청교도 부흥

                  g. 존 웨슬리 시대의 부흥

                  h. 미국의 부흥

                  i. 조선 부흥


    (3)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         

         1)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a) 자기노력

                     b) 자기의

             B. 인본주의

             C. 기복주의

         2) 거짓신앙의 심각한 폐해

             A. 복음의 서진: 심각한 역사 해석 오류

                a. 동양: 복음의 박멸

                b. 서양: 복음의 변질


    (4) 살아있는 신앙

         1) 사귐이 있게 하려

         2) 사귐을 거부하는 신학적 오류

         3) 하나님의 임재


    (5) 1세기의 도전 - 1세기 거짓신앙

         1) 갈라디아

         2) 갈라디아 교회의 시작

         3) 율법주의- 갈라디아 교회의 거짓신앙

             A. 율법주의의 심각성

             B. 율법의 본원적 기능


    (6) 우리 시대의 거짓신앙

        1) 우리시대 거짓신앙

        2) 갈라디아 거짓신앙의 핵심- 율법주의

        3) 우리시대 거짓신앙의 핵심- 싸구려 신앙고백

        4) 십자가의 능력


    (7) 사명: 회복된 인자들에게 주신 태초 명령의 회복

         마태복음 28장: 관계 지향적 지상명령






(3)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은 열방을 다시 살리는 부흥의 주역들이 된다. 그들을 통해 열방은 죽음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다. 사도들의 시대에도 그들은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나아갔다. 그 폭발적인 생명력으로 구대륙 전역에 복음을 전했다. 도마 시대에 전해진 복음은 인도에 그 생명력을 유지하여 2000년 넘게 살았다. 지금도 도마의 신앙을 가진 자들이 인도에 있다. 사도들의 순교와 복음 전파에 대한 수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심지어 복음은 이곳 한반도의 남단 신라 지역에까지 흔적을 남겼다. 히브리어로 된 비석이 있다. 그 비석엔 도마라는 이름이 남아있다. 양을 돌보는 목자의 그림이 있다. 불국사 안에 십자가가 있다. 신라 왕릉 주위엔 히브리인들의 생김새로 샌들을 신고 있는 석상들이 있다. 또 역사적인 기록에도 이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 이렇게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들 즉 두 번째 아담의 후손들은 놀라운 생명력과 권세로 열방을 회복시켰다.
그럼 원수들은 이를 두고 보고 있었을까? 대적하는 원수도 그 책략을 발동하여 아담의 후손들과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을 대적했다. 원수는 거짓 신앙을 퍼트림으로 아담의 후손들의 권세와 그들에게 맡겨진 복음을 무력화시키려 했다. 거짓 신앙은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를 만든다. 죽은 정통주의란 그 교리적 내용은 동일하지만 생명력은 없는 신앙을 말한다. 교회는 교회인데 하나님을 만난 자는 없는 마치 모양은 동일한데 죽어있는 화석과 같은 신앙을 말한다. 이 화석화된 신앙을 대표하는 거짓된 신앙이 있다. 바로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다. 이 셋은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서로를 지탱한다.


1)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의 융합체


a.    율법주의


 그중 하나가 율법주의였다. 이것은 인간의 타락과 함께 계속 존속해 오는 것이고 언제든지 참된 복음이 나타나면 대적하기 위하여 반드시 일어나는 해충과 같은 것이다.


a)    자기 노력

 인간의 타락의 본질도 본질상 이 율법주의와 깊은 연관이 있다. 골로새서에 ‘붙잡지도 마라, 맛보지도 마라, 손대지도 마라. [85] ’라는 것인데 그것은 창세기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계명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먹지 마라’고 하셨다. 그런데 인간은 거기에 자기 노력을 더한다. 그것이 바로 ‘만지지도 마라’는 것이다. 율법주의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노력을 더하는 것이다. 자기 노력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실패의 시작인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아담의 삶도 또 그 후손들의 삶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삶이어야 했다. 피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을 닮은 아들들로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 보다 조금 못한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삶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한 삶이다.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어떠함을 철저히 알 수 있다. ‘너희는 신들인데 인간처럼 죽는구나’[86]라고 탄식한 시편 기록자의 말과 같이 하나님을 떠난 우리는 비참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것을 모르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율법주의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살 수 있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무지다. 그리고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하지 않는 불신앙이다. 하와도 철저하게 하나님을 신뢰했다면 그냥 뱀이 속이는 시도를 했을 때 결코 자신의 계명 즉 만지지도 마라는 것을 추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의가 아닌 자신의 의로 살려는 것이다. 우리도 스스로 노력해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고 그래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다면 그것은 철저히 율법주의에 속한다. 대부분은 그것이 율법주의인 줄 알지도 못한다. 왜 무당들이나 절에서 비는 사람들처럼 교회에서 치성을 드리는지 알지를 못하는 것이다.


b)    자기의

 그 모든 것은 오직 인간의 노력에 의해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율법주의의 발로인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절대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삶을 살 수가 없다. 팔복이 포함된 산상수훈에 말씀하신 기준만 보아도 인간은 그것을 만족시킬 수가 없다. 우리의 노력에 의한 자기의는 결코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서기 어렵다. 그 노력의 극한에 이른 자들이 바리새인들이었다. 그들도 결코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의를 가지지 못했다. 우리는 노력으로 하나님 앞에 결코 옳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 그래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던 사도 바울은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느냐? (롬 7:24 바른)’라고 했다.


 인간의 자기의는 다양한 형태로 타나 날 수 있다. 지식을 추구할 수도 있다. 영지주의가 그런 분파였다. 신비한 능력을 추구하기도 한다. 그런 것이 신비주의다. 영적 지식을 소유함으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은 특별한 존재로 여긴다.  신비한 능력을 소유함으로 특별한 존재로 인정받으려는 것도 같은 모습이다. 영적인 지식이나 신비함을 경험하는 것은 우리 신앙에서 당연하다. 그런데 이를 통해 자신의 의를 추구한다. 자기 노력의 삶은 반드시 실패한다.
결국 이러한 모습들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자기중심으로 무엇이든 해결하는 것이다. 그것이 인본주의다.


B.    인본주의


 휴머니즘은 박애주의로 생각되어 선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본주의는 박애주의와는 다르다. 신본주의의 반대말이다. 즉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은 신본주의다. 자신이 중심이 되는 삶은 인본주의다. 자신의 방법과 자신의 힘과 자신의 생각대로 사는 것이다. 율법주의는 인본주의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40일 철야를 하는데 왜 인본주의냐고 물을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목적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자기의 성공과 자기의 행복이 목적인 것이다.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닌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을 이루는 방법도 자기 방법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살지 않는다. 오직 자기 욕심을 이루기 위해 자기 방법대로 노력하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도 자신의 욕심을 따라 듣는다. 욕심을 따라 잘못된 영적 근원에서 음성을 듣게 된다. 오직 하나님만이 목적이 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시행착오가 있을 수 있으나 결국 하나님께서 올바른 곳으로 인도하신다. 잘못된 신비주의나 능력주의도 이런 의미에서 인본주의다. 이런 신앙은 결국 기복주의로 흐른다.


