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1.3.2.3.15.7.1.5.1.3. 종교적 멸망
###### 01.3.2.3.15.7.1.5.1.3.1. 율법의 완성
###### 01.3.2.3.15.7.1.5.1.3.2. 성전의 완성
###### 01.3.2.3.15.7.1.5.1.3.3. 이스라엘 나라의 완성
###### 01.3.2.3.15.7.1.5.1.3.4. 구약 예언의 성취
###### 01.3.2.3.15.7.1.5.1.3.5. 나 예수의 답
###### #01.3.2.3.15.7.1.5.1.3.5.1. 사도행전 1장
###### #01.3.2.3.15.7.1.5.1.3.5.2. 누가복음 21장
###### ##01.3.2.3.15.7.1.5.1.3.5.2.1. 누가복음 21장의 문맥
###### ###01.3.2.3.15.7.1.5.1.3.5.2.1.1. 누가복음 19장
###### ###01.3.2.3.15.7.1.5.1.3.5.2.1.2. 누가복음 20장
###### ###01.3.2.3.15.7.1.5.1.3.5.2.1.3. 누가복음 22장
###### ###01.3.2.3.15.7.1.5.1.3.5.2.1.4. 마지막 요약을 통한 문맥 서술
###### ##01.3.2.3.15.7.1.5.1.3.5.2.2. 누가복음 21장 본문
###### ##01.3.2.3.15.7.1.5.1.3.5.2.3. 누가복음 21장 석의
###### ###01.3.2.3.15.7.1.5.1.3.5.2.3.1. 석의: 본래 시대의 눈으로
###### ###01.3.2.3.15.7.1.5.1.3.5.2.3.2. 석의: 본래 화자의 눈으로
###### ####01.3.2.3.15.7.1.5.1.3.5.2.3.2.1. 누가복음 21장 예언의 화자
###### ####01.3.2.3.15.7.1.5.1.3.5.2.3.2.2. 누가복음 21장 기록의 화자
###### ###01.3.2.3.15.7.1.5.1.3.5.2.3.3. 석의: 본래 청자의 눈으로
본래 의미를 찾는 석의에서 본래 들었던 청자의 입장에서 글을 보는 것도 중요한 요소다. 글은 화자가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래 청자(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읽어야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눅 21장의 청자들도 본문의 뜻을 예루살렘과 유대 속주의 멸망으로 인식했을까? 이를 통해 유대인들이 멸절될 것이라 인식했을까? 저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이 무엇이라 생각했을까? 이스라엘 나라는 회복될 것인데 유대 속주는 멸망하고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될 것이라는 대조적인 사실에 대해 어떻게 인식했을까? 이를 살피면 나 예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구약 다윗의 왕국은 예표였으며 진정한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다.
내러티브의 청자는 셋으로 나뉜다. 첫 번째 청자는 글을 읽을 자 즉, 내러티브로 된 글을 받게 될 수신자다. 두 번째 청자는 내러티브 속에 말하고 있는 화자의 말을 듣고 있는 청자다. 세 번째 청자는 눅 21:20의 병행구절인 마 24:15과 막 13:14에 있는 '읽는 자들은 알라'라고 언급된 '읽는 자들'이다.
첫 번째, 누가가 기록한 청자는 데오빌로였다. 그는 누가복음을 읽게 될 자였다. 데오빌로는 뒤에 사도행전도 읽게 되는 독자다.
두 번째, 누가복음 21장 글 속에서 나 예수의 말을 듣는 청자는 유대인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제자들이었다.
세 번째, 글의 독자(청자)는 데오빌로 외에 누가복음을 읽게 될 자들이었다. 이들은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절에서는 '읽는 자들'로 표현된다. 누가가 당대의 사람들을 독자로 인식했는지 아니면 미래에 오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독자로 염두에 두었는지 눅 21:20 구절 자체에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전후 문맥을 살피면 '읽는 자들은 알라(깨달으라)'고 한 대상은 예루살렘 멸망을 보게 될 유대인들이었다.
