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잠그고 알몸이 되어 들어선 욕탕 안에는
수많은 '부장'과 '상무'와 '대표'들이 있었을 것이다.
혹은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실패한 자영업자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뜨거운 수증기 속에서 우리는 그저 비대해진 복부와 처진 어깨를 가진 '단백질 덩어리'일 뿐이었다. 직급이라는 계급장을 떼고 마주한 육체들은 지독할 정도로 평등했다. 수입 차 키를 쥐었던 손이나, 리어카를 끌던 손이나 비눗물 앞에서는 똑같이 미끄러웠다.
조직에서의 나는 내 몸의 주인인 줄 알았다. 하지만 사우나 거울 앞에 선 내 몸은 정직하게 고발하고 있었다. 굽은 등은 15년 치 보고서의 무게였고, 불룩한 배는 법인카드로 쌓아 올린 접대의 훈장이었다. 회사가 내게 준 것은 명예뿐만이 아니라, 내 육신을 서서히 갉아먹은 '관리 소홀의 흔적'들이었다.
옷을 입었을 땐 유능해 보였던 그 흔적들이, 알몸이 되자 그저 노화와 방치의 증거로 전락하는 순간의 비루함은 탕 안의 물보다 뜨거웠다.
찌질하게도 나는 사우나 안에서
옆 사람의 몸을 훔쳐보며 내 처지를 가늠했다.
저 노인도 한때는 누군가의 결재 서류에 불벼락을 내리던 호랑이 부장이었을까. 아니면 나처럼 퇴사 후 갈 곳을 잃어 이곳의 온기에 몸을 의탁한 떠돌이일까. 복수하고 싶었다. 나를 낡은 부품처럼 갈아 끼우고 매끈하게 돌아가는 조직의 비정함에 대해.
하지만 진정한 복수는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전장으로 뛰어드는 것이 아니다. 흐릿한 수증기 속에서 내 처진 살들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내 몸과 화해하는 것. 직급이라는 화려한 포장지가 없어도, 이 비루하고 정직한 몸뚱이가 곧 '나'임을 온전히 긍정하는 일이다.
오늘 나의 복수는 사우나를 나와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는 순간 완성된다.
셔츠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지 않아도,
구두를 광내지 않아도 괜찮다.
계급장을 뗀 피부 위로 스치는 공기의 감촉이 이토록 선명한데,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나는 이제 부장이 아닌, 제 몸의 주권을 회복한 한 인간으로 길을 나선다. 탕 밖의 세상은 여전히 춥지만, 내 몸 안의 엔진은 이제야 제 속도를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