C.    기복주의

 자기가 목적이 되고 자신의 욕심만 따라 살게 된다. 기복주의는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연인이 나보다 내 돈을 더 사랑한다면 기분이 어떨까? 기복주의는 이런 짓을 하면서도 사랑을 운운한다. 기독교 안에 너무 만연해 있어서 자신들의 행위가 기복주의인지 알지도 못한다. ‘하나님 저의 자식을 주님이 원하는 곳에 써주세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부모의 기도는 이래야 한다. 그런데 수능전력기도회를 하거나 서울대 합격 감사헌금을 드린다. 차라리 절에 가서 빌 것을 교회에서 하고 있다. 가짜 기독교인들아 회개하여 참된 기독교인이 되던지 아니면 차라리 절에나 다녀라. 너희의 행위가 역겨우니 하나님의 얼굴에 똥을 들이미는 것과 다르지 않은가? 이 말에 반발심이 생긴다면 당신은 눈먼 소경의 영적 상태에 있다. 한국교회 전체가 소경이라도 그 전체가 잘못된 것이다. 장로나 권사나 구역장이 되기를 욕망하는가? 하나님께서 섬김을 위해 강권적으로 임명하신 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에 불과하다. 당신의 길은 지옥이요 당신의 정체성은 지옥의 불쏘시개다. 인간이면 누구나 다 그런 거 아니냐고? 그렇다. 그러나 그런 인간은 모두 거듭나지 못한 인간일 뿐이다. 사람으로는 불가능한 삶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불꽃이 당신 안에서 당신의 전생을 불사르지 못한다면 당신은 지옥의 불 쏘시개일 뿐이다. 지옥의 불길보다 더 뜨거운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지 않으면 당신의 열심은 거짓이다. 인간의 노력으로 이를 수 있는 그 어떤 경지도 구원의 표증이 되지 못한다. 오직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만 하실 수 있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그런 기적과 같은 기준이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보다 나은 의가 있어야 구원의 표증이 되는 것이다. 그런 능력과 은혜는 오직 위로부터만 부어질 수 있다. 그러니 그 은혜가 임할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기도해야 한다.


2)    역사 속 거짓신앙의 심각한 폐해


 거짓신앙의 심각성은 역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서구에서 복음을 대적한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거짓신앙이었다.


A.    복음의 서진: 심각한 역사 해석 오류


 일반적으로 복음은 서진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복음은 서진하지 않았다. 단지 그렇게 보여지도록 사단과 그 졸개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 땅끝은 스페인이나 서쪽의 어떤 지역이 아니었다. 누구나 생각하듯 땅 끝은 세상의 끝이다. 우리가 갈 수 있는 모든 곳의 한계선이다. 동서남북 모든 곳 끝이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족족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다. 사도들도 복음을 들고 열방 모든 곳으로 갔다. 바울은 로마를 향해 갔다. 도마는 인도를 향해 갔고 그를 통해 전파된 복음은 동방의 끝자락 신라에도 그 흔적을 남겼다. 불국사에는 십자가가 발견되었다. 경남 함안에는 히브리어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 비문에는 도마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경남 한 사찰의 벽에는 목자와 양을 그려놓은 벽화가 있다. 왕릉의 지신상들은 중동인들의 외모를 하고 있고 그들은 샌들을 신었다. 옷도 중동인들의 옷이다. 1세기 초대 교회의 복음은 이곳 한반도에까지 전파되었다. 복음은 땅끝 모든 곳을 향해 간다.


 그런데 단지 그 복음을 대적하는 전략이 동서양에서 서로 달랐을 뿐이다. 이 전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동서양의 기질의 차이와 정치제도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동양과 서양 모두의 북부 스텝지역과 그 위쪽은 유목민족의 기질과 그에 맞는 정치제도가 있었다.


a.    동양: 복음의 박멸


 동양은 적절한 비가 내리고 햇볕이 풍부한 기후로 인해 쌀농사 지역이 되었다. 동양은 논에 물을 공급하기 위해 마을 공동체가 협동해야 했다. 협동적이고 마을 전체가 함께 하는 것에 순응해야 논농사를 짓고 살아남을 수 있다. 그래서 협동적이고 순종적인 기질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렇게 공동체적이고 순종적인 기질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동체는 강력한 리더쉽을 필요로 했다. 누군가 공동체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논으로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효과적으로 만들어야 했다. 서로 자신의 논에 먼저 물을 대려는 욕심을 제어하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도록 강제해야 했다. 절대권력을 가진 리더가 필요한 것이다. 그곳에서 발달할 수 있는 정치제도는 절대왕정이다. 강력한 왕권을 통해 공동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정체제도가 동양 사람들의 기질에 적합한 것이다. 그래서 동양에는 유교사상이 우위를 차지했다. 이런 사회에서 전체와 다른 자기의견을 주장하는 것은 공공의 적이 되는 길이다. 마치 논농사를 공동체와 협의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수로의 물을 허비하여 마을 전체에 피해를 입히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마을 전체의 농사를 망치게 되고 결국 보릿고개에 마을 전체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자가 된다. 그런 자는 공동체를 위해 제거되어야 했다. 동양의 공동체적 문화에서 서양의 개인주의적 사고를 가지는 것은 사회로부터의 고립과 죽음을 자처하는 길이 된다. 이러한 체제 안에서 사탄이 복음을 대적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절대 왕권을 통한 복음의 박멸이다. 강력한 왕권이 복음을 박멸하는 도구가 되었다. 원래 사회가 가지고 있던 종교와 문화와 완전히 다른 복음은 공동체적 문화에서 사라져야 할 공동체의 적이 되었다.


 동양에서 왕이 지적하여 대적하면 무엇이든 사회의 악이 되고 박멸되게 된다. 왕권이 아닌 다른 권력은 모두 무너져야 한다. 다른 권력은 모두 역적이다. 복음은 왕보다 더 절대 권력인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파한다. 당연히 왕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자신의 절대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 동양에서 원수들은 복음을 박멸하는 길을 택했다. 그러나 복음은 박멸되지 않았다. 인도에서 복음은 살아남았다. 시대 시대마다 복음은 동쪽 땅끝이었던 한반도에도 전파되었다. 그 복음은 절대왕권이 있던 시절엔 박멸의 길을 갔다. 그리고 한반도가 서구화되었을 때는 거짓신앙으로 변절시키는 길을 택했다. 즉 화석화된 죽은 정통주의로 만들었다.


b.    서양: 복음의 변질


 서양은 비가 부족하고 햇볕이 부족한 기후로 인해 밀 농사 지역이 되었다. 밀 농사는 수로를 통한 물 공급 시스템이 필요 없다. 농사는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서양의 개인주의가 출발했다. 이러한 기질이 기반을 이루고 있는 서양에 절대왕권은 들어설 수가 없다. 개인주의적이고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서양에서 절대왕권은 오래갈 수 없었다. 시저도 절대왕권을 원하다 살해당했다. 나폴레옹도 심지어 히틀러도 몇십 년을 버티지 못했다. 이러한 서양에서 왕권을 통한 복음의 박멸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왕권이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핍박하려고 하면 그 반대세력이 보호하고 나설 가능성이 높다. 종교개혁 때도 개신교가 살아남은 것이 이러한 서양의 권력구도 때문이었다. 그래서 악한 영들이 서구에서 복음을 대적하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박멸이 아닌 복음의 변질이다. 로마시대에도 콘스탄틴을 통해 기독교를 국교화했지만 태양신의 축일을 크리스마스로 만들고 태양신의 부활일 즉 춘분을 부활절로 만들었다. 이뿐 아니라 수많은 변절과 희석이 그 안에 있었다. 그중 핵심적인 것이 참 믿는 자가 세례 받고 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고백한다고 입술로 말만 하면 교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를 반대하고 참으로 회심한 사람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돼야 다고 주장한 자들은 수많은 박해 속에 순교를 당했다. 중세 기간 동안 순교한 자들의 수가 600만 명 정도 된다. 중세 인구가 3400~11200만 정도 되던 시기였기에 그 수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엄청나다. 이 시대에 등장한 변절 중 하나가 유아세례다. 지금 우리도 행하고 있는 것인데 유아세례는 성경적인 근거도 없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유아세례의 근거가 된다고 제시한 본문이 있는데 사실 유아 세례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본문이다. 이 시대의 변절은 수많은 이교적인 풍습을 교회 안에 불러들였는데 사실 신학교도 헬라의 이교적 풍습을 따라 만들어졌다. 교회의 건축 양식은 헬라나 로마의 신전들을 모티브로 해서 만들어졌다. 그런 신전 건물(교회)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생활도 사실 기독교의 유산은 아니다. 모두 헬라의 유산이다. 교회 음악의 시초도 아리스토텔레스의 건축과 색채와 소리를 통해 사람들을 사로잡는 경외감(the sense of sublime) 이론에서 출발한 것이다.  (진에드워드, 2020년 4월 10일)