또한 글의 첫 번째 독자인 데오빌로가 받은 누가복음을 회람할 이방인들도 포함되었다. 데오빌로는 이방인으로 이방인 중에서 누가복음을 받았으므로 함께 한 이방인들과 누가복음을 회람하였다. 그렇게 회람하고 또 글을 필사하여 전달하는 과정들을 거쳐 수많은 사람들이 누가복음을 읽었다.
눅 21장의 첫 번째 청자(독자) 데오빌로는 헬라인이었다. 누가복음을 집필한 누가도 또 그 글을 읽는 데오빌로도 모두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이었다. 이 둘은 과연 누가복음 21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과연 누가나 데오빌로가 유대적인 배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눅 21장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누가는 이방인 의사로 바울의 동역자였다. 바울이 마지막 로마의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에도 누가는 같이 있었다. 누가는 바울과 그 곁에 있던 증인들을 통해 들은 내용들을 시간의 순서대로 자세히 기록하여 누가복음을 데오빌로에게 보냈다. 누가는 자신에게 이야기를 전해준 유대인들에게 눅 21장에 관해 자세히 물었을 것이다. 그래서 누가는 그것이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그러나 왜 저들이 멸망을 당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었다. 누가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또 누가의 글을 읽는 데오빌로는 예루살렘 멸망에 관해 어떻게 이해했을까? 누가는 사건 자체를 기록하는데 집중했다. 그 사건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앞에서 살핀 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된 사건의 문맥이 예루살렘 멸망 이유를 설명한다. 글을 읽는 독자였던 데오빌로는 글을 읽으며 그 문맥에 이끌려 사건을 이해하게 되었다.
누가복음의 세 번째 청자 중에는 이방인들도 있다. 누가복음을 읽게 될 자들은 누가복음의 기록 연대를 보았을 때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거나 듣게 될 이방인 성도들이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서의 기록 연대가 예루살렘 멸망 직전이고 누가복음을 받는 자는 데오빌로라는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데오빌로가 이방인으로서 이방지역에서 받은 누가복음은 주변의 이방인들의 교회에 회람되었다. 이방인으로서 믿음을 가지게 된 자들도 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구약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는지 의문을 품었다. 이러한 이방인 성도들에게 답을 주는 것이 누가복음 21장의 전후 글들의 문맥이다.
나의 나라(천국)는 혈통이나 나라나 땅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혈통을 따라 나의 나라에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믿지 않음으로 원 가지에게 잘려진 자들도 있는 것이다. 유대인 중 많은 자들이 잘려 나갔다. 모세의 시대에도 처음 출애굽 한 자 중 가나안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둘 뿐이었다.
누가복음을 읽는 현대인들도 데오빌로와 같은 이방인이다. 현대인들과 다르게 데오빌로는 나 예수와 동시대를 살았다. 그래서 동시대에 나와 함께 했던 증인들을 통해 데오빌로는 눅 21장에 대한 구체적인 것들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해 더 깊은 이해로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데오빌로와는 달리 시간적으로도 완전히 동떨어진 시대의 사람들이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나 예수 당대의 증인들을 통해 눅 21장에 대한 정보를 취득할 수 없다. 물론 역사적 기록을 통하여 배경 지식을 얻고 더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대 증인들의 증언과 사도들이 성령을 통하여 얻은 이해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순서대로 자세히 기록한 누가에 의해 누가복음에 담겨진 문맥이 현대인들을 데오빌로와 같이 깊은 이해로 이끌 것이다.
눅 21장의 두 번째 청자는 제자들이다. 저들은 나 예수의 말을 직접 들은 자들이다. 세 번째 청자 중에는 유대인들도 있다. 누가는 눅 21:13절에서 '읽는 자들은 깨달으라'라고 말하고 있다. 읽는 자들은 내 말을 직접 듣고 있는 제자들이 아니다. 누가복음을 읽는 자들을 의미한다. 그 읽는 자들 중에는 유대인들도 포함된다.
