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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버프 Mar 22. 2022

헌책방

지난해 벽화 이슈로 한국 사회가 잠시 술렁였었다. 종로의 한 건물 벽에 정치적인 문제를 담은 내용의 벽화가 그려졌고 그에 대한 찬반 논란과 진영 간의 대립이 상당히 첨예했었는데 당시 나의 시선을 끌었던 것은 사실 벽화 문제보다 그 건물에 있다는 홍길동 중고서점이라는 곳이었다. 홍길동이라는 전래동화 속 영웅과 중고서점의 조화가 조금은 어색한 작명의 이곳은 ‘헌책방’이다.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집 근처 작은 편의점 크기 정도의 헌책방이 있었다. 반포의 고속버스터미널 건물 1층에 자리한 곳이라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지만 책방에는 항상 사람이 없었다. 책방 주인은 당시의  눈에 연세가  있어 보이는 깐깐한 인상의 아저씨였는데 손님이 오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고 귀찮아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린 학생이고 한번 들어가면 이곳저곳 뒤적거리고 다녀서 그저 나를 귀찮아한 것일 수도 있다. 아무튼  기억   책방의 유일한 단점은 책방 주인아저씨였다.

불친절한 주인아저씨가 보물창고의 무서운 수문장이 되어 입구에서 버티고 있는 곳임에도 그곳을 지날 때면 책방에 들어가 시간을 보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사실 주인아저씨가 불친절한 느낌이긴 해도 들어가서 책을 보고 있는 사람을 내쫓은 적은 없으니 입구를 통과할 때 마음의 불편함만 이겨내면 그만이었다. 수문장에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면서 쓱 들어간다. 상대방이 인사를 받아준 기억은 없다. 수문장이 늘 앉아 있는 입구 바로 안쪽의 작은 의자를 빠르게 지나친 후 조심스럽게 한숨을 뱉어내며 성공적인 진입을 치하한다. 이제 이 보물창고를 휘젓고 다닐 일만 남는다.


깐깐한 수문장을 무사히 통과하고 마주치는 그곳에서  처음 나를 반겨주는 것은 은은하면서 퀴퀴한 종이 냄새다. 낡고 묵은 그 냄새가 마냥 좋다. 세상에 지하실 냄새나 주유소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꽤나 많다고 하는데 나는 지하실 냄새나 주유소 냄새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 묵은 책 냄새가 좋다는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동의한다. 희한하게도 헌책방보다 훨씬 더 많은 더 오래된 책들이 있는 도서관에서는 이 헌책방 특유의 낡은 냄새가 나지 않는다. 얼마 전부터 번화가 곳곳에 생겨난 대형 중고서점에서 조차도 이 냄새를 느낄 수 없다. 아마도 이 냄새는 좁은 공간에 환기도 어정쩡한 ‘재래식' 헌책방의 환경에 낡은 책들이 밀도 높게 쌓여 있기 때문인 것 같은데 하여간 헌책방의 상징으로 손색없어 보인다.


낡은 책 향기를 들이마시며 주위를 둘러보면 좁은 공간을 채우는 책장들 사이사이 한 사람 간신히 통과할 크기의 복도가 보인다. 이 마저도 복도 양쪽에는 허리 높이까지 책이 겹겹이 쌓여있어 넋 놓고 걷다가는 쌓인 책을 무너뜨리는 민폐를 저지르게 되니 쌓인 책들 사이로 얼마 남지 않은 바닥을 잘 골라 딛어야 무사히 전진할 수 있다. 서가의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낼 수 있는 낮은 사다리도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지뢰밭을 통과하듯 조심조심 걸음을 옮기며 보물 찾기가 시작된다. 이동을 할 때에는 발 딛는 위치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쉽지만은 않다. 사방에 꽂혀있고 쌓여있는 책의 표지와 제목들이 시선을 빼앗아 간다.


