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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키버프 Mar 04. 2022

탄천 수영장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탄천 종합운동장이 있다. 성남 FC 프로 축구단이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멋있는 축구장이 있고 잔디가 곱게 깔린 야구장과 아이스하키 선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빙상장이 있고 그 외에도 여러 종목의 잘 갖추어진 경기 시설이 구비되어 있어 조금 과장하면 올림픽을 치를 수도 있을 것 같은 곳이다. 아내와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동네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는데 탄천 종합운동장은 내가 이 동네를 좋아하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나는 코로나가 발생하기 두어 해 전부터 이곳에서 수영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스키를 탈 수 없는 계절의 무료함도 달랠 겸  운동도 좀 할 겸  특별한 열의 없이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지만 두어 달만에 수영의 매력에 푹 빠져버려서 한동안 틈날 때마다 수영 강습 동영상을 열심히 찾아보고 레슨이 없는 날에도 수영장을 찾아 몇 시간씩 연습을 하면서 지내곤 했다. 수영은 수영복과 수모 그리고 수경만 있으면 더 이상 특별한 장비가 필요 없고 실력이 조금 쌓이면 오리발 정도가 추가되는 운동이라 더 좋은 장비를 계속 욕심내는 장비병이 없을 것 같았는데 수영이 재미있어지면서 수영복도 이것저것 갖고 싶은 것이 생기고 수모와 수경도 여러 개를 갖추려 하는 등 의외로 장비병이 생겨 버렸다. 그래도 다른 종목에 비해 장비가 단출하고 가격 부담도 훨씬 적어 조금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탄천 종합운동장의 수영장을 우리 수영 레슨반 사람들은 보통 탄천이라고 불렀고 조금 더 정성 들여 부를 때는 탄천 수영장이라 불렀다. 아마 우리 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수영하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나 퇴근 후에 탄천 종합운동장 수영장에서 수영 레슨을 받고 있어"라고 말하면 너무 길고 조금 고지식해 보일 것 같다.

탄천 수영장은 다른 지역의 수영인들에게도 인기가 많아서 주말이면 원정 수영을 오는 사람들도 꽤 많다. 처음 탄천 수영장에 레슨을 받으러 다니기 시작했을 때에는 요즘 수영장 모두 비슷하려니 생각하고 왜 주말에 다른 수영장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이 굳이 일일 입장료를 내가면서 여기까지 오나 의아했는데 탄천 수영장 휴관일에 주변의 다른 수영장에 한 번씩 가서 수영을 해보게 되면서 내가 다니는 탄천 수영장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알게 되었다. 탄천 수영장은 애초에 경기용으로 지어진 곳이라 주변의 다른 수영장 대부분의 풀이 25미터 길이에 1.3미터 내외의 깊이인데 이곳은 50미터 길이에 2미터 깊이의 풀로 되어 있어 그야말로 거대한 수영장 시설을 갖추고 있다. 초보 시절에는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2미터 깊이 때문에 한번 출발하면 25미터도 아닌 50미터를 중간에 멈추지 못하고 내리 가야 해서 부담이 되지만 어느 정도 익숙해지고 나면 25미터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 것은 뭔가 싱거운 느낌이 들게 된다. 2미터 깊이의 수영장은 부력이 수영에 미치는 영향과 같은 어려운 얘기를 떠나 수영을 한참 하다 보면 우주 유영을 하는 듯한 묘한 즐거움을 주는 매력이 있고 스타트할 때 다이빙으로 입수를 해도 바닥에 부딪히는 일은 없을 것 같은 안도감을 준다. 사실 대부분의 수영장에서 레슨 시간 외에는 다이빙 입수를 안전 때문에 금지하고 있어서 다른 수영장에서 다이빙 입수를 해 볼 기회는 없었지만 1.3미터 깊이의 수영장에 머리부터 입수하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탄천 수영장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다른 수영장에서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만나 수영 얘기를 하게 되면 나는 2미터 깊이의 50미터 풀에서 운동하는 사람이야 내지는 내가 운동하는 곳은 국제 경기 규격에 맞춘 수영장이야 라며 우쭐거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럴 때는 친구들도 역시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며 호응해 준다. 시답잖은 우쭐거림에도 호응해 주니 친구가 좋긴 좋다.


