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지구대 이야기 16.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이면 얼마나 좋을까?
금수저는 아니더라도 화목한 보통의 가정에서 자라기만 해도 정말 좋겠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축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돈도 없고 화목하지도 않은 가정에서 태어난다면 인생이 어떻게 전개될까?
안타까움이 크다. 일을 하다 보면 미래가 불쌍한 아기가 종종 목격된다. 물론, 내 예상과는 달리 어디선가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잘 자라고 행복한 아이가 된다면 소원이 없겠다. 정말 진심으로.
임대 아파트에서 신고가 들어왔다. 사실혼 관계의 남편이 싸우다가 가위를 들었고, 그 가위로 도시가스를 잘라서 같이 죽자며 난리를 친다는 것이다.
와 보통 아닌 신고다. 긴급 출동을 하면서 신고자와 통화를 시도했다.
신고자는 전화를 곧바로 받았고, 생각보다 의외로 침착한 상태였다. 본인은 아파트 1층에 있을 테니 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한다. 음. 역시 중립기어를 박아야 할 것 같았다.
현장에 도착했더니 한 여성이 1층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내용은 이렇다. 남편과 어쩌다 인연이 되었는데 서로 돈이 부족하다 보니 여성 명의의 임대아파트에서 함께 동거 중이라고 했다. 동거는 2년 정도 됐으니 사실혼으로 봐야 한다.
남편은 본인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고 음식 배달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고 했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부분은 남편이 배달일로 벌어온 돈으로 생활을 한다고 했다. 금전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는 부분이 조금 걸렸다.
아무튼, 남편이 술만 먹으면 꼬장을 부리고 심하면 오늘과 같은 행동을 보여서 몸을 피신했다고 하는데, 본인 명의의 집이기 때문에 오늘 밤은 남편을 내쫓아 주라고 부탁하였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같이 죽자고 하는 행동도 어떻게 보면 협박으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여성을 도와주는 게 맞았다. 그런데, 여성을 찬찬히 보고 있자니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살집은 조금 있어 보였는데, 임신한 것인지, 도통 헷갈렸다. 괜한 질문을 했다가 감사실에 불려 갈 것을 생각해서 질문하지 않았다.
여성과 함께 해당 아파트로 가 보았다. 안에는 사람의 인기척이 들렸다. 경찰이니 대화를 해보자고 잠깐 나와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가관이다. 이 사람. 약 올리기 선수다.
"아니 내가 왜 나가여? 예? 나가기 싫은데여?"
"잠깐 나와보세요. 아내 분도 여기 있어요. 이야기 좀 합시다."
"싫은데여? 나가면 뭐 수갑 채울거에여? 우루루룰룰룰루 싫은데여?"
이렇게 진심으로 약올리는 캐릭터는 드물기 때문에 열이 좀 나기 시작했다.
"빨리 여세요. 문 부숩니다."
"부수면... 부숴 보라쥐~~~ 우룰루루룰루룰"
와... 진짜.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원래 저렇단다. 여성이 나서서 문을 열어보라고 하는데, 그때 깜짝 놀랄만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 미친놈아, 나 다음 주에 출산인데 이럴래?"
그렇다. 살집도 있는 여성이었지만 임신이 맞았다! 게다가 다음 주에 출산이면 일주일도 안 남은 상태였다. 그 몸 상태에 새벽바람을 맞고 있으니 너무 속상했다.
"선생님 빨리 문 여세요. 거짓말 아니고 진짜 문 부수고 들어갑니다."
"알았어요. 열게요. 수갑 채우지 말아요. 우룰루루루루룰"
나는 일단 남자가 문을 여는 순간, 다시 문을 닫지 못하게 현관까지 들어가 버렸다.
"아쒸 왜 들어와. 해보자고?"
"해보려면 해봐라"
나도 한 덩치 하기 때문에 어디서 꿀리지도 않고, 정말 화가 난 상태이기 때문에 말도 막 해버렸다. 남자는 바로 쫄아서 꼬리를 내렸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밖에서 이야기하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내 마음이니까 여기서 이야기합시다."
어찌어찌 이야기를 마쳤는데, 남편과 여성을 분리조치 해봤자 남편이 새벽에라도 집에 올 것이 분명했고, 여성 역시도 남편이 술을 마신 상태이기 때문에 어디 나가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여성 본인이 근처에 있는 언니 집에서 잔다며 상황을 정리했다.