이곳에 책이 몇 권이나 있는지 무척 궁금했던 적이 있다. 하지만 불친절한 책방 주인아저씨께 차마 물어볼 수는 없었다. 눈대중으로 대충 세어보려고 이쪽 이만큼이 대충 몇 권이고 이런 공간이 몇 개고 하면서 계산해 보다가 이내 그만두고 그냥 책이 많다 정도로 결론을 낸 후로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았다. 별 규칙 없이 쌓여 있는 듯한 책들의 제목을 훑어 내려가기만 해도 반나절은 후딱 지나간다. 하지만 반나절 투자에서 횡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아깝지 않다. 가장 좋은 횡재는 뭐니 뭐니 해도 절판된 책을 발견하는 일이다. 예전에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사를 하면서 버리게 되거나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못 받았는데 더 이상 구할 수 없게 되어버린 책을 발견하면 그야말로 심봤다를 외치곤 했다. 대표적인 책이 매거크 소년 탐정단 시리즈였다. 집에 시리즈를 모두 갖고 있었는데 누군가에게 빌려줬다가 받지 못했고 빌려간 녀석이 전학을 가버렸는지 우리가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해버렸는지 아무튼 돌려받을 방법도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서점에도 더 이상 팔지 않아 구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날 이 시리즈 중 '눈 속에 갇힌 스파이'라는 에피소드를 이곳 헌책방에서 발견하고는 혹여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에 수문장이 다가올까 조심조심 나머지 시리즈도 찾기 위해 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서점 구석구석을 뒤지고 또 뒤졌다. 결국 그 한 권으로 만족해야 했지만 마침 그날 그 서점에 들어온 책이었고 들어온 지 몇 시간 되지 않아 내가 발견한 것이니 운이 좋았다고 할까.

횡재라고 할 건 아니지만 쌓여 있는 맨 위에 표지를 드러내고 있는 책 중에 조금 야한 사진이나 그림을 표지에 담고 있는 책을 발견하게 되면 무의식 중에 자꾸 눈이 가곤 했다. 저 책은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궁금하지만 차마 가서 열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책이 기껏해야 운동이나 건강에 관련한 책이나 잡지 아니면 차타레 부인의 사랑 같은 문학 작품 정도였을텐데 헌책방에서 책을 뒤지던 청소년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히 야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반포의 그 헌책방은 가지 않게 되었다. 지나다가 한두 번 들러본 적은 있었겠지만 학교 주변에 더 책은 많고 무서운 수문장 대신 친절한 사장님이 웃으며 반겨주시는, 마음 편히 들어가 종일 시간을 보내도 좋을 헌책방이 몇 군데 있었고, 집보다는 주로 학교에 머물게 되면서 집근처에 있는 헌책방에 갈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헌책방은 내가 혼자 시간을 보내기에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한군데였어서 학교 근처의 헌책방은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하지만 한동안은 헌책방보다 만화방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할 무렵에는 작은 헌책방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내가 살던 곳이나 직장이 있는 근처에는 헌책방이 아예 없었다. 가끔 헌책방을 찾아가고 싶은데 학교까지 가기는 천금 같은 주말의 시간이 아까워 망설이다가 금호동에 고구마라는 대형 헌책방을 찾아냈다. 금호동은 그때 내가 살던 곳에서 지하철로 몇 정거장만에 갈 수 있는 곳이라 토요일 오후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만했다. 고구마는 기존에 내가 알던 헌책방과는 비교도 안되게 큰 곳이었다. 지하에 큰 헌책방이 있었는데 내려가는 계단부터 양쪽으로 책이 층층이 쌓여있어 보물이 가득한 지하 던전에 입장하는 설렘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무렵에는 고구마 헌책방에 두어 달에 한 번씩 가서 책 냄새를 맡으며 보물을 수집하고, 어쩌다 모교 근처에서 친구들과 약속이 생기면 조금 일찍 가서 예전에 가던 헌책방을 둘러보곤 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일본 동경에서 잠시 근무하게 되었고 이때 일본의 진보초 고서점 거리를 알게 되었다. 동경을 찾는 관광객들에게는 꽤나 유명한 곳이었나 본데 나는 주말에 혼자 오차노미즈의 스키샵 거리에 스키장비를 구경하러 갔다가 우연히 이 거리를 발견했다. 스키샵 거리의 한쪽 끝에서 햄버거를 먹고 나와서 순간 방향을 잘못 들었는데 눈앞에 줄줄이 이어진 헌책방이 있어서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거리를 탐색했었다. 이곳에 있는 헌책방들은 규모가 천차만별인데 작은 곳도 큰 곳도 깔끔하게 정리가 잘 되어 있었고 책방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둘러보며 구경을 하기에도 전혀 부담이 없었다. 길거리에 내놓은 전집들이나 그림책, 사진집 등을 구경하면서 걷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쉽게도 책 냄새는 한국의 오래된 헌책방보다 약하게 느껴졌고 한국의 헌책방에 비하면 지나치게 잘 정돈되어 있어 헌책방의 맛은 조금 덜했지만 그래도 동경에 머물던 시절에 홀로 외출을 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 자주 가던 곳이다. 한국 책은 찾기 어렵고, 내가 일본 책을 사서 읽을 정도로 일본어에 능숙한 것도 아니라 이곳에서 책을 산 기억은 없지만 그냥 잘 정돈된 헌책방이 줄줄이 이어진 거리를 걸으며 불쑥 한 곳에 들어가 뜻도 모를 책들을 뒤적이다 나오는 그 여유가 좋았다.


