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바. 조금은 쉬고 싶었다. 생각할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회사에서 편의를 봐주는 것으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나는 우선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왠지 마음 한구석은 공허하고, 뭔가 모를 불안함은 여전하다.
쉰다고는 했지만 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겠다.
예전에 일을 하지 않고 지쳐있던 나는 쉬는 것이 쉬는 것이 아니었다.
진정으로 쉬는 것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걸까? 모르겠다.

아무튼 당분간은 조금 지침에 있어서 쉬어가고 싶었고 몸이 우선 따라주지 않았기 때문에
의도치 않더라도 몸이 반응했고 나는 내 몸의 반응에 따라야 했다.
죽음에 대한두려움은 지금도 크게 없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는다.
이 생각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의 나도 그랬다,
나는 오늘부터 쉰다. 한 달을 쉴지 반달을 쉴지 모른다.
일단 쉰다.
집에서 쉬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이때 나는 독립한 친구들이 너무 부러웠다.
나는 돈을 벌어 모았지만 엄마가 다 관리하고 있었고 철저하게 엄마의 손에서 돈이 관리되고 나는 욛돈을 받아 쓰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돈을 벌면서 집의 임대료도 함께 보태어야 했고 전기세와 수도세 등도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동등하게 배분하여 계산했다.
그것은 그때는 자식에게 그렇게 까지 돈을 받아야 하나?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해를 하려는 마음에서는 엄마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새명의 자녀를 키우기 위해서 나가는 식비등을 감당하기에는 아마도 힘들었을 것이다.
총 다섯 식구가 오목 조목 모여서 살았고, 언니는 나와 함께 방을 쓰고 동생은 따로 방을 썼다.
남자 아이기 때문에 우리랑 같은 방을 쓸 수는 없다.
그렇게 집에 가서 나는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고 잠시 쉰다고 이야기하고 그나마 그래도 내가 그전에 벌어놓은 돈이 있으니 그것에서 계산할 것은 계산해 달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나는 내방으로 갔다.
누워있는데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이렇게 생생하게 생각나는 것은 나는 그때 이후로 쉬어본 적이 없어서 일지도 모르겠다.
항상 바쁘게 살았고 항상 앞만 보고 달렸고 항상 후회 없이 살리라 다짐했고 항상 나를 혹사했다.
쉬는 것은 배운 적이 없다.
어떻게 쉬는 것일까? 사람들은 잘 쉬었어?라는 말을 주말이 지나고 나면 많이 한다.
어떤 사람들은 "어우 나 이번에 진짜 푹 쉬었어"라고 말한다.
그건 어떤 의미 일까? 나는 한번 도정말 푹 잘 쉬었다.라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다.
가만히 TV를 시청하는 것은 잘 쉬는 것일까? 아니면 그냥 먹고 자고 하는 것이 잘 쉬는 것일까?
아니면 친구들읠만나서 신나게 노는 것이 잘 쉬는 것일까?
어떤 것이 잘 쉬는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TV시청도 하기 싫고 밥도 먹기 싫고 친구도 만나기 싫은데 그럼 나는 어떻게 쉬어야 하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은 쉬는 것인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려면 또 병원에 접수를 해야 하고 기다려야 하고 또 사람들과 이야기해야 하고 또 나 혼자 쓰는 방이 아니라 모르는 다른 사람들이 함께 섞여있는 병실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음악이나 들어야 하는데, 그것은 쉬는 것인가? 모르겠다.
쉬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미스터리이다.
사실 이때는 더 심했다. 어떻게 해야 쉬는 거지? 나는 것 조차도 미스터리였다.
집에 있으면 괜히 눈치가 보인다. 밖에 나가도 재미가 없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영화나 장르도 딱히 이때는 없었다. 뉴스는 전혀 보지 않았다. 이 세상은 나 외에는 관심이 없는 나 자신이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나와는 무관하다. 누가 어떤 짓을 했고 어떤 사건이 일어났고 그따위는 관심밖이다.
우선은 내가 지금 아프고 내가 지금 쉬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쉬는 건지 모를 뿐, 온통 관심은 그것뿐이다.
쉬는 것에는 어떤 종류가 있을까?
나는 그때 쉬는 것을 그냥 포기했다. 그냥 아무와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잠을 자거나 부모님과 같은 집에 살아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고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우울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다. 그동안 힘들게 혼자 버텨온 것들이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한꺼번에 피로감과 무기력감이 밀려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쉬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하는 마음까지 앞섰다.
쉰다는 것은 참 어렵다.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쉬는 법을 가르쳐 준사람도 없고 쉬어본 적도 없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떻게 나에게 다가오는 감정인지 감정에 대한 메마름 속에서 나는 그냥 쉬었다.
쉰 것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나니, 쉰다는 것도 힘들어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 같았고 멍청하게 느껴졌고, 사지 멀쩡해서 조금 아프다고 쉰다니 다른 사람들은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버는데, 나는 지금 쉬고 있네?라는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나는 쉬는 것을 포기했다.

이때는 일주일이 지나서 병원에 갔고 약을 처방받았다.
정신과에 상담도 받아보고 싶었지만 이때의 시절은 정신과에 간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주위의 시선이나 또는 의료기록에 대한 민감도가 높았다.
우리 부모님도 이상한 사람을 보면 "저 정신병자 정신병원에 가야 해"라는 말을 드라마를 보면서 하시고는 한
다. 지금은 아니지만 우리 부모님이 아니라도 그런 말을 그때는 많이들 했을 것이다.
그때의 시대상은 정신과를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사람들이 마음의 상처가 있으면 정신건강의학과를 찾는다 예전의 정신과에서 이름이 변경된 것일 뿐 똑같은 정신과 병원이다.
정신과 병원은 정신병자들이 가는 곳이 아니다. 물론 심각한 뇌의 손상이나 심각한 범죄성향의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따로 격리하여 관리하는 정신병동의 병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일반인들이 가는 정신과는 힘든 것을 털어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나 힘든 마음을 마음껏 상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해서 내가 어떠한 상황이고 내 정신 상태가 지금 얼마만큼의 위험도를 가지고 있는지 진단받고 처방받아애 하는 곳이다.
하지만 나의 20대 후반 때는 그렇지 않았던 사회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혼자 또 혼자만의 상상을 하거나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헤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또 일주일이 흘렀고 어영부영하다가 무엇을 하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한 채 어느새 나의 발걸음은 회사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아마 더는 못 버틴 것 같다.
쉬는 것을 버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쉬는 것을 할 줄 몰라서 그것이 더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차라리 일을 하는 것을 선택했던 나의 2대 후반,
나는 그렇게 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하고 깨우치지 못한 채 또다시 도피하듯 "일"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이라도 없었으면 나는 그때 어땠을까?
지금은 작은 하나하나 다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성숙했거나 또는 나름대로 고통을 느꼈기 때문에 배려라는 것이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이때의 나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게 나의 "쉼"은 끝이 났다.
모르겠다. 나는 모른 체 또다시 "일"을 하고 있고 그렇게 또 회사로 출근했다.
잘 쉬었느냐는 말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냥 고개만 끄덕였을 뿐.
정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나는 또다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