 초대교회 이후 서방에서 교회가 번성한 것 같지만 사실 구원받은 수는 극히 적다.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와 같이 잎사귀는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다. 거짓신앙은 복음을 대적하는 데 사용된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자신들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항상 위클리프나 후스, 폭스, 웨슬리를 박해했다. 죽은 정통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들의 교리는 정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기독교의 지식을 습득했을 뿐이다. 기독교인은 아니다. 이렇게 속임을 통해 어둠은 복음을 대적했다. 거짓신앙을 팽배하게 만들어서 그 거짓신앙을 통해 복음을 대적했다. 그래서 거짓신앙은 무성하지만 복음은 거짓신앙에 의해 서서히 고사되고 지리멸렬하게 만들었다. 이것이 거짓신앙의 무서움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서양의 거짓 신앙을 다루고 있는 것은 현대 우리의 사상과 정치체제가 서양의 그것에 속해 있고 한국교회 안에 어둠의 전략이 바로 거짓신앙이기 때문이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저주받아 말라죽게 된다.


(4) 살아있는 신앙


1)    사귐이 있게 하려

 형제들아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묻는다면 회개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성령님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사영리나 기타 복음 전도를 받고 그 지식에 동의하여 신앙고백을 하였다면 당신은 신앙고백자는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아닐 수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는 것을 뜻한다. 성령님은 영이시므로 성령님이 마음에 오셔도 스스로 지각할 수 없다는 것은 거짓이다.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의 사귐이다. 만남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성경 속에 그런 만남은 기적이 아닌 일상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인과의 만남의 일상을 기록한 책이다. 신앙은 하나님과 철저히 인격적이고 긴밀한 대화의 자리에 나가는 것이다.


요일 1:1-3 바른
1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고 우리가 들었으며, 우리의 눈으로 보았고, 우리가 주목하였고, 우리의 손으로 만져 보았다.
2그 생명이 나타났다. 그래서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보았고, 너희에게 증언하며 전하고 있다.
3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너희에게도 전하니, 이는 너희가 우리와 서로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다.

요일 1:1-3 KJV
1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which we have heard,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which we have looked upon, and our hands have handled, of the Word of life;

2(For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it], and bear witness, and shew unto you that eternal life,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unto us;)

3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declare we unto you, that ye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truly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요일 1:1-3 YLT
1That which was from the beginning, that which we have heard, that which we have seen with our eyes, that which we did behold, and our hands did handle, concerning the Word of the Life--

2and the Life was manifested, and we have seen, and do testify, and declare to you the Life, the age-during, which was with the Father, and was manifested to us--

3that which we have seen and heard declare we to you, that ye also may have fellowship with us, and our fellowship [is] with the Father, and with His Son Jesus Christ;



 요일 1:1절에서 ‘들었고 보았고’라는 말은 한국어 번역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영어 번역에는 현재완료시제다. 영어 번역은 동작이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이어짐을 뜻하는 현재완료의 용법이다. 헬라어 완료시제는 현재완료, 과거완료가 있는데 여기에 사용된 동사들은 현재완료 시제다. 헬라어 현재완료는 영어와 차이점이 있지만 그 해석 중 영어의 현재완료와 같은 역할을 하는 측면의 해석이 있다. 여기 이 본문은 영어의 현재완료와 같은 해석을 할 수 있다. 즉 과거에도 보았고 계속 보았고 현재까지 보고 있다는 뜻인 것이다. 즉 만남인 것이다. 그래서 요일 1:3절에 ‘사귐이 있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요한이 요한 서신들을 기록한 시기는 당연히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셔서 이 땅에 계시지 않을 때였다. 그런데 요한은 어떻게 사도들과 믿는 자들이 예수님을 계속해서 만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일까? 성령님 안에서 영과 영의 인카운터로 만나서 사귐이 있는 것이다. 요한의 글들뿐 아니라 성경 66권은 사귐을 자연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사귐이란 그분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찬양을 드린다고 상상하는 게 아니다. 그것은 그냥 관념일 뿐이다. 상상 임신이 임신이 아니듯 상상 사귐은 사귐이 아니다.


 사귐은 하나님을 보고 그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것이다. 사도들과 형제들은 태초부터 계셔오시는 생명의 말씀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예수님을 보는 사귐에 초청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에도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계속 그런 사귐을 해왔는데 이제 너희도 그 사귐에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 초청은 이미 과거에 수신자들이 예수님을 믿을 때 초청을 받은 것이고 요한은 그것을 다시 한번 그들에게 상기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성도는 하나님을 정말 만나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성령님이 내 안에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이다.


2) 사귐을 거부하는 신학적 오류

 많은 교회와 신학자들이 이 사귐을 모른다. 심지어 세대주의자들 중에는 이런 사귐이 사도시대 이후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성경에는 있는데 지금은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성경에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 말씀하셨던 하나님께서 지금 나와는 왜 못 만나신다는 말인가? 평양 대부흥 같은 부흥의 시대나 개인적인 부흥이 임한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만나왔다. 이건 신학을 논하기 전에 세 살 배기도 글을 모르는 노인네들도 다 알 수 있다. 성경의 집필이 끝난 다음에는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성도를 만나시지 않는 것인가?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만나신 것은 성경 집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단지 성경은 그 만남의 기록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아담의 후손들을 만나고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원하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그 하나님과 아가서와 같은 밀월의 사랑을 성도와 나누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하나님 만나지 못한 것이다. 한 번도 만나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아니 무당도 귀신을 만나는데 성도가 하나님을 못 만난다니 말이 되는가? 이것을 가지고 잘못 추구하면 신비주의로 빠지고 귀신에게 미혹될 수 있으니 이런 만남 자체는 위험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물론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아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성령님께서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하심으로 능히 분별할 수 있다.


 미혹을 두려워하는 사상은 기독교는 결국 샤머니즘보다 못하다는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그 정도 분별력을 주시지 않겠는가? 성경이 그 정도를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허술한 책인가? 이것은 분별의 중요성을 간과하자는 것이 아니다. 능히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도 못 만난 신앙고백자들의 사상을 대변하는 신학은 죽은 신학이다. 그곳에는 살아있는 생명이 없다.


