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속 한편의 짐. 가족이라는 이름 그 속의 나는 어떠한가?
다시 회사로 복귀하고 나서 미친 듯이 일을 해댔다.
쉬는 시간에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그리 즐겁지 않았다.
뭔가 빨리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혼자만 있는 느낌?
사람들은 쏙닥 거리는데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크게 말한다고 해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혼자만의 세상 속에서 혼자 아우성치면서 바쁘게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갔고, 몸이 아픈 것은 둔해졌다.

어디가 아파도 병원을 가지 않는 버릇이 몸에 베인 것은 이때부터인 듯하다.
한참 아프고 나서 병원에 입원도 해봤고 약도 먹어봤고 치료도 받아봤지만 다 시간이고 돈이다.
그것들이 너무나도 허망하고 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말한다 몸이 중요하다고
몸이 중요한 것은 이때는 몰랐다. 몸도 돈이 있어야지 된다고 생각했고, 돈이 없으면 차별받는 사회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부터 더더욱이 나의 몸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돈을 버는 기계라는 생각은 매일 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뭐 어쩔 것인가.
달라질 것은 없다.
이 회사에서는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도 나의 편의를 봐줬지만 나 또한 그렇다 할 마땅한 기술도 없었다.
어릴 때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한참 꿈을 펼칠 수 있을 때도 길이 막혔고, 그 외에 미술을 전공하고 싶을 때도 길이 막혔다. 그래서 이렇게 저렇게 살다 보니 이것저것 일을 하게 되었고 나를 혹사하게 되었다.

뭘 하던지 안되기 때문에 나는 그냥 현실에 안주하면서 그냥 하루살이처럼 열심히 살았다.
다행히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기 위해 미친 듯이 열심히 날갯짓을 하지만 하루를 살고 죽는다.
하지만 나는 죽지는 않기 때문에 조금은 하루살이와는 다른가? 아무튼 그런저런 잡생각을 많이 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나 자신에 대해서 뒤돌아 보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아무리 돈을 벌어도 비관하는 삶을 살았다.
얼굴은 나 스스로도 생각하지만 못생긴 편이 아니다.,
어릴 때부터 이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래서 누가 이쁘다고 하면 고맙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그저 아 저 사람도 내가 이뻐 보이는가 보구나 이 정도였다.
그래서 따로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의 감흥은 별도로 없다.
만일 이쁘다는 핑계로 나에게 다가온다면 나는 가시 돋친 말들이나 거리를 두는 편이었다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할 것이다. 무엇이 나를 이토록 부정적으로 만들었는지 나도 그때는 모르겠다.

언니와 나는 3살 차이가 난다.
언니가 시집을 가겠다고 한다.
언니는 내가 앞전에 친구로 인해 배신을 당해 사기를 당했을 때 언니가 모아놓은 돈의 일부를 나에게 일부 썼다.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신용회복위원회에 전달되지 못하는 개인 사채인 3 금융권 같은 경우 직접 상환을 해야 하며, 그 금액과 이자가 너무 높아 결론적으로 원금을 갚는 것으로 그 회사와 논의하고 일처리를 했던 것이 언니였다.
언니는 제법 똑똑하고 나름대로 성실하다.
나는 그런 언니를 오랫동안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도움을 준 적이 없다. 언니는 나 때문에 힘들었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나는 언니가 좋았지만 언니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동생이라고 해서 매일 사고 치고 이제는 언니가 모아놓은 돈으로 동생의 사고 치는 돈까지 막아야 하니 언니 또한 억울했을 것이다.
이때 나는 내가 모아놓은 돈 중 일부를 엄마에게 말했고 엄마는 그 돈을 언니의 결혼자금으로 보태어 썼다.
그것으로 나는 언니에게 진 빚을 갚았다.
분명히 나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고 내가 번돈이 그리 적지 않기 때문에 그때 당시에 엄마는 내 돈으로 아파트를 하나 구입하려고 했었다.
매달 500이 넘는 돈을 벌어서 집에 줬다 그때 내 나이 겨우 25 살도 안되었을 때였다. 얼마나 큰돈이고 얼마만큼 내가 노력해서 번 돈인지 나는 누구보다 나 자신이 잘 안다.
언니의 결혼은 평탄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반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아마도 언니의 학력이라던지 스펙이 결혼할 대상자 보다 못 미친다고 생각해서일까?
언니는 울었고 나는 그런 언니에게 위로를 하지 않았다.
언니가 시잡가는 것이 싫었던 것일까? 내가 무관심했던 것일까?
언니에게 장가 오겠다는 사람도 탐탁지 않았다. 그냥 그랬다. 그 사람은 지금의 형부가 되어있다.