남편이 객기 있는 행동을 해도 여성에게 직접적인 폭력을 행사한 적이 없고, 사람을 놀리는(?) 재주가 더 큰 것 같아 여성의 말을 듣기로 했다.
순찰차로 여성을 태워 언니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놀라운 이야기를 또 들었다. 여성의 나이가 44세였는데 자연임신을 했다는 것이다. 본인도 임신할 것이라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항상 피임을 하지 않았는데 출산까지 하게 됐다는 것이었다.
물론 새 생명의 탄생은 정말 축하할 일이지만, 아이가 저런 남자 밑에서 자라 봤자 절대 좋을 게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여성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줬다.
아이를 위해서 그 사람과 같이 살아선 안 된다고.
이혼을 했어야 하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와, 이혼가정에서 자란 아이의 얼굴을 비교한 사진을 본 적이 있다. 그 사진은 직관적이었다.
무조건 편부모 밑에서 자란다고 아이가 나쁘고, 불행하게 자라는 것이 아니다. 불행한 가정에서 지속적인 정서적, 신체적 학대를 받고 자란 아이가 더 잘못 크는 법이다.
그렇게 많은 대화를 진심으로 나누고, 또 만나지 않길, 아이는 순산하길 바라며 헤어졌다.
그런데, 그 부부를 또 만나지 않길 바랐지만 다시 만나고 말았다. 그 일이 있고 100일 정도 지났을 무렵이다. 계절은 바뀌었다. 그렇지만 새벽녘은 여전히 찬 바람이 불었다.
남편이 취한 상태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 아이와 함께 밖으로 피신해 있다는 신고였다.
'하필이면 내가 또 이 신고를 나가다니...'
아파트 입구에 진입하고 해당 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목격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그 여성은 찬바람 부는 새벽녘에 100일도 안 된 아이를 안고 바깥에 서있었다.
통잠을 자야 하는데, 아이는 깨어 있었고, 보지 않아도 될 세상풍경을 보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났다. 남편도 미웠지만 여성도 미웠다.
"아니 이 시간에 애를 밖으로 데리고 나오면 어떡합니까. 술 드셨어요? 술냄새나는데."
"아 좀 마셨어요. 얼른 올라가게요."
"애 주세요. 술 드신 상태에서 그냥 애를 그러고 들고 다니면 안 돼요."
"됐어요. 내 애예요."
속에서 욕이 엄청 나왔다. 일단 집에라도 들어가야 할 것 같아서 곧바로 집으로 향했고,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내 얼굴을 보고는 아는 체를 했다.
"이번에도 신고했대요? 경찰관님 내 이야기 좀 들어보세요. 아니, 집에서 아내 친구들 불러서 저녁도 먹고 술도 한 잔 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방에 들어가서 잤고요. 배달 나가야 하니까요. 근데 애가 막 우는 거예요. 깼죠. 깨어서 보니까 아내는 없고 애만 울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아내한테 전화를 해봤죠. 아내는 집 앞에 투다리에서 아내 친구들하고 2차 하고 있더라고요. 애는 그냥 놔두고요. 화 안 납니까? 이게 사람이 할 짓입니까?"
그렇다. 내가 예전에 순찰차 안에서 주절주절 떠들었던 내용들은 이 여성에게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본인도 자질이 없는 상태였는데 남편만 욕을 했었다.
사건의 전말을 듣자마자 그냥 서로 알아서 하시라고 말하고 나와버렸다. 둘 다 똑같았다. 둘 다 자질 없이 아이를 갖아서 지울 타이밍도 놓치고(여성의 진술이었음) 그냥저냥 살아가는 것이 안타까웠다.
며칠이 지나도 그 아이가 잊히지 않았다.
그 추운 새벽에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된 아이가 눈을 뻐끔뻐끔 뜨고 있던 모습. 요란한 경광등과 어두컴컴한 밤하늘. 술 냄새나는 엄마의 날숨. 자신을 장난감처럼 안고 있던 엄마의 불안한 손놀림.
이 모든 것들이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미래가 불쌍한 아기.
'지금은 돌이 지나서 짜박짜박 걷고 있겠구나. 너의 이름도 모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지만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기를 바랄게. 아저씨의 예상이 진심으로 제발 틀렸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