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키버프 Feb 25. 2022

토요일의 스키장

각자의 천국



토요일에 스키장을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오랜만에 토요일 아침 일찍 스키장에 왔다. 어느 스키 브랜드에서 하는 이벤트에 참가하게 되어 반 강제로 이 어리석은 길에 들어서 버렸다.


아침 일찍 스키장으로 향하는 셔틀을 타기 위해 정류장에 도착하니 벌써 평일보다 몇 배는 많은 사람들이 셔틀을 기다리고 있다. 주말이니 셔틀도 가득 차서 가겠거니 생각했는데 다행히 셔틀은 두대가 나란히 와서 오히려 평소보다 쾌적하게 스키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 출발이다.


한 시간 반 정도를 달려 아침 리프트 운영을 코앞에 둔 스키장에 도착하니 이제 본격적으로 눈이 보이는  모든 곳이 북적거린다.

역시 토요일은 집에서 보내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되뇌며 개인 장비 보관소로 향한다.

시즌권을 구입하고 개인장비를 스키장에 두고 다니는 사람들만 출입하는 곳이기에 사정이 다른 곳보다 나을 것 같았지만 어림없는 바람이다. 이곳도 전에 없이 북적거린다. 탈의실에는 사람이 가득하고 장비를 갖추기 위해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도 앉을 곳이 없다.

행사까지 두어 시간이 남아 있어서 조금 한적한 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다가 인파가 조금 빠진 뒤에 돌아와 장비를 챙길 요량으로 돌아서는데, 내 락카가 있는 복도에서 어린 아들에게 스키부츠를 신기고 있는 한 남성과 마주쳤다. 길목을 막고 세상 불편한 자세로 딱딱한 스키부츠와 어린 아들을 상대로 낑낑 실랑이를 하던 그는 내가 다가오자 길을 막고 있다는 미안함과 하필 지금 지나가야 하냐는 원망이 섞인듯한 표정으로 지나갈 길을 급히 내어준다.

아, 이 주말에 아이까지 데리고 웬 고생이람. 그에게 길을 내줘 고맙다는 목례를 하며 그 복도를 벗어났다.


평소 스키장에 오면 커피를 앞에 두고 책을 읽곤 하던 라운지에 앉아 역시 커피를 주문하고 책을 폈다.  시간 반만 이곳에 있다가 락카에 가야겠다. 오늘은 이곳에도 빈자리가 거의 없다.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 대부분은 아이들을 슬로프에 내보내고 이곳에 앉아 창밖의 붐비는 슬로프를 바라보며 열심히 아이를 찾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곳은 여느 커피숍이나 라운지처럼 크지도 작지도 않은 볼륨으로 음악을 켜놓는데  평소에는 주로 아이돌 그룹의 댄스 음악들 위주로 선곡되어  취향과 그다지 맞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Belinda Carlisle  Heaven is a place on earth  흐른다. 사춘기 시절 미국의 팝송을 들으며 빌보드 차트를 열심히 외우던 때에 듣던 노래인데 이곳에서 들으니 새삼 반갑다. 읽던 책을 잠시 덮고 음악에 귀를 기울여 본다. Oh heaven is a place on earth.


십여 년 전 월급쟁이로 살던 시절, 평일에는 회사에서 몸과 마음을 불사르고 주말이면 녹초가 되어 총알같이 지나는 시간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생활이 계속되던 때였다. 아마 지금보다 에너지도 넘치고 열정도 넘쳤을게다. 그때는 겨울이면 토요일 새벽같이 집을 나서 평창까지 두 시간이 넘는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가 주말을 보내고 일요일 오후면 스키를 더 타고 싶은 아쉬움을 가득 안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서울로 천근만근 발걸음을 옮기는 생활이 매주 계속되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날씨가 안 좋아 설질이 엉망이어도, 주중에 너무 피곤하게 일을 해서 몸이 당최 침대를 떠나지 않으려 해도 아랑곳하지 않았고 붐비는 주말만이라도 스키를 탈 수 있어 마냥 행복했다. 내가 있는 바로 이 토요일의 스키장이 그때의 내겐 단 1초라도 더 머물고 싶은 세상 행복한 곳이었는데 나는 어쩌다 이리 까탈스러워졌을까.


일을 하는 시간이 비교적 자유로워지다 보니 몇 해 전부터 주말 스키는 피하게 되었다. 특히나 토요일의 스키장은 금기의 대상이 되었다. 어쩌면 평일의 쾌적한 스키장에 드나들며 토요일에 스키 타는 사람들을 동정하거나 조금 깔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토요일의 인파를 피해 있다가 사춘기 무렵 가사의 뜻도 잘 모르고 흥얼거리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문득 조금 전 락카에서 보았던 그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복잡한 주말 천금 같은 시간에 아이까지 데려와 아이 장비 챙기랴 이 인파 속에서 아이 안전 챙기랴 딱해 보였지만 어쩌면 나의 편견일 뿐 그에게는 아이와 함께 있는 이 토요일의 북적거리는 스키장이 바로 천국일지 모른다. 아마  월요일 아침부터 아니 지난주 이곳을 떠나던 순간부터 오늘 아침 스키장을 향해 집을 나서던 그 순간까지 이곳에서 보낼 시간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와 함께 스키장에서 보내는 이 시간에 수많은 인파와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스키 장비는 그의 행복에 전혀 방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아주 어렸던 시절 내 아버지도 그와 같은 모습이었다. 지치고 힘드셨을 텐데도 주말이면 기꺼이 어린 나를 스키장에 데려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다.


원래 주말에 스키를 잘 타지 않지만, 앞으로도 주말 스키장은 웬만하면 피하련다. 주말 스키어들에게 나 한 명의 자리라도 내주어야겠다. 내 생각은 틀렸다. 토요일에 스키장을 찾는 것은 고된 한 주를 버티게 해주는 아주 커다란 행복이다.



2022. 1. 15


작가의 이전글 햄버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