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상에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 있을까?
혼자만의 세상.
그리고 나에 대한 채찍질,
그것은 매일이 있다. 이 시기에는 더더욱이 그랬다.
돈은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나는 벌 수 있을 때 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는 연예도 사치였고, 남자친구를 만나서 돈을 쓰는 것도 아깝다고 생각했다.
물론 어떤 여자들은 남자들이 돈을 쓰기 때문에 돈을 굳이 여자가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던 시기였지만 나는 다르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한 여자들이 다 거지라는것으로 비하 되는것도 아니다.
그냥 나의 생각을 전달 하는것이니 오해없기를 바란다.
나는 이때 그런말을 들으면 "거지근성"이라면서 그 여자들을 속으로 비하했다. 그게 나였다. 그것 이 전부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 얻어먹으면 무조건 한번 더 만나서 다시 갚아줘야 한다.
얻어먹고 나면 찝찝하고 이유 없이 선물을 받는 것은 부담스럽다.
선물은 마음에서 우러나서 나에게 줬을 것이지만 나는 선물을 주면 " 왜 나에게 이런 걸 주죠? 나는 싫어요 {"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참으로도 냉정하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말들이다.
무엇인가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잘해주고, 무엇인가 얻고자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호감을 표하며, 무엇인가 나로 말미암아 자신이 이득을 취할 수 있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나에게 접근한다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을 다 그런 시선으로 봤다.

그 시절의 나의 시선은 그야말로 색안경 중에서도 최고 도수의 색안경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누구도 믿지 못한 채 지속적인 사회생활이 이루어졌다.
누군가 직급에 따라 지시하면 그에 따랐고, 누군가 이상한 행동을 하거나 못마땅한 행동을 하면 직설적으로 직언을 날렸다.
그렇게 사람들과 섞이지도 섞이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줄다리기를 하면서 사회생활을 이어나갔다.
에너지소비를 업무에만 해도 너무 힘든데, 이러한 감정의 소비까지 해야 한다니.
이곳은 정말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많은 이야기가 생산되는 곳이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어디든지 그렇다는 것은 좀 더 나이가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지만 이때는 그런 것에 대한 이해도 하고 싶지 않았고 그냥 불합리한 상황과 그런 말을 믿는 사람들이 멍청해 보였다.
모든 일이 결말이 있기 전까지 과정이 있다. 결말이 어떻게 잘못되더라고 과정에 있어서 내가 확인하고 내가 결정해서 내가 결론 내린 것에는 책임은 나에게 있다. 책임을 다른 제삼자 에게 전가하지 않는다.
그것 또한 어릴 때부터 나의 성격이다.
이러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쌓이다 보니 나는 어느새 차가운 여자가 되어있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편했고 나는 남의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때우는 저런 불쌍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지가 않다. 난 그때 남의 이야기를 쑥덕대며 하는 사람들을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경멸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사는 인생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나의 인생도 불쌍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저들은 이 소중한 시간에 자신을 위한 일을 한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남의 험담을 하고 있다. 그건 정말 시간을 허비하는 행동이고 나아가 자신의 얼굴에 침 뱉는 일이다.

사람들은 좋을 때는 누구나 좋지만 싫어지면 가차 없이 변한다.
나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나와 사이가 틀어지거나 심기가 뒤틀리는 일이 생기면 가차 없이 나를 배신하고 남에게 나에 대한 유언비어 또는 나와 빗대어 비꼬는 말투로 조롱하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 것들에 대해 첨부터 매우 민감했지만 이때는 익숙해져 있던 터라서 그런 말들이 또 제삼자의 3자의 입으로 거쳐서 나의 귀에 들어오면 나는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독한 듯 무심하고 악담 같은 말을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던졌다.
그 이후 나에게는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말을 하지 않았고 나는 드디어 귀가 자유로워졌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하면서 아까운 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하루 종일 콜을 하다 보면 목도 아프고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안 좋다.