 살아있는 신앙은 화석화된 신앙과 융화될 수 없다. 화석화된 신앙은 원수에게서 나온 원수의 영을 받은 옛사람으로 거듭나지 못한 상태다. 그래서 예수님의 영을 받은 살아있는 신앙을 대적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싫고 태생적으로 싫은 것이다. 예수님이나 사도들을 대적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살아있는 신앙이 문제가 있어서도 아니다. 단지 그냥 극도로 싫을 뿐이다. 이유로 붙이는 것들은 모두 핑계일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셔도 그 말을 듣지도 않는다. 전혀 엉뚱하게 곡해한다. 예수님도 못 알아보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나 몇 천년 후에 나타난 제자들 속에 있는 생명을 알아볼 수 있을까? 혼미케 하는 영들에게 속아 본능적으로 미워하고 대적하게 된다. 그것이 화석화된 신앙의 상태의 심각성이다. 단지 자신만 죽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신앙을 대적하게 된다. 스스로 자신이 화석화된 신앙을 가졌는지 의심이 된다면 이미 나는 복음을 대적하는 원수의 영을 받은 옛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성경에 기록된 복음을 소유한 성도를 극도로 싫어해서 대적할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그럼 이 비참함을 벗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형제들아 어찌할꼬 묻는다면 성경 안에는 답이 있다. 무엇보다 겸손히 살아있는 신앙을 달라고 하나님께 목숨을 걸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지식적으로도 올바른 기준의 신앙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과 선진들의 글들을 통해 배워야 한다. 부흥의 시대에 기록된 글들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먼저 회심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조셉 얼라인의 Call to the unconverted를 읽고 그가 제시한 성경적 근거가 무엇인지 그 성경구절들을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새물결 선교회의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마틴 로이드 존즈의 부흥을 읽어보기 바란다. 그리고 이 모든 책들에서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가 과연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 보기 바란다. 목사나 장로나 권사나 신학자라도 마틴 루터가 만난 하나님 그리고 죠지 폭스가 만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는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조셉 얼라인이 제시한 회심한 사람의 성경적 근거가 자신 안에 표징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는 어떻게 회심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지 조셉 얼라인의 책 속에서 성경적 근거를 찾고 그 지시대로 목숨을 걸고 기도하기 바란다. 이 외에도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글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살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기 바란다. 깊이 그리고 내가 보던 대로가 아닌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연구하기 바란다. 성경해석학에 따른 객관적인 연구법을 통해 연구하기 바란다. 단순한 성경해석학 개론서들이 아닌 실제적인 지침을 주는 연구법들을 찾기 바란다. 국내에서는 IVP나 프리셉트 연구원, 죠이선교회, 생명말씀사가 출간한 책들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의해야 할 것은 스스로 성경을 관찰하고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것에 초점을 두기 바란다. 주석서나 설교집을 참고하는 것은 성경연구가 아니다. 그냥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참고할 뿐이다. 마치 논문이나 리포트를 표절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성경을 연구하면 성경을 깊이 있게 볼 수 없고 그렇게 안 것은 나의 지식이 아니다. 그러니 확신도 있을 수 없다. 처음에는 참고할 수 있는 몇 권의 책으로 출발하면 된다. 그렇게 성경 연구법을 따라 하다 보면 자신이 찾아야 할 더 깊이 있는 연구법을 다루고 있는 책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깊이 더 깊이 성경을 연구하고 그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을 만나라.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신앙을 발견하라. 다른 이의 설교나 해석을 통해 신앙을 발견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다른 이에게 맡기는 것과 같다. 성경 속에 있는 바른 신앙을 발견하고 그 생명을 얻는 것은 생사가 달린 문제다. 거짓된 신앙 속에서 평생을 살다 간 대부분의 중세인들은 기독교인의 이름표가 붙어있었으나 지옥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이 죽음 후 천국을 기대하며 눈을 떠 보게 된 것은 지옥에 떨어진 자신이었다. 아마 지옥의 고통보다 더했던 것이 천국에 있으리라 확신했던 자신이 거짓신앙인으로 판명된 것일 것이다. 그는 평생 지옥의 백성으로 살면서 자신을 천국의 신앙을 가진 자로 착각하였다. 왜일까? 우리는 그렇지 않을까?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신앙의 선배들의 글이나 이 시대의 신앙서적을 읽더라도 스스로 성경을 통해 확인해야 한다. 그 책임은 담임목사나 유명 목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에게 있다. 자신의 판단에 의해 지옥에 가는 것은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심판대 앞에서 어떤 목사가 그렇게 말했다고 핑계하는 것은 효과적인 변명이 될 수 없다. 진리에서 벗어난 새로운 것을 발견하라는 말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참 신앙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들의 말이 아닌 성경에 의해 자기 스스로 발견하라는 말이다. 중세인들은 자신들이 초대교회 바리새인들이나 구약 광야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을 거역한 열왕 시대 신앙인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앞선 시대 거짓신앙을 똑같이 가졌고 동일한 지옥 길을 갔다. 눈이 가려지면 스스로 자신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절실함이 필요하다. 그 절실함이 그 시대 거짓신앙을 뛰어넘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신앙으로 달음질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고 찾으면 만나게 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임재

 창세기만 보아도 타락하기 전의 인간은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그 얼굴을 보고 대화하는 사이였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은 다시 그 관계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계시록은 그 최종적 완성이다. 생명수 강가에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있는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귐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물론 아직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서로의 모든 것을 가려짐 없이 보는 최종적 사귐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보이는 수많은 사귐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만남은 영적 인카운터로 서로 영과 영이 마주 보는 것이다. 그 상태에서는 상대의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고 긴 시간의 경험이 없어도 상대의 성품이 어떤지 그 상대의 속성이 어떤지 그대로 알 수 있다. 그것을 하나님의 현존 즉 임재에 들어간다고 한다.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라는 단어는 창세기 3장에 [87]  처음 등장한다. ‘하나님의 낯’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임재’라는 단어다. 하나님의 얼굴이 있으니 그곳에 하나님이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임재다. 히브리어 단어는 상당히 회화적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 앞에 살았다. 아담의 후손은 아담과 같이 그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렇게 영과 영이 서로 마주하여 보지 않고는 하나님의 성품이 어떠함을 알 수가 없다. 믿음은 하나님을 그분의 임재 가운데 봄으로 자라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보고 깨달아 그것을 믿는 것이다. 우리도 육신으로 누군가를 믿으려면 그 사람을 만나보고 겪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만남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본 적도 없는 분을 어떻게 믿는다는 것인가? 그분에 대해 기록된 글(성경)만 읽고 그분을 믿을 수 있는가? 하나님을 만나야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영적으로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그냥 스스로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는 만남이 없이 그냥 믿어진다는 것도 아니다. 물론 믿음의 사실은 그냥 믿어진다. 그러나 만남은 필수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어야 참된 믿음을 가지고 세상이 감당치 못할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왜 나는 성경에 나온 사람들과 같은 믿음이 없을까 고민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하나님과 얼굴을 맞대고 하나님을 경험해 보라. 당신은 세상을 놀라게 할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살아 있는 믿음은 핍박과 고난 중에도 그 믿음을 지켰다. 사도행전 17장의 데살로니가 에클레시아도 바울의 전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 바울이 그들과 처음 머문 기간은 단 3주였다. 그 후 바울은 핍박 가운데 그곳을 떠났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믿음을 지켰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바울이 1차 선교여행에서 전도한 도시들에 머문 기간은 평균 5개월 이하였다. 3주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 5개월도 안 되는 기간에 믿음을 가지고 순교의 자리에서도 믿음을 지키는 자들로 가득한 에클레시아가 세워지다니 어떻게 된 것일까? 이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다. 화석화된 신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다.


