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다 암에 걸려도 당장 나에게 닥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고혈압은 숨 고르기 좀 하면 개선되는 증상이고, 빈혈은 소고기 한번 먹으면 괜찮아지는 현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30대 중반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40을 넘어가면서 여기저기에서 하자가 발생한다. 주기적으로 허리가 아파와 가끔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처럼 걸어 다녀야 하고, 칼국수나 빵 같은 것을 먹으면 두통이 생긴다. 그때와 비교해 시간이 흐른 것 말고는 스스로 변한 것이 없다고 여겨지는데 나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것들이 있다. 시간의 흐름 때문인지, 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호르몬의 변화 때문인지, 그저 마음이 약해졌을 뿐인지 알 길이 없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5세기 후반 그리스의 두 맹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쟁, 결과적으로는 그리스를 기울게 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에 나타난 철학이다. 폴리스를 중심으로 발전한 그리스인들은 유럽 대륙으로 영토가 확장되고 정치적 영향력이 뻗어 나가면서 역설적으로 정신적 불안감을 느낀다. 체계화되고 정교해졌다고 믿었던 그들의 사상체계가 외연이 넓어지면서 안정감을 상실해 가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토아 철학을 통해 논리적 체계성을 다시 세우고 견고하고 거대한 이론의 유기체를 만든다. 불안한 생활, 그저 흘러가는 삶에 공황을 느끼고, 그로 인해 지식인들은 스토아 철학의 핵으로 ‘잘 사는 것’에 몰두하는 철학을 집요하게 추구한다. 그래서 스토아 철학은 정신적 요구에 응답하여 나타난 것들, ‘삶의 지침’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구성된 특징이 뚜렷하다. 한 나라, 한 세계, 한 세기의 사상체계를 요약해 보면 이렇게 한 개인의 삶(인생)을 함축해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떤가? 시간의 흐름, 불안한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고, 스스로에게서 무엇을 찾고자 하는가? 우리는 지금 무엇에 몰두하는 철학을 하고 있는가.
삶은 결국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늘 조급하고 불안하다. 시간이라는 물속에 담긴 조각배 같은 것이 삶 아닐까. 조급증과 불안함은 무엇인가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지금 뭔가를 하고 있지 않아 불안하고 초조해한다면 스스로 삶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직장 생활하면서 ‘삶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세 명 만나 보았다. 지금 그 세 사람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제발)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쁜 안부조차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하기 때문이다. 그 세 사람은 공통점이 있다. 뭔가를 하고 있지 않아 본인만 불안하고 조급하면 좋을 텐데 주변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전염시킨다. 탁월하게 전염시킨다. 또 자꾸만 질문하는 특성이 있다. 돌아서면 본인이 지시한 것을 잊을까 봐 자꾸 되묻는다. 얼마나 했는지, 언제 할 것인지, 왜 아직 안 하고 있는지를 두서없이 반복해서 묻는 특성이 있다. 듣는 사람으로서 그게 노이로제가 되면 그 사람의 숨소리 변화로도 조만간 나에게 무엇을 물을지 감이 잡힌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을 듣고 있을 때면 자꾸 딴생각이 든다. 체취가, 목소리가, 손가락의 생김새조차 끔찍해서 자꾸 딴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야 지금의 시간의 흐름을 버틸 수 있다.) 내 표정이 영혼 없는 이유는 사실 그의 체취, 목소리, 손가락의 생김새가 원인이 아니다. 그들의 조급증과 불안함이 원인이다. 그것을 전염시키는 그들의 도덕적 악랄함이 본질적 원인이다.
스토아 철학은 세 가지 사상체계의 거대한 이론적 유기체다. logikon(논리학), physikon(자연학), ethikon(윤리학)이 각각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하는데 그것을 바라보는 방향성(시선)의 구분에서 세 가지를 구분한다. 이 세 가지 사상체계의 가치를 굳이 따질 수는 없겠지만(시선과 방향성은 가치의 우열이 아니라 종류의 구분의 문제이기 때문에) 혹자는 스토아 철학을 계란으로 비유하며 논리학을 계란 껍데기, 자연학을 노른자를 감싸고 있는 흰자, 윤리학을 모든 영양분을 가진 노른자로 비유한다. 결국 스토아 철학은 윤리학을 핵으로 한 하나의 유기체적 세 국면인 셈이다.
누구나 불안하고 조급할 수 있다. 어떤 면에서는 불안하고 조급하지 않은 사람은 성장하거나 ‘되어가는’ 존재가 아니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안하고 조급해도 우선 사람으로서 바르게 존재해야 한다. 그 중심에 올바른 윤리학이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면 그 존재가 끔찍해지는 것이다. 그 끔찍한 존재로 인해 숭고하게 존재하는 주변의 거룩한 존재들이 삶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슬프고도 가슴 아픈 일이다.
철학이란 결국 지혜를 추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지혜는 신과 인간사이에 관계된 내용의 지식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도덕적으로 끔찍한 존재로 인해 끔찍한 시절을 보내야만 한다면 예수가 유다에게 했던 말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 그러한 마음이 앞서 만난 조급하고 불안한 세 사람이 궁금하지 않은 이유이다.
고대 그리스는 정신적 불안으로부터 스토아 철학을 잉태하였다. 그 철학은 훗날 스피노자와 칸트뿐 아니라 수많은 지식인과 과학자,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고 사상체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우리는 정신적 불안으로부터 무엇을 잉태할 것인가. 삶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원인과 결과로 규정된다. 우리가 불안하고 조급한 이유는 결국 결과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어떻게든 내가 원하는 바대로만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당장, 지금, 여기서 우리를 가만히 있지 못하게 한다.
삶의 전제가, 그 바탕이 그저 흐르는 시간의 흐름이라는 것을 마음에 두면 처음엔 희미하게 보일지 모르나 “과정”, “흐름”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끼지 않을까. 우리의 정신적 불안을 “흐름”과 “과정”으로 인식하고 그것에 대한 사색과 관조가 깊어지면 어느 시점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 관계된 내용의 지혜들이 우리의 심연 속으로 자연스럽게 다가오지 않을까. 조급하게 추구하거나 불안하게 얻으려는 게 아니라 만물에 두루 존재하는 의미들을 사색하고 관조함 속에서, 과정 속에 존재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나름의 논리적 체계성, 이론의 유기체가 우리의 심연에 자리 잡아가지 않을까. 그것이 철학이라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