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누가 ‘쓸모’를 판단할 수 있느냐, 그 판단의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분명히 쓸모없는 사람이 있다. 쓸모없는 사람은 주로 교정기관이나 대형병원 중환자실에 있을 것 같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오히려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간의 존엄성을 강조하며 “오직 인간만이 목적 그 자체다.”라고 말했지만 ‘쓸모’에 대한 논의는 목적보다 수단으로써의 인간 인식에 대한 것이고 그러한 인식에서 사유하더라도 심정적으로는 쓸모없는 인간은 반드시 존재한다. 쓸모없는 인간의 존재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존재는 한다.
“사람은 저마다 존재의 목적이 있고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다”라고 한다. 그런데 “쓸모없는 사람이 있다”라고 하면 모순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모없는 사람이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 존엄의 개념, 삶의 소중함과 숭고함 측면에서 봤을 때 쓸모없는 사람은 인간 존엄을 훼손하고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자라고 정의하고 싶다. 그 사람이 쓸모없는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살면서 만나는 가장 쓸모없는 사람은 “경솔한 사람”이다. 경솔한 사람은 남의 인생을 간섭한다. 경솔한 사람은 본인이 맞고 상대가 틀리다고 전제하고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다. 경솔한 사람은 세상이 자기를 중심으로 돈다고 상상하고 그것을 강요한다. 경솔한 사람은 자기만 아는 사람이다. 자기만 중요하고 상대는 쓸모없다고 단정한다. 그런 사람 때문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 흔들린다. 그런 사람이 쓸모 있는 사람들을 흔든다.
서로 아무 상관없이 살면 좋은데 굳이 상관하고 엮여 고통을 창조하는 사람이 있다. 경솔한 사람은 남의 인생에 관여하기를 좋아한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누군가와 연결되려 한다.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쓸모없음을 본인도 알기에 연결되지 않으면 그 쓸모없음으로 인해 잠시도 못 견뎌한다. 부르디외가 정의한 저열한 아비투스를 지닌 자가 자신의 열등함을 숨기기 위해 더 악랄하게 행동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사람은 항상 내 주변에서 나와 연결되기를 시도한다. 조심해야 한다. 그런 부류의 인간을 걸러낼 수 있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지만 내 존재 목적과 삶의 가치를 한순간에 꼬이게 만들 수 있는 ‘쓸모없는 인간’을 빨리 식별하고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누군가의 삶을 방해하고 억압하고 있다’라고 생각되면 미안하지만 당신은 쓸모없는 인간일 확률이 매우 높다. 우리는 남의 인생을 간섭하거나 통제할 권리가 없다. 단지 그들이 요청하면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있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 그 자신에게 있어서 하나의 과제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태어남과 동시에 저절로 완전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도덕적으로 완전한 인격체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 속에 살며, 매 순간 ‘되어가는’ 존재로서 존재한다. 매 순간 되어가는 존재로서 온전히 존재하는 자가 쓸모 있는 사람이다. 매 순간 되어가는 존재는 아니더라도 무례하게 남의 인생에 관여하거나 뒷다리 잡고 늘어지지 않으면 저마다 나름대로 태어나 존재하는 목적이 있는 쓸모 있는 사람이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은 인간 그 자신에게 있어서 과제가 되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흠은 보지 못하고 남의 약점을 찾아 파고든다. 그 사람이 바로 쓸모없는 사람이다. 되어가지 않는 존재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라 되어가는 존재에게 방해가 되는 존재가 쓸모없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그런 방해를 받고 있다면, 지금 내가 그런 억압과 횡포와 경솔한 삶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꼭 기억하라. 내가 아니고 그가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의 하찮은 쓸모없음으로 인해 내 존엄과 품위를 조금도 의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절대 흔들리지 마라. 흔들리지 말고 당당하게 대하라. 내가 아니고 네가 쓸모없음을 당당하게 알게 하라. 흔들리는 그대여, 쓸모없는 인간은 버려 버리고 되어가는 존재로서의 지금을 온전히 살고 저 넓은 바다를 향해 가슴을 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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