(5)    1세기 대적의 도전- 1세기 거짓신앙

 
바울의 2차 전도여행

1세기에도 복음을 대적하는 거센 도전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바울의 1~2차 전도여행 당시 다른 이들이 복음을 전하지 않았던 이방지역이었던 갈라디아(Galatia) 지역에 개척했던 에클레시아[88]를 향한 도전이다. 바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거짓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1)    갈라디아

 갈라디아는 바울의 고향이었던 다소(Tarsus)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이다. 다소는 시리아와 터키가 만나는 지역에 있다. 다소(Tarsus 타르수스)는 타르수스 산맥의 남쪽 자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물론 갈라디아와 다소가 있는 길리기아의 사이에는 리카오니아(Lycaonia)가 있다. 갑바도기아(Cappadocia)와 브리기아(Phrigia)와도 남쪽으로 닿아있다. 리카오니아 지역에는 이고니움, 루스드라, 더베(테베)와 같은 도시들이 있었다. 비시디아에는 안디옥이 있었다. 갈라디아 지역을 말할 때 보통은 터키 북부 현재 터키의 수도 앙카라가 있는 지역 갈라디아를 말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때로는 터기에 골족(켈트족, Celts)이 거주하던 지역전체를 일컫기도 했다. 북부의 갈라디아와 터키 중부의 비시디아와 리카오니아를 포함하는 넓은 골족 거주지 전체가 갈라디아였을 것이다. 사실 갈라디아라는 말 자체가 골족의 거주지라는 뜻이다. 그렇게 보면 갈라디아서는 골족들이 거주하던 갈라디아 지역으로 보낸 서신이 된다.


 갈라디아 교회는 지금처럼 한 지역에 세워진 교회당이나 그 교회당에 소속된 회중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었다. 그 지역 전체에 흩어져 있던 그리스도인 공동체였다. 갈라디아서의 수신지는 대한민국 국토 넓이 전체가 넘는 광범위한 지역 기독교 공동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교회의 개념과는 차이가 많다. 그 수신지가 그렇게 광범위하다는 것은 갈라디아서의 율법주의가 영향을 미친 범위가 광범위하고 그만큼 그 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사실 갈라디아 지역 외에도 교회가 개척된 곳이면 어디든 파고들어 교회를 교회가 아닌 생명 없는 주검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알아야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절규를 이해할 수 있다.


2)    갈라디아 교회의 시작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를 살피려면 교회의 시작부터 살펴봐야겠다. 갈라디아 지역 교회의 시작은 사도행전 13장에서부터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시작된 1차 전도 여행은 밤빌리아의 버가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리카오니아의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을 거쳐 다시 지나온 곳을 돌아 장로들을 세우고 에클레시아를 든든히 한 후 시리아 안디옥에서 마쳐졌다. 바울은 이 과정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 처음 출발한 전도여행 중 키프로스(구브로)에서 출발한 배는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그럼에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들은 강도의 위협과 굶주림에 노출되고 걸어서 왕복 약 1,000km 전도여행길을 갔다. 마가 요한이 그 길에서 중도 이탈한 것에 대해 사람들은 그를 쉽게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시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10명 중 10명 모두가 그 길의 출발부터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시대 이렇게 편한 선교도 모두 망설이는데 그런 길에 참여하겠는가? 바울은 마가 요한이 떠난 다음에도 그 길에서 수많은 고난을 당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거의 주검이 되었다. 그가 죽었다가 부활한 것인지 기절했던 것인지 알 수 없다. 실제로 바울이 형제들 가운데서 일어났다는 표현을 할 때 쓴 단어는 부활의 뜻도 있고 ‘일어서다’는 뜻도 있다. 그래서 문맥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는데 사실 문맥상으로도 판단하기가 난해하다. 그때 바울의 고난은 그렇게도 극심했다. 여인이 해산하는 고통과 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낳은 교회가 율법주의에 오염되어 주검이 되어가는 것을 본 바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식이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는 어미의 심정이 어떠하겠는가?


3)    율법주의-갈라디아 교회의 거짓 신앙

 이런 심각한 결과를 낳은 율법주의의 근원을 살펴보아야겠다. 처음 이방인 선교가 시작되었을 때 이방인 교회에 대해 유대인 교회는 그들의 민족적 선민사상에 기인한 잘못된 관점을 수정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갈등이 발생했다. 바로 할례를 포함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그것을 반대하는 사도바울과 바나바 등 이방 교회 사람들 간의 갈등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사도행전 15장 예루살렘 회의가 이루어졌다.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이방인의 구원과 이방인의 율법준행 문제를 다루었다. 이 회의가 있기 이전에 이미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시리아 안디옥에 와있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을 때 이 율법주의자들은 더 발 빠르게 움직여 시리아 안디옥을 거쳐 바울이 1차 전도 여행 때 새로 개척한 다소와 다소의 서북쪽에 있었던 리카오니아와 비시디아 지역을 향해 갔다. 그곳에서도 율법주의를 주장하며 하나님의 교회에 악한 누룩을 퍼트렸다. 후에 그 누룩은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때 개척했던 북부의 갈라디아 지역에 있는 교회에 까지 퍼졌다. 거짓 신앙은 유대주의 안에 포함된 누룩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주의하라고 했던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그들 안에 있던 거짓 신앙은 그 근본이 율법주의 인본주의 기복주의다. 심지어 신비를 추구하고 그 신비를 자기의로 삼아 자신을 높이고 타인들의 숭배를 받는 신비주의(영지주의)도 자기의를 추구하는 율법주의의 변종임을 앞에서 언급했다. 이에 대해서는 후에 더 자세하게 글을 쓸 예정이다. 일반적으로 이 율법주의의 수장으로 언급되는 사람이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다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던 야고보다. 그가 율법주의를 주장한 것이고 그에게서 온 사람들이(갈 2:12) 모세의 관례를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고 여겨진다(행 15:1)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잘못된 추측임을 알 수 있다. 야고보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야고보에게서 온 자들은 맞지만 그들은 야고보와 사도들의 뜻과는 상관없는 주장을 했음을 알 수 있다(행 15:24) 물론 사도들이 이방인 전도 초기에 이방인들의 율법 준수에 대한 정확한 기준이 없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이방인들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베드로의 환상과 고낼료 사건 등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발견했다. 또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회의를 통해 이들은 확실한 기준을 정했다.


 아마 갈라디아서는 예루살렘 회의 이전에 기록되었던 것 같다. 이렇게 보면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1차 전도 여행에 다녀온 비시디아 안디옥과 리카오니아의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지역의 교회가 최초 수신지가 될 것이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사도들을 만난 후라면 행 15:1절의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견해와는 다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어서를 보면 사도들에 대해 책망하는 부분들이 많이 보인다. 이것을 보면 갈라디아서 집필은 최소한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사도들의 입장을 정리하기 이전일 것이다. 예루살렘 회의 후라면 사도들의 의도를 알았고 최소한 사도들이 바울이 주장하는 이방인 성도들과 율법준수에 대한 견해에 동의했음을 알았기에 갈라디아서에서처럼 사도들에 대해 강경한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갈 2장의 바울의 책망을 보면 베드로와 바나바가 율법주의자들의 눈치를 보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명확한 입장을 정리한 후라면 베드로는 그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바울은 사도들에 대해 공격적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A.    율법주의의 심각성

