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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지독히 다행한, 천양희

by 나즌아빠


시를 읽고 시를 써보고 싶어지는 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보통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운이 좋아 최악의 상황을 피했을 때 쓰는 말이지요. 그런데 이런 상황이 지독하다고 생각하는 시인이 있습니다. 천양희 시인인데요. 「지독히 다행한」 그의 최근 시집 제목입니다. 한참을 쳐다보며 생각했습니다. 저런 말은 어떤 때 쓰는 것일까? 종잡을 수 없어 '지독히 다행한' 이라는 문장이 쓰인 시를 찾아보았습니다. 어떤 맥락에서 쓰였는지가 궁금해서요. 시의 제목은 '다시 쓰는 사계' 였고 마지막 연에 등장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사는 일이

거두는 일보다

지독히 다행한 계절입니다.'


형용 모순 같지 않으신가요? 아니면 반어적 표현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찬란한 슬픔, 소리없는 아우성 등 비슷한 표현들이 있지요. 시인은 계절의 변화와 함께 지긋한 마음과 눈으로 삶에 대해 말합니다. 삶이 녹록하지만은 않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허투루 살 수 없는 게 각자의 삶일 것입니다. 오히려 주어진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기를 응원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음 시를 보면 이 생각이 더 확고해집니다.


'마음에도 야생지대가 있군, 중얼거리며

내가 마침내 할 일은

죽기 살기로 세상을 그리워해보는 것이다'

(마침내 중)


또 이런 시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몹쓸 것은

오늘을 함부로 낭비한 사람

낭비하고도 내일을 가질 것 같은 사람'

(아무 날도 아닌 날 중)


시인이 삶에 대해 갖고 있는 태도는 매우 진중하며 명확합니다. 자신 앞에 놓여있는 삶에 대해 피하거나 미뤄두지 않습니다. 그만큼 치열합니다. 그러나 시인의 최대 장점은 치열함과 진중함 속에 유머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언어적 유희와 리듬감을 잘 살릴 줄 아는 탁월한 언어 조탁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쉽게 읽히지만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고독을 밥처럼 먹고

고와 독을 옷처럼 입어본 나로서는

고독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보려는 고독부가

근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고독처럼 고집불통으로

고독을 공부하는 고독에게

몇 줄의 헌사를 남긴다

고독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어 고고한 것

고독은 누구의 접근도 사절하는 것'

(고독을 공부하는 고독 중)


시인은 우리 주변의 사물들을 바라보며 자신만의 독특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시를 짓습니다. 바람, 구름, 산, 파도 그리고 새, 곤충, 꽃, 나무 등 인간 외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시인의 세밀한 관심과 정성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게다가 이런 관찰 속에서 길어낸 표현은 성찰의 시간과 삶의 대해 애정을 갖게 하지요.


평생을 침묵하는 저력이

바위에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하였다


철 따라 자리를 바꾸는 철새들은

바위의 속을 모를 것이다

나는 또 그렇게 생각하였다

(바위에 대한 견해 중)


시를 잘 모르고 시를 어렵게 생각하는 저에게 모처럼 좋은 시집을 만났습니다. 가끔 마음이 허하거나 이유 없는 무력함에 빠져든다고 생각된다면 천양희 시인의 시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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