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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안 Aug 13. 2022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1.

  “우리가 먹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 음식은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한다”라고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다. 모두 주지하는 바지만 생활속에서 늘 망각하는 말이다. 음식이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는 것은 양의 문제다. 적정량에서 제한할 수 없는 것은 결정장애가 아니라 중독의 문제다. 먹는 행위는 본래 생존의 문제였는데 이제는 중독의 문제가 되었다. 음식에 중독된 이들을 안타깝게 바라보지만 대안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히포크라테스’ 할아버지 얘기로 협박을 해봐야 듣지 않는다. “니가 먹는 소세지는 소, 돼지, 생선 등을 잘게 부수어 고기 색깔을 먹음직스럽게 만드는 보존제인 아질산염으로 버무려서 만들어지는데 이때 고기에 있는 아민이라는 성분과 결합되면 발암물질이 된다”라고 해도 소용없다. “니가 먹는 소세지는…”이라는 말이 시작될 때부터 이미 딴 생각을 한다. 문제해결이 어려워 보일 때 늘 하는 생각, ‘기본으로 돌아가라’라는 말처럼 먹는 것이 생존의 문제로 인식되도록 생각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는 것이 어떨까. 먹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살기 위해 먹는 습관이 되면 더 건강해지지 않을까. 가급적 적게 먹되 하루에 쓰는 에너지에 맞는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도록 데이터를 정해 두어야 한다. 먹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려면 적정량을 초과하지 말아야 한다. 건강한 몸과 행복한 마음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순환한다. 먹는 것은 생존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  


2.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잠”의 첫 문장은 매력적이다. ‘잠을 못 잔지 십칠 일째다’라는 말은 사실 거짓말 같다. 무카카미 하루키는 원래 뻥이 쎄다. 잠을 못 잔지 칠 일째라고 했어야 한다. 이 소설에서 서른 살 쯤된 여주인공은 잠을 못잔 것이 원인인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치과의사인 남편의 식사 세끼를 차려주거나 수영 강습을 받고 오거나 집안 일을 영혼없이 해낸다. 그런데 그 영혼없음을 식구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녀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도 그녀의 영혼없음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영혼없이 하는 일들이지만 그것이 영혼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 불면에 익숙한 세상, 타인에게 관심없는 친절, 행동은 있으되 영혼 없는 일상들로 채워진 현실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 소설의 끝에서 그녀는 몽유병의 일종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문득 잠이 쏟아져 차안에서 잠드는데 누군가가 와서 차를 마구 흔든다. 잠은 건강한 삶, 생동하는 일상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삶의 과정이다. 잠을 못자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것이다. 억지로 자려고 해서 자지는 것도 아니다. 계기가 필요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쓰고나서 ‘슬럼프를 극복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슬럼프에 의한 스트레스로 불면하는 밤이 길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17일은 좀 심했다. 7일 정도가 적정하지 않았을까.   


3.

  “우리가 읽는 것이 곧 우리 자신이 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요즘에는 텍스트를 읽는 것보다 영상을 통해 지적 욕구를 해소하고 동시에 즐거움과 감동을 얻으려는 게 확산되는 것 같다. 읽기를 통해 ‘인지적 참을성’을 기르고 깊이 있게 읽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깊은 감동, 마음속으로 깊이 각인되는 경험에서 오는 깨달음의 희열을 쉬운 것, 빠른 것, 직감적인 것들로 대체되고 있다. 이제는 대화하면서 휴대폰을 읽는 것, 아니 휴대폰을 읽으면서 대화하는 것이 일상의 모습으로 변한지 오래고 더이상 책을 보지 않는다고 뭐라하기에 지친 부모들은 그냥 모른 척 한다. 우리가 지금 휴대폰으로 읽는 것들은 분량이 길지 않은 것들이다. 분량이 길면 읽지도 않는다. 불량이 긴 글은 필자가 공감능력이 없는 것으로까지 인식된다. ‘그렇게 긴 글을 읽을 바에는 책을 읽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패쓰한다. 책을 읽지도 않을 거면서. 계속 짧고, 단편적인 사실들로만 나열된 단문의 기사, 에세이, 설명문들만 읽는 게 습관이 된 사람들은 맥락, 전개의 논리성, 사실의 합리성 등을 따질 겨를이 없다.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인식작용만 하기 때문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고과정이 두뇌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밥상머리에서 자녀와 휴대폰 덥고 대화를 시도하면 5분이 길게 느껴지는 것이다. 단편적인 질문과 대답만 한 두번 오가다 마는 게 현실이다. 그런 대화 패턴은 요즘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 회사 동료를 만나도, 회식을 해도, 친구들과 커피를 마셔도 대화의 소재만 다를 뿐 대화의 패턴은 다 거기서 거기다. 책 읽기를 권한다. 의미있는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간접 경험해 가기를 권한다. 삶이 풍요로워지고 대화가 풍요로워지고 생각이 깊어질 것이다.  


4.

  글쓰기는 용기가 필요하다. 글쓰기는 본질적으로 나를 공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나의 생각, 의도, 성격, 단점, 습관  나만의 것들을 모두의 언어로 공개하는 행위가 글쓰기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에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 아닐까. 예전에는 용감한 자가 미인을 얻었다. 나는 용감한 자가 좋은 글을 얻는다고 믿는다. 가장 좋은 글은 솔직한 글이다. 지금 세상은 읽을 글이 없는 세상이 아니다. 너무 너무 많다. 글의 홍수에 빠져 죽을 상황이다. 이럴  중요한 능력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있는 통찰력이다. 이런 시절에 가장 무서운 인간이 책을  두권만 그것도 우연히 읽은 인간이다. 그들에게는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할  있는 능력이 없다. 처음 아님 두번   놈을 일단 된장으로 단정하고 본다. 명문대 나온 국회의원들이 청문회나 대정부 질문에 나와서 내용의 일부를 인용하고 그것을 마치 불변하는 진리인  신봉하며 상대를 윽박지르는 모습을 보면 무섭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고 좋은 것과 허접한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그들의 직관력을 보면 너무 무섭다. 무식한 용감함이 무섭다. ‘얼마나 진실하지 않고 솔직하지 못한 글에 많이 속았으면 저럴까라는 연민의 감정까지 든다. 그래서 내린 결론. 가장 좋은 글은 많은 지식을 알려주거나 값진 경험을 전달하는  이전에 ‘진실하고 솔직하게  이라는 점이다. 그나마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무슨 글을 쓰든 솔직하게 쓰기 바란다. 보고서에 미사여구를 넣거나 창의적인 반전을 넣을 생각하지 말고 단백하게 거짓없는 내용으로 구성하기 바란다. 그게 조직과 상관과 내가 올바르고 유능하게 그리고 제명에   있는 방법이다. 그리고 계속 써나가는 용기를 내기 바란다. 인간은 ‘되어가는존재다. 하나의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꿈보다 매일 일기든, 블로그든, 에세이든, 인스타그램에 스스로를 쿨하게 공개하고 조금씩 다듬고 조정하며 성장하는 인간으로 살아가겠다는 용기를 내기 바란다. 야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음악이 좋아 기타 하나 들고  작사, 작곡하는 용기를  ‘부활 리더 김태원은  하나를 만들기 위해 1,000 번을 고친다고 한다. 쓰는 것은 결국 되어 가는 것이다. 되어 가려면 시도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게 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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