 사도바울은 왜 사도들까지 비난을 했을까? 율법주의가 그렇게 무서운 것인가? 율법주의는 교회에 극심한 해를 끼친다. 바울이 율법주의에 대해 확실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 사도들까지도 대놓고 비판해야 할 정도다. 율법주의 안에 더 이상 복음은 없다. 복음은 파괴되고 예수님 대신 율법의 의가 자리하게 된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율법주의 안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이 복음을 잃어버렸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들은 정상적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한다. 바울자신이 바리새인으로 그렇게 살았던 것처럼 율법주의는 교회를 그렇게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하지만 실상은 생명 없이 죽어가는 죽음에 죽음을 덧대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은 죽음이다. 바울은 자신이 그 수많은 고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개척한 자식 같은 교회가 병이 퍼져 죽어가는 것을 눈으로 목도해야 했다. 그 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의 이름은 거짓신앙이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초대 교회도 거짓신앙으로 인해 진통을 겪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베드로도 율법주의자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그 정도로 거짓 신앙이 초대교회 안에서 왕성했음을 알 수 있다. 초대교회는 특히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도 구약의 율법적 전통을 준수했다. 예수님께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신 이후에는 구약의 제사제도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사도들이 처음부터 명확하게 안 것이 아니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구약 성전 희생과 화목 성취라는 것을 성령님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고 그 신앙을 사도들이 전파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 과도기에 율법의 준수에 대해 혼란이 발생한 것은 당연했다.
원래 구약이나 신약이나 믿음에 의한 의를 설명한다. 구약과 신약 시대를 막론하고 율법주의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예수님을 바라보고 믿는 의를 대적한다. 1세기에도 유대주의는 구약을 율법적으로 해석했다. 거짓 신앙은 1세기에도 있었으며 이사야나 예레미야 시대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1세기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앙은 앞선 시대의 거짓신앙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그 본질이 동일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구원을 인간의 행위로 얻으려는 것이 율법주의의 특징이다. 사도행전 15장 1절에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주장 자체가 율법주의의 특징인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만 그래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는 구원받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구원도 구원 이후의 삶도 모두 예수님의 공로로 가능한 것이 아니면 모두 거짓신앙이다. 심지어 그것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열심이라도 예수님을 통한 구원을 대적하면 그것은 거짓신앙이다. 바로 율법주의인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6절과 같이 구약도 믿음에 의한 의를 말씀한다. 심지어 율법에 의한 의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은 자라고 선언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 중 단 하나라도 어기면 의로울 수가 없고 율법의 정죄를 받기 때문이다(갈 3:10)


B.    율법의 본원적 기능

 여기서 율법의 기능 중 하나가 설명되고 있는데 율법은 정죄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기준이기는 하나 자연인은 그것을 완벽하게 지킬 수가 없다. 그래서 율법은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낙인찍는다. 사실 죄인이라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율법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 안에서도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수님을 믿게 되는 극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율법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율법을 정말 지키려고 해 본다면 알게 된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결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율법을 지키지만 마음속에는 탐심이 가득한 것을 철저히 깨닫게 된다.


(6)    우리시대의 거짓신앙

 만약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면 그는 철저히 속아 눈이 가려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자신은 율법을 잘 지키고 교회 생활 열심히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바리새인과 같은 상태다. 심지어 바리새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으면서 현실과 다른 자기 허상을 믿고 자기애에 빠진 나르시스적 인격장애자다.


1)    우리 시대 거짓신앙

 사실 말로는 은혜라고 하지만 실재로는 그 믿음도 없고 확신도 없으며 또 교회생활에서 열심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칭찬받기 원하는 신앙도 율법주의의 또 다른 형태다. 믿음의 의가 자신을 집어삼키고 자신 안에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타올라서 그 열망을 주체할 수가 없고 새벽부터 그 열정이 타올라 하나님을 위한 일만을 하게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구원받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이래야 바리새인들 보다 나은 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바리새인들보다 하나님 앞에 더 의로운 것이다. 물론 구원 자체를 얻는 기준은 오직 믿음이다.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다.. 그러나 그 구원받는 믿음은 나를 송두리째 변화시킨다. 변화의 능력이 나를 삼켜버린다. 바리새인들은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그렇게 노력하고 살았다. 하지만 참 회심한 자는 구원받기 위함이나 자기만족을 위함이 아닌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정이 속에서 불타올라 그 사랑으로 인해 바리새인보다 더 깊은 열심으로 살아간다. 감히 바리새인은 감당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온 세상이 버려도 바울과 같이 달음질하게 된다.


 그러나 당신의 열심이 특심이라고 해서 구원받은 징표가 될 수는 없다. 타고난 기질이 열심을 가진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애니어그렘 1번이나 8번이라면 특히 그렇다. 애니어그렘 1번은 자기만 옳고 8번은 그 기준이 파렴치하다. 모두 자기 기준이다. 우리나라 리더들은 특히 애니어그렘 1번이나 8번이 많다. 교회 리더들 중 특히 대형 교회 목사들은 대부분 애니어그렘 1번이나 8 번들이다. 열심으로 대형교회를 만든다. 그러나 그 심령 안 가장 깊은 곳에서 예수님께서 심어 놓으신 불꽃이 아닌 자기 기준이 불타고 있다면 그것은 지옥의 불꽃이다. 대부분은 많은 사람을 모으고 큰 교회를 세우고 많은 신앙고백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중세 교회는 그 전체 대부분이 지옥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유럽 전체를 압도하는 교세를 자랑했다. 그래서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해야 한다. 그들이 열심을 내어도 그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이다. 그것을 넘어설 수 없다. 그들의 거짓신앙은 거짓 매가처치들을 만든다. 그곳이 하나님이 세우신 곳인지 사람이 세운 곳인지 분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길이 있다. 그 담임목사가 행하는 신앙을 성도들이 모두 행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곳은 성령님께서 세우신 곳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열정이 순수한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행하는 신앙을 성도들은 감히 우러러 볼뿐 자신들은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곳은 사람이 자기 열심으로 세운 곳이다. 성도들이 열심으로 하지만 담임 목사의 경지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고 말하고 그 목사를 높인다면 그곳은 인간이 자기 방법으로 세운 곳이다. 물론 그 담임목사도 자신의 열정은 하나님만을 향한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눈이 가려지면 자신을 볼 수 없다. 무엇이 하나님의 길인지 말해 달라며 멀리 인도에서 나는 나드 향유를 수입하여 하나님께 드린 열심을 가진 자들이 과연 자신들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음을 알았겠는가? 예수님을 대적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눈이 가려진다는 것은 진리를 완전히 반대로 해석하여 대적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연인은 모두 그렇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거듭난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셨을 때만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상태의 비참함을 알아야 겨우 하나님 앞에 겸허히 진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자연인인지 거듭난 자인지 성경과 믿음의 선진들의 글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시대의 거짓신앙 속에 평생을 살다 지옥의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구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지옥백성들이었다. 복음이 서진했다고 믿을 정도로 그 수는 많았다. 한 때는 유럽 전체가 자신들은 기독교인라고 생각했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지옥 백성이었고 그 가운데 구원받은 자가 나오면 핍박하여 죽였다. 복음의 서진은 단지 원수의 허울 좋은 허상이었다. 바로 거짓 신앙이 그들 속에서 행한 속임수다. 이 시대도 비슷하다. 예수님께서 좁은 길, 바늘 귀라고 표현하신 이유가 있다.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길이 구원이다.


 죽은 정통주의는 교리적으로는 완전히 정통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적도 없다. 하나님의 형용을 본 적도 없다. 여기서 더 나가면 중세교회와 같이 아주 미묘한 교리 부분에 이단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교리는 정통을 유지한다. 그래야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거짓신앙 안으로 포섭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형용을 본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자신의 의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만이 할 수 있으니 그것을 할 수 없는 자들은 자신의 신봉자(노예)가 되어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자신의 추종자들에게 하대하는 것도 서슴지 않으며 그들을 자기 몸종 부리듯 하는 것도 서슴없이 한다. 이것도 자기의를 높이는 거짓신앙이다. 결국 그들은 자기 욕심에 미혹되어 사탄과 그 동료 악령들의 음성을 듣기까지 타락하게 된다.