골반염은 그야말로 걸을 수도 없을 정도의 통증이다.
뒤꿈치가 땅에 닿으면 머리가 울리고 토가 나온다. 걸으면 온몸이 찢어질 정도로 아프다.
나는 이런 내 몸을 적응시키려고 했다.
아픈 것도 익숙해지면 습관이 될 것이라고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사람의 신체라는 것은 결코 그렇지 않다. 나의 생각대로 내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너무 아프다 너무 힘들고 너무 지친다.
울음이 터진다. 나는 회사에 이야기했다.
회사의 모든 관리자와 센터장이 말리기 시작한다.
뭐 때문에 그러느냐 어떤 일 때문에 그러냐., 회사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 등등
당연하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일을 했기 때문에 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 수 없다.
나는 아픈 것을 참은 것에 익숙하고 또 내가 아픈 모습이 보이면 틈을 노리고 나를 헐뜯거나 잡아먹으려고 드는 곧 밀림 같은 이곳에서 나약함은 곧 퇴출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나는 그럴 생각을 전혀 할 이유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나는 전국의 10위 안에 들어있는 최우수사원 중에 한 명으로 벌써 이 회사에 4년째 그 타이틀을 놓쳐 본 적이 없다. 그런 내가 갑자기 이유도 없이 그만둔다고 하니 아마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난 그때 서야 처음으로 이야기했다.
"아파서 도저히 말을 할 수도 먹을 수도 걸을 수도 없어요. 지금 이렇게 회사에 와있는 것도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는데 도저히 안될 거 같아요"라고말이다.
이 말을 듣던 사람들은 모두 다 무음이었다.

내가 표시를 전혀 내지 않았기 때문에 아프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아파도 링거를 맞고 바로 업무를 하던 나였기 때문에 아마도 그들도 내가 얼마큼 아픈지에 [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나 외에도 많은 사람들을 관리하여야 하기 때문에 모를 수도 있다.
당사자가 이야기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그들의 잘못은 없다.
솔직히 나는 매일 밤마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너무나 아팠다.

하지만 나는 병원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아파서 죽을 운명이면 죽을 것이고 아니면 살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이 또한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면 이것은 나에 대한 배려뿐만 아니라 내 주변에 나를 아껴주는 그 누군가의 슬픔과도 직결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침묵을 깨고 누군가 나에게 질문을 했던 기억이다.
" 넌 그 정도까지 아픈데 부모님은 뭐라고 하시니?"
나는 말했다.,
" 부모님은 모르십니다. 관심도 없으시고 바쁘시기도 하고, 저는 돈을 벌어야 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처음으로 개미만큼 기어 들아갔다.
" 그럼 그만두지 말고 한 달 정도 쉬고 오는 건 어떨까?"라고 나를 붙잡는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실 수 있으실까요? 내일은 너무 아파서 출근이 힘들 거 같습니다."
이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센터장이 말한다.
"그래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한 달이 아니고 두 달 이어도 좋으니까 우선은 병원 가서 치료부터 받고 다시 복귀하는 거로 하고 사직서는 처리하지 않을게"라고 말이다.
그에 말에 감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때도 "뭐 어차피 내가 필요하니까 그러겠지 다 똑같네..."라고 생각했다.
나는 "도구" 로서 철저히 사회와 가족에게 이용당하고 있다.
어차피 엄마와 아빠는 내가 아픈 것도 모른다. 말해봤자 또 잔소리를 할 것이고 내가 회사에 가서 돈을 벌어오지 못하면 엄마는 아마 또 나에게 월급에 대한 잔소리를 할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것이 아니겠지만 나는 그때 그랬다.
너무 아파서 정말 기어가듯이 택시를 탔고 병원을 갔다.
엄마 아빠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언니에게는 말했고, 언니에게 당분간 친구집에서 지내면서 회사에 출퇴근할 거라고 이야기 해달라고말헀다.