홍길동 중고서점을 처음 찾은 것은 벽화 논란이 있고서 두어달 지난 후였다. 종로에 가는 김에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이곳저곳 둘러보았다. 요즘 도시 곳곳에 있는 대형 중고서점들은 깔끔하고 널찍하게 관리되어 있어 헌책방의 느낌보다는 그냥 대형 서점에 방문하는 느낌이었는데 이곳은 굉장히 큰 규모임에도 내부의 느낌은 동네 헌책방에 가까웠다. 2층짜리 프랜차이즈 커피점이 있던 자리에 커피점의 인테리어를 그대로 둔 채로 책방을 열어서 커피점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어 뭔가 조화롭지 않은 느낌이 들고. 2층짜리 큰 매장임에도 비는 공간이 없을 정도로 빼곡히 쌓여 있는 책들이 저마다 연륜을 자랑하듯 낡은 책향기를 뿜어낸다. 책은 큰 카테고리로 분류되어 있을 뿐인데 그마저도 정확하지 않고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책들도 복도 곳곳에 무질서하게 쌓여 있다. 그리고 책방이라기엔 약간 어두침침한, 전등보다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의 비중이 더 크게 느껴지는 실내 조도가 예전에 다니던 동네 헌책방의 느낌을 살려내는데 한몫하고 있었다. 첫 방문에 이곳에 반해 버린 나는 한두 시간 탐색을 거쳐 몇 권의 보물을 찾아내고 조만간 작정하고 다시 찾아와 하루 종일 머물 것을 다짐하며 책방을 나섰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났고 그곳을 다시 찾고 싶은 마음에 영업시간을 확인하다가 폐업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자의든 타의든 정치적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유동인구가 줄었고, 종로라는 지역의 살인적인 부동산 물가를 고려하면 홍길동 중고서점이 문을 닫게 되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나도 처음 그곳을 찾아 둘러보면서 제발 이곳이 문 닫는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둘러보았는데 아마도 머지않아 사라지게 될 운명을 직감했기 때문이리라. 이렇게 또 한 곳, 푸근한 책 냄새가 해무처럼 깔려 있는 아주 괜찮은 보물섬 한 곳을 잃었다.


어릴 적 부모님께서는 책을 잘 사주셨다. 책을 사겠다고 하면 더 이상 묻지 않고 돈을 주셨으니 굳이 헌책방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정작 내가 사는 책의 대부분은 새 책을 파는 대형 서점에서 산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헌책방을 좋아한다. 헌책방에서 책 냄새를 맡고, 숨겨진 책들을 찾아내고 그 책에 묻어 있는 누군가의 흔적에 내가 더듬은 흔적을 슬쩍 얹어본다. 깨끗하게 잘 정돈된 대형 중고 서점도 좋고, 편리하게 온라인으로 주문할 수 있는 온라인 헌책방도 좋지만 낡은 책 냄새를 맡으며 한 권 한 권 더듬으며 책을 골라내는 즐거움보다 좋을 순 없다. 세상이 아무리 편해져도 책은 책방에 가서 사고 싶다. 책에 묻은 세월까지 덤으로 살 수 있는 고즈넉한 헌책방이라면 그곳이 편하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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