 결국 거짓신앙은 사람들을 거짓성도로 만들고 거짓으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믿게 만든다. 그들의 신앙은 모두 모조품일 뿐 그 안에 구원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는 만남도 없다. 그들은 생화가 아닌 조화다. 모양은 같지만 향기도 없고 그 안에 생명도 없다. 또는 살아있고 모양도 비슷하지만 가라지다. 밀과 가라지 서로 닮았으나 하나는 알곡이 있고 하나는 단지 잡초일 뿐이다. 그들은 성령님에 취한 것이 아니다. 정말 세상 술에 취한 것이다.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라고 했다. 이 세대가 악하니 세월을 아끼라고 했다. 거짓신앙은 그렇게 인생들의 평생을 미혹하여 허비하게 하고 그 인생들이 죽어 눈을 떴을 때 그곳이 지옥이 되게 한다.


2)    갈라디아 거짓신앙의 핵심- 율법주의

 갈라디아서의 거짓신앙의 표면적인 모습은 바로 율법주의다. 율법주의는 육체의 모양을 내고 그것을 자랑한다. 자기 스스로 행한 것이 옳음을 인정받기 원하는 것이다. 1 세기의 배경하에 유대주의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님을 믿는 것에 더해 구약 율법도 행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중 유대인들이 핵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할례였다. 할례는 유대인들의 생각에 유대인의 표다. 이방인도 하나님의 자비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데 그때는 반드시 할례를 받아야 했다. 할례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의 몸에 새긴 증표다. 그래서 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 난지 8일 만에 받은 할례는 자랑 중에 자랑이었다. 바로 유대인 자신들이 나면서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표였다. 여기에 이방인으로 할례를 받고 들어온 자들은 이방 개였는데 아량을 베풀어 사람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그래도 그 원래 본질은 개들이었다. 그들은 말도 안 되는 아량을 베풂 받기는 했지만 여전히 나면서부터 유대인이 된 자들과는 비교도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개들이 할례도 받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유대인들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유대인의 선민사상은 자부심이지 신앙이 아니다. 오직 자기의에 불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거짓신앙이다. 그 핵심이 바로 할례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주장한 율법주의의 핵심은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3)    우리 시대 거짓신앙의 핵심- 값싼 신앙고백

 우리 시대 거짓신앙의 핵심은 무엇일까? 바로 값싼 신앙고백이다. 사영리나 기타 복음 전도를 듣고 믿는다고 지적이나 의지적으로 동의함을 고백하면 신앙을 고백했다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 안에는 입술의 말이 진실인가? 에 대한 검증도 없다. 그 지적 동의조차 확인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예수님(성령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거나 성령님의 세례는 포함되지도 않는다. 삶을 근원적으로 변화시켜 더 이상 세상에 살지 않게 하는 불덩어리나 육신의 더러움을 미워하게 할 거룩한 생수의 강은 없다. 자신의 삶을 통회하는 슬퍼함이 없다. 그렇다면 그에게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다. 저가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가 적용이 되겠는가? ‘영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가 적용이 되겠는가? 그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가 실제로 행해지겠는가? 사실 전도하는 자들도 그것은 기대조차 않는다. 단지 한 명을 교회로 오게 하는 것에 급급하다. 그리고 숫자를 채우고 자신의 의로 삼기에 바쁘다. 그 영혼이 구원받는 것은 나중 문제다. 교회 생활하다 보면 되겠지 하고 그냥 그것은 무시해 버린다. 사실 그렇게 영접하면 구원받았다고 교회에서 가르치니 그냥 구원받은 것으로 믿어버린다. 중세 기독교의 모습과 같다. 껍데기는 다르지만 그 속살이 같다. 그 중세의 거짓신앙을 벗어난 루터가 가지기 원했던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확신은 없다. 여러 번 강조하여 말하지만 루터가 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님을 믿음으로 의가 온다는 것을 모른 것이 아니었다. 단지 벼락에 맞아 죽은 친구를 보는 공포 앞에서 즉 지옥의 불길 앞에서 그것을 벗어날 의가 자신 안에 있다는 확신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지적 동의로는 가질 수 없는 확신이다. 오직 바울과 같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던 예수님을 만날 때만 가능한 일이다. 그 믿음은 루터와 같이 자기 생명을 걸게 만든다. 복음을 고수하기 위해 시대와 맞서 자신의 생명을 불사르게 만든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구원은 지금 팔고 있는 싸구려 거짓복음과는 다르다. 그들이 싸구려 복음을 파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 영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들을 통해 주어지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내는 헌금에 관심이 있다. 그리고 그들이 모여 형성하는 전체 숫자에 관심이 있다. 그 숫자가 많아야 어깨에 힘주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는 또 다른 면죄부를 팔고 있다. 중세에 돈 받고 죄 사함을 약속한 것이나 교회 숫자를 채우고 헌금을 하게 하려고 싸구려 신앙고백을 판 것이나 모두 면죄부를 판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떡 먹듯 하고 [89]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양을 보호하는 자들이 아니라 그 양을 잡아먹는 이리와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양들이 정말 구원받고 잘 자라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양들을 통해 자기가 어깨에 힘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전해 들은 사건이 있다. 한 단체가 있었는데 한 때 이단으로 몰렸었다. 그런데 그 단체가 이단으로 몰리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는데 그 사건에 대해 전해 들었다. 사실 여부는 잘 모르겠다. 사건 당사자의 설교 녹음을 들었지만 내가 직접 그 사건현장에 있지 않았기에 확인할 수는 없다. 아마 그 교회 집회 녹음을 들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전해 들은 것에 대해 그냥 이야기하려고 한다.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이 하기 바란다. 한 목사님이 다른 교회에서 집회하는 도중에 그 교회 장로님 한 분이 일어나서 회개하며 외쳤다고 한다. “목사님 지금까지 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교회에서 문제만 일으키고 담임 목사님 괴롭혔는데 이제 회개하고 진짜 예수님 믿겠습니다.” 너무 큰 은혜가 임하니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회개하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이 장로님을 따로 불러서 책망을 하셨다고 했다. “아니 당신이 지금 그런 소리를 하면 내가 뭐가 됩니까?” 자기 밑에서 신앙생활 수십 년 하고 장로까지 되었는데 구원도 못 받았다면 담임목사로서 자기가 체면이 안 선다는 말이었다. 그 이후로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그 집회를 인도한 목사님을 뒤에서 거짓으로 음해하고 이단으로 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담임목사님이 한국에서 아주 큰 교단에서 정치적 힘이 강했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집회를 인도한 분이 이단으로 몰렸다고 한다. 이 전해 들은 것이 사실일까?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다. 이외에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수도 없이 많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들을 떡 먹듯 먹는 자들이다. 그 영혼 하나가 구원받아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에 따르는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그 둘을 같이 생각해도 사실 마찬가지다. 그들의 신은 자기 배다. 거듭나지 않은 자연인은 모두가 동일하다. 선량한 것 같아도 동일한 죄인이다. 오죽하면 중세 수도사들의 필독서였던 명상록을 집필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극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로마황제였겠는가? 아무리 인품이 훌륭하고 지식이 뛰어나도 자연인은 어쩔 수 없다. 그 본능의 한계가 있다.


4)    십자가의 능력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한다.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것은 문자 상의 표현이 아니고 실제로 죽어야 한다. 그 옛 본성이 죽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것이 전환되는 것이다. 그 방향을 틀어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전날 삶은 잊어버리고 오늘 또 하나님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할 정도로 열정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새벽부터 그 사랑에 타오르다, 저녁 잠들 때에 지쳐서 쓰러지는데도 생각해 보면 자신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마음이 간절한 것이다. 자신의 전 재산을 나누어 주고 맨발의 광인 같은 전도자가 된 최춘선 목사님이 “맡긴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요. 그러나 (자신의) 불충성, 불순종 말도 못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때 그 말을 듣고 눈물이 흐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가짜다. 거듭나 하나님의 불덩이가 있는 자들은 그 말의 뜻이 무엇인지 듣자마자 목이 메어 올라오기 때문이다.