언니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언니에게 이야기했다.
언니는 "그래도 엄마 아빠가 알아야지"라는 말을 언니답게 했다.
난 "만약에 언니가 엄마와 아빠에게 말한다면 나는 지금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릴 거고 앞으로날 못 찾을 거야"라고 망언을 했다.
아무도 면회를 오지 않는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또 다른 곳이 아프기 시작한다. 방광을 비롯해서 골반밑으로 해서 배꼽 주변까지 너무 아프다.
하하하.... 그래도 부산에서 큰 대학병원인데, 혼자 바쁘게 아픈 몸을 이끌고 여기저기 접수 센터를 돌아다니며 검사를 받고 피를 뽑고 대기를 하고 의사를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하루 종일 그렇게 지냈다.
그러던 중에 의사가 항암치료에 쓰이는 약물주사인 진통재를 처방해 줬고 나는 진통재를 맞았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지속되었고 일주일 만에 나는 정말 죽을 지경가지 이르렀다.
그때 그 병원에서 나에게 항암 치료의 주사를 낳아주었다. 핏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주사액이 온몸에 타들어가듯이 고틍스러웠고 내 몸의 신체가 조각조각나듯이 핏줄 이끈겨 타 나가 버리는 고통을 주사를 맞는 내내
느꼈다,
너무 힘들고 지치는 나날들이 일주일 가량 지속되었다.
병원에 있다가는 죽을 거 같았다. 병원에 때로 썼고 원인도 불명인 병명에 무슨 약을 어떻게 쓰는지 왜 나에게 설명해주지 않느냐면서 또박또박 따져댔다.
퇴원을 희망한다는 말에 병원은 자신들이 여러 가지로 조사 중이니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만 되풀이했고
물론 나는 신뢰하지 않았다.
나는 내가 지금 죽더라도 무슨 병으로 죽었는지 조차도 알 수 없게 죽고 싶지도 않고, 차라리 객사하는 게 낫겠다며 또 악담을 퍼부었고, 퇴원을 하게 해달라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렇게 진통제 약을 처방받고 나는 퇴원을 했다.
진통제 덕분인지 몸은 그래도 버틸만했다.
마지막에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라고 말이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부모도 아니고 형제도 친구도 선생님도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
이런 생각은 성인이 된 지금도 마찬가지이기는 하다.
사람은 환경에 익숙해지지만 추억에도 민감하고 힘들었던 기억은 더더욱이 더 가슴에 사무친다.
나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남들처럼 대학을 가거나 남들처럼 사업을 하고 남들처럼 승용차가 생기거나 남들처럼 백화점을 엄마손을 잡고 가거나 남들처럼 자그마한 일에도 칭찬을 받거나 남들처럼 꿈을 위해서 지원을 받거나 지지를 받은 적이 없다.
나는 내가 지켰고 나는 나 혼자 맨땅에 헤딩하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을 만날 때도 그 사람의 돈이나 지위보다는 사람의 인성이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뿌리 깊은 의식이나 마인드를 관찰하는 것에 더 집중했고, 오히려 좋은 차를 타고 다니면서 거들먹거리는 인간들은 침을 뱉고 싶을 정도로 역겨웠다.
이런 나의 생각은 성인이 되어서도 이어지고 있었고 이때의 나는 더욱더 심취해 있던 때였던 터라서 사람을 만날 때 항상 경계를 하면서 만났다. 참으로 피곤한 인생을 20대 청춘에 보냈다.
이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 생각해 보지만, 답은 없다.
운명을 나는 믿는다.
운명에 그저 맡기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는 다시 살고 싶지는 않을 것 같다.
그냥 바람처럼 구름처럼 두리뭉실하게 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나의 아픔이 나약함으로 비추어져 사람들에게 공격당하고 배신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소용돌이에서 살고 싶지는 않다.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