유대인들은 첫 번째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 계속 식민지의 백성이었다. 바벨론에게 예루살렘이 훼파되고 성전이 무너진 이후 유대인들은 계속 바빌로니아의 식민지로, 또 페르시아의 식민지로 알렉산더의 헬라제국 식민지로, 그리고 마지막 로마의 식민지로 역사를 이어왔다. 마카비(하스몬) 왕조 시절에도 단지 헬라 제국의 지방 자치국 상태였다.
주변 제국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수백 년을 보낸 유대인들은 식민지배를 받는 자신들에게는 나라의 회복만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치 구약 다윗의 왕조였던 남유다 왕조가 자신들은 다윗의 왕좌가 영원하다는 예언이 있기에 멸망당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던 것과 같다. 이는 예언을 믿은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예언을 잘못 해석하여 자신들이 믿고 싶은 대로 믿은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에서 약속된 이스라엘의 회복이 자신들에게 올 것이라 확신했다. 자신들은 포로가 되어 떠났던 앗시리아(앗수르)와 바빌로니아 그리고 헬라 제국과 로마에서 회복된 이스라엘 나라로 부름 받을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나라가 세계 열방의 빛이 될 것을 기대했다. 그리고 모든 열방이 자신들에게 배우기 위해 나아 올 것을 기대했다. 이것을 저들은 유대교가 세계를 지배하는 유대교 세계제국이라 상상했다. 그래서 그것을 이루어 줄 자, 메시아를 기다렸다.
이런 자들에게 예루살렘의 성전이 다시 훼파된다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또 성전뿐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가 영원히 멸망당한다는 것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성전의 훼파를 들은 제자들이 그때를 물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누가복음 21장에서 내가 말한 예언이다.
내 말을 믿은 유대인 기독교도들은 AD 68년에 예루살렘이 포위된 것을 보고 유대를 떠나 피신하여 살아남았다. 또한 저들은 더 이상 유대인으로서가 아닌 기독교인으로 살아감으로써 유대인 혈통 보존과 유대교 세계제국 건설을 자신들의 사명으로 삼지 않았다.
예루살렘 멸망 이후로도 유대인들에게는 기회가 있었으나 저들은 계속해서 나(예수님)와 나의 복음을 거부했다. 유대인은 계속 유대인 인종우월주의와 유대교 세계제국을 고집함으로 결국 그 혈통이 멸절하게 되었다. 저들은 열방에 흩어져 강간을 당함으로 더 이상 유대인이 아닌 강간범들의 자손이 되게 되었다. 그래서 저들의 얼굴은 유대인이 아니다. 그런데도 강간범들의 후손들은 여전히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 착각하며 팔레스타인을 강제로 점령하고 인종청소를 하고 있다. 나는 강간범들의 자식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저들의 회복을 이스라엘의 회복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저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다. 진정한 아브라함 자손들의 혈통은 기독교인들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기독교에 흡수된 유대인 혈통들도 자신들을 유대인이라 칭하지 않는다. 그들도 이미 자신들이 속한 지역의 민족들과 혼혈이 되어 종교적으로 민족적으로 혈통적으로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내용을 적고 있는 목적은 진정한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 살펴보기 위함이다. 결코 특정 민족을 비하하거나 멸시하려 함이 아니다. 내가 왜 나(예수님)의 사랑하는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주장하는 자들을 멸시하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나(예수님)의 나라는 세상 다윗의 왕국이 아니다. 그 다윗의 왕국이 세계를 정복함이 아니다. 나(예수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다윗의 집 즉 다윗의 장막은 나의 나라의 예표였다. 그것이 원형이 아니다. 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 다윗의 장막(다윗의 집)의 회복은 다윗 왕조의 회복이 아니다. 진정한 우리(하나님)의 나라, 즉 육신으로도 다윗의 혈통을 가졌으며 성결의 영으로는 부활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나 예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며, 태초의 원형의 우리(하나님)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