하지만 이때 언니가 결혼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언니가 집에서 나가면 이제 언니가 했던 희생을 내가 해야 하는 거야?" 이거다.
그렇다 언니의 월급도 엄마가 관리를 했고 언니는 나보다 더 많은 금액을 집에 보태고 있었다.
남동생이 하나 있는데 매일같이 사고를 친다. 그런 남동생의 뒤치닥 거리를 언니가 다 했다.
나는 알지 못했다. 집안일에 무관심했던 것도 있고 언니처럼 착하지 않다.
그래서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왜 내 돈으로 그래야 하냐"라고 따져 물었을 것이 뻔하다.
항산 나는 월급을 타고나면 엄마가 관리를 한다. 나는 수시로 엄마에게 통장을 보여달라고 하기도 했다.
가끔 엄마는 기분 나쁜 얼굴로 " 니 돈 엄마가 어디 가다 쓸까 봐 그러는 거냐 의심하는 거냐"라는 등등의 말을 했다. 그 말을 참 듣기 싫었다. 그냥 보여주면 되는 것을 굳이 딸한테 그렇게 말을 해야 하나?
차라리 "엄마가 이만큼이나 잘 모으고 있어. 우리 딸 고생 많다 조금 더 모아서 우리 딸 하고 싶은 거 해"라고 하면 얼마나 좋은가.. 하지만 단 한 번도 언니와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실 남동생이 군대를 가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군대에 말뚝을 박겠다고 통보했었다.
우리는 그때 너무나 억울했다. 언니와 나는 모아놓은 돈으로 남동생의 학비를 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학을 가고 싶어 했지만 둘 다 그때 가지 못했다 나중에 우리가 모아놓은 돈으로 스스로 대학을 갔고 졸업을 했지만 이때 집에서 보내주지 않았다.
오로지 남자인 3대 독자 아들을 위해서 우리는 희생해야 했다,
남동생은 똑똑했고 부산에서 제일가는 대학을 들어갈 만큼 성적도 좋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학비가 너무 비싸다. 그 돈을 엄마 아빠가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언니와 나는 일을 해서 그의 학비를 마련했고 대학을 보냈다. 하지만 대학교 1학년 2학기에 도달하자마자 남동생은 군대를 가버렸고 말뚝을 박았다. 그렇기 억울한 일을 우리는 견뎠다.
나는 언니가 시집가는 것이 집에서 해방되기를 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도 그런 마음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이다.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해방될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하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엄마 아빠와 나는 사이가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다. 그냥 부모와 자식의 사이이다.
평범하다. 하지만 이때의 언니와 나는 매우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면서 자랐다.
그렇게 언니는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
언니가 나에게 조용히 말했다.
"이제 내가 없으니까 네가 내가 했던 거 해야 해"라고 말이다.
언니라고 그 말을 하고 싶었을까? 지금의 언니와 나는 아주 친하다.
옛날이야기를 하면 서로 흥분을 하고는 한다. 그때 우리의 감정이 비슷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부모님을 원망하기는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워하지 않는다.
그때 왜 그래야만 하셨을까? 에 대한 서운함이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모든 관심은 남동생에게만 쏠려있는 엄마와 아빠에게 우리는 더 이상 손을 뻗을 수 없다.
지금에서는 엄마 아빠가 딸들이 최고라고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아직도 남동생이 자리 잡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한다.
어쩌다 보니 집안 이야기가 살짝 나왔지만 이때의 나는 그렇게 마음의 짐을 하나 더 짊어지게 되었다.
언니가 떠나고 나서 나는 언니의 역할을 해야만 한다.
나 자신을 더 채찍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견뎌야만 한다.
부모를 버릴 수는 없다. 가족을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나만 참으면 된다.
나는 그렇게 나 자신에게 최면을 걸기도 했다. 부모님이 나쁘신 분들은 아니다.
다만 예전의 유교사상이 너무 강한 분들이다 보니, 남아 선호 사상이 아직도 있었던 시기였을 때 지금 나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루 종일 콜을 돌리고 힘들게 집에 도착해서 집문을 열면 수고했다는 말을 듣는 것 그 소소한 행복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자마자 차가운 시선처럼 나를 보는 것 같았고, 군대에 가있는 동생이 보고 싶어 우는 엄마를 보는 것. 그리고 커피를 타달라는 아빠의 주문을 듣는 것. 이것이 나의 퇴근 후의 모습이다.
집이라는 곳이 아늑하고 편안한 곳이어야 한다는 것을 나중에 커서야 알았다.
이때도 성인이었지만 나는 내적으로는 성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시곗바늘이 일정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하루를 똑같이 반복하며 살고, 또 집에 가서 쓰러져서 잠들고 또 나를 원망하거나 내 처지를 비관하거나 나중에 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라던지 아니면 다시 태어나면 좋은 집안의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다던지 하는 망상에 젖어 있었다.
아무것도 나를 위로해주지 않는다. 위로받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 혼자다. 외톨이. 그것이 나에게는 딱 맞다.
친구들이 있어도 친구들은 각자 바쁘고 다들 행복해 보인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가 않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불행한 삶. 그게 내가 가지고 있던 마인드였다.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그리 다 하지 못했다.
완전히 경제적으로 해방되지 않았다. 모든 빚을 다 갚아 가는 시기가 왔어도 경제권을 엄마는 주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창살 없는 감옥 같은 집에서 살았다.
부모님의 구박이나 매질은 일절 없다.
난 살면서 부모님에게 욕을 듣거나 맞은 적은 없다 그렇게 사악한 분들이 아니다.