 새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을 살 수 있다. 율법의 의도인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 수 있다. 죄에 매여 율법을 지킬 능력이 없는 자들은 모두 죄의 종이다. 그러나 그 죄를 이기고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자들은 자유자다. 율법의 의가 아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하나님의 선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자신 안에 불타오르는 것이다. 오순절의 성령님은 그 불과 같이 우리 안에 타오르신다. 그렇게 불타 올라도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자신이 더 순종하고 더 사랑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슴이 메어진다. [90]


 예수님을 믿는 의로 사는 바울은 율법에 대해 죽었다. 십자가에 자신의 욕심과정을 못 박았다. 이 말은 율법을 행함으로 자기의를 의지하는 거짓신앙을 떠나 예수님을 믿고 그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능력으로 사는 하나님의 자원으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으로 사는 것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오직 예수님으로만 가능하다. 우리는 자신의 율법적인 의로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킬 수 없다. 오직 나는 나로 살아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할 수 없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하나님의 영광 앞에 나갈 수 있다. 이 말을 1세기 사도바울의 문체로 쓰면 다음과 같다.


갈 2:20-21 바른
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이다. 내가 지금 육체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21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는다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 된다.



(7) 사명: 회복된 인자들에게 주신

              태초 명령의 회복


마태복음 28장: 관계 지향적 지상명령

 마태복음 28장의 핵심 키워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목표 지향적 지상명령이 아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인간과 대화하고 거니셨다. 언제나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인간과 사귐에 있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과 함께 하셨고 그렇게 함께 하실 수 없음을 한탄하셨다(창 6:3, 13) 예수님께서도 제자들과 함께 함이 먼저였다(요 1:39, 요일 1:1,3)


 마태복음 28장의 구조를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살아나심(마 28:6, 7), 가라(마 28:7, 10, 19), 전하라(7말하기를…라고 하여라, 8알리려고, 10, 13말해라, 19세례를 주고, 20가르쳐), 가면 나(예수님)를 볼 것이다’가 반복된다.


 천사들(마 28:1~8)과 예수님(마 28:9~10)이 전하라는 내용과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전하라(마 28:11~15)는 내용이 대조를 이룬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과 그 부활을 믿지 않고 부활이 거짓이라 소문내는 것이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본 자들과 보고도 의심하는 자들도 대비가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는 것이다. 전해서 세례를 주고 예수님이 분부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다.


 마태복음 28장을 축약해 표현하면 ‘만나라’와 ‘만나게 하라’다. ‘만나라’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라’는 것이고 ‘만나게 하라’는 ‘제자들을 통해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라’는 것이다. 지상명령의 목적은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28: 18~20절은 목표지향적인 명령이 아니라 관계지향적인 명령이다.


 단순히 예수님에 대해 전하기만 하려면 성령님이 필요가 없다. 만남을 위해 성령님은 보혜사로 오시는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이 떠날 때 더 이상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4장 이후에 제자들에게 떠나신다고 말씀하실 때  어떻게 예수님을 따라갈 수 있는지가 그들의 관심이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처소를 예비하러 가는데 너희도 내가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안다. 내가 그 길이다. 그리고 또 다른 보혜사가 오신다. 그분이 너희를 보살피신다. 그리고 그분은 헬라어 알로스(다른)가 뜻하는 것처럼 그 본질이 예수님과 동일하시지만 독특하게 다른 분이다. 즉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 하신다라고 말씀하셨다. 여전히 동일한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오셔서 함께 하시고 만나주시고 지켜주시는 것이다. 세례를 받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도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는다는 것도 전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을 뜻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계시고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다.


 지상명령은 잃어버린 자식이 다시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완전한 보호아래 있게 하려는 것이다. 복음은 하나님을 만남이고 예수님을 만남이고 성령님을 만남이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시고 보호하시는 그곳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그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함께 함으로 가능하다. 바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는 것이다. 임재라는 단어는 어렵지 않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임재가 뜻하는 단어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지켜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사귐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렇게 하나님과 함께 있으니 빛 가운데 있게 되고 그 빛이 있으니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한다. 죄도 떠나게 되고 죄가 근접하지도 못하게 된다.


 이 만남의 지상명령을 위해 주신 권세가 하늘과 땅의 권세다. 예수님은 인자, 아담의 후손, 사람이 되심으로 그 권세를 받으셨다. 그리고 그 권세를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도 예수님 안에서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그 권세로 가서 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임마누엘의 권세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권세다. 인간에게 그런 권세가 주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자식으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있는 권세다. 하나님을 떠나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 권세는 없다.


 마태복음은 그 처음 시작부터 끝까지 만남을 핵심으로 삼고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 내가(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겠다(임마누엘)는 것이다. 바로 지상명령은 명령이전에 약속이다. 관계지향적 약속이요, 관계지향적 명령을 전하는 것이 마태복음이다.


 이 약속을 붙들고 만남의 명령을 따라 열방으로 나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순교의 길을 갔던 자들의 피의 발자취가 있다. 그들의 피를 먹고 복음은 땅의 사방 끝으로 달려왔다. 오늘도 영문 밖에서 불사름을 당하신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갈 자들을 하나님은 찾으신다. 그렇게 그들을 통해 모든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지면 그제야 끝이 오게 된다.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예수님을 주목하여 그분의 상처 난 손과 발을 만지는 날이 오게 되는 것이다.


 다시 오실 인자를 보는 그날이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님 오시옵소서. 마라나타(계 22)



[85]  2:21 바른 

21곧 "붙잡지도 마라, 맛보지도 마라, 손대지도 마라." 하는 것이니,


[86]  82:6-7 바른

6내가 말한다. "너희는 신들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나

7너희는 인간처럼 죽으며, 다른 지도자들처럼 쓰러질 것이다."


[87]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찬송받기 원하심이다. 창세기 시작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얼굴 즉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 그리고 계시록의 마지막 장면도 인간은 하나님이 빛이신 곳에서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와 함께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다른 표현으로 그것을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한다. 친밀함 가운데 하나가 되어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에녹은 살아서 하나님과 동행하다 죽음을 보지 않고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하게 되었다.


[88] 신약 성경에 부름 받은 자들 즉 구원받은 백성들의 공동체를 나타내는 단어다. 한국어로는 교회라고 하지만 사실 그 뜻이 많이 다름을 알 수 있다. 교회는 가르침과 모임이라는 뜻이 합해진 예배당에서 목사에 의해 설교를 듣는 모임이라는 뜻이 강하다. 원어 성경에 기록되어진 에클레시아는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그 공동체 자체를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차라리 거룩한 무리 구별된 무리를 뜻하는 단어가 성경의 에클레시아를 대체할 더 적합한 단어로 보인다. 좀 더 이 땅 흩어진 나그네 된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라는 개념을 강조하면 그것은 분회나 지방회라는 번역이 더 어울릴 것 같다.

 

[89] 시편 14:4 바른

4악을 행하는 모든 자는 무지하지 않으냐?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한다.

시편 53:4 바른

4악을 행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그들이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하나님을 부르지 아니하는구나.


[90] 이렇게 반복적으로 말하는 이유가 있다. 이미 거짓신앙을 가진 자들은 같은 말을 하여도 전혀 다르게 알아듣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번씩 기존 교회에서 쓰지 않는 용어를 사용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그래야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생각이라도 해보게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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