이것은 엄마 아빠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었다.
"그래도 엄마 아빠가 너네 기죽지 않게 하려고 학원도 보내고 , 학비도 밀리지 않고 어디 가서 밥 못 먹을까 봐 밥도 꼬박꼬박 챙겨서 먹이고, 엄마 아빠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너희를 키웠다."
"이제는 너희도 효도할 수 있으니 효도하는 거라고 생각해"
참 아이러니 한 말이다. 우리 엄마아빠는 너무나도 솔직하다.
이런 말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자식이 부모님에게 " 우리를 이제껏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들어도 참고 잘 견뎌 주셔서 잘 자랄 수 있었어요"라고 해야 하는 것인데 우리 부모님은 그냥 다 대놓고 말했다.
아마도 존경받고 싶으셨을 수도 있다.
나는 엄마 아빠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라고 대들었다. 똑똑히 기억한다., 나는 언니가 집을 떠나고 나서 꽤나 삐뚤어진 사상을 가지고 있었고 부모님과 대화를 매우 꺼려했다.
이런 내가 정말 잘못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
누군가가 묻는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고 말이다.
나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또다시 반복되는 삶을 살고 싶지 않다. 그냥 자연사로 돌아가고 싶다.
아마도 우울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분명히 있었을 것 같다.
하루에 한 끼 먹는 것도 귀찮았고, 엄마의 맛있는 밥을 먹더라도 "나는 밥값을 하고 있으니까 먹을 자격이 되는 거야 "라는 생각을 하면서 밥을 먹는다.
내가 비정상이었던 것일까? 너무나도 삐뚤어진 나는 나 조차도 감당이 안될 만큼 깊이 가시가 박혀있다.
이렇게 나는 언니가 시집을 간이 후 쭉 이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고 몸도 마음도 기댈 곳 없이 혼자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친구들과의 교류도 많지 않았고 그저 주변이 조용하기만을 바랬다.
"왜 나에게 세상은 이리도 잔인한가" 항상 했던 생각이다.
살면서 누구든 그런 생각을 한 번쯤은 해봤을 거다 아니라면 매일 하는 사람도 아직 있을 것이다.
나도 경험했고 겪었고 느꼈기 때문에 사람은 다들 비슷비슷하다.
단지 상황과 생활 그리고 성격등 존재의 하나의 생명체로써 각자의 삶을 사는 것이고 그것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일 뿐.
나는 이때 나만의 세계의 가시 돋친 채로 줄기를 뻗어 내고 있었다.
이후 나에게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 변화는 다음 편에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이 글을 마치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부모님을 욕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누구든 사는 방식은 다르다. 양육하는 방식도 다르다. 나는 학대받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나의 삶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보셨으면 좋겠다.
세상에 못하는 일은 없다.
이 말은 내가 항상 하는 말이다. 왜? 지금껏 나는 혼자 모든 것을 다 처리하고 결정했다.
손발이 멀쩡하고 두 눈 코, 입 다 정상이다 걸을 수 있고 말할 수도 있다
어디 가서든지 살지 못할까? 그런 마인드로 살았고 그래도 믿을 건 나 자신뿐이다.라고 생각했다.
지금 나의 25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너 너무 그때 힘들었어. 나는 다 알고 있어 네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단단해지자"라고 말하고 싶다.
다들 힘든 일이 있으면 나와 같지 않고 주변에 고민을 털어놓을 사람이 진심으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때의 나는 그게 없었다. 가족이라도 말이다.
가족이라는 두 글자가 나는 그때 너무나도 싫었다. 그때의 나는 외면했을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하고 다음 편을 기다려 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나의 글을 보고 우울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