탄천 수영장은 이름 그대로 분당의 탄천변에 자리하고 있다. 수영장에서 탄천을 건너면 곧바로 큰 종합병원이 있고, 한 블록만 가면 지하철역과 종합터미널이 있는, 분당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 한 곳이 나온다. 그런데도 탄천 수영장 주변은 꽤나 한적하다. 지하철역에서 탄천 수영장 쪽으로 걸어서 이동을 해보면 지하철역 광장에서부터 종합병원까지 복잡 복잡한 거리가 펼쳐져 있고, 중간에 백화점도 있어서 사람과 차가 엉켜있는 모습을 심심찮게 보게 되는데 병원을 지나 탄천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들어서면 거짓말처럼 다른 세상이 된다. 탄천을 가로지르는 이 다리의 이름은 야탑교. 그냥 조금 오래된 신도시의 주민 편의를 위한 교량일 뿐인데 이 다리에 숨겨진 매력이 있다.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수영장을 다니지 않고 있지만 탄천 수영장에서 수영 레슨을 받던 때에는 저녁 8시 레슨반에 다녔었다. 보통 판교에 있는 사무실에서 7시에 나와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역에 내려 탄천 수영장까지 걸어서 이동을 하곤 했다. 사무실에서 탄천 수영장까지 멀지 않은 거리인데도 한 시간이나 일찍 출발하는 이유는 간혹 판교에서 빠져나오는 교통편이 저주에 걸려버린 듯 마비가 되어 고작 4킬로미터 정도 거리를 버스로 한 시간 가까이 걸려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때도 있고, 성격상 어딘가에 갈 때 여유 있게 도착해서 기다리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기도 했는데, 사실은 해 질 무렵에 야탑교를 건너고 싶은 이유가 가장 컸다.


야탑교를 걸어서 건너다가 다리의 중간쯤에서 하류 쪽을 바라보면 약간 북서쪽을 바라보게 된다. 늦은 봄부터 초가을 무렵에 수영 레슨에 가기 위해 야탑교를 건널 때는 해가 지면서 노을이 깔리는 시간이 되는데. 노을 지는 풍경이야 어지간해서는 멋진 색으로 채워지게 마련인지라 이곳 야탑교에서 바라보는 북서쪽의 하늘 역시 노을색이 낮게 깔린 채로 다가오는 밤을 준비하며 군청색으로 짙어지는 하늘과 보기 좋게 섞이고 있다. 야탑교의 북서쪽은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공군 기지 덕에 고층 빌딩 없이  산뜻한 스카이라인을 그려낸다. 반대편 시야에 걸쳐지는 북동쪽으로는 큰 건물이 줄줄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강남 테헤란로의 수십층 건물에 비할바는 아니고 배경의 아주 작은 구석을 차지할 뿐이라 딱히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맞은편의 단정한 스카이라인과 대비를 이루는 모습이 의외로 조화롭게 보이기도 한다.

아래쪽에는 탄천이 보인다. 탄천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개천인데 이 구간은 그래도 폭이 꽤 넓다. 탄천의 양쪽 둔치는 잘 정돈된 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널찍한 잔디밭이 이어지고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으며 군데군데 벤치와 운동기구 그리고 농구장과 축구장 같은 것들이 있다. 잔디 구간의 한 편에는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반려동물을 위한 놀이터가 마련되어 있다. 해질 무렵의 이곳 탄천의 풍경은 한가롭기 그지없다. 혼자 또는 둘이 아니면 삼삼오오 산책을 하는 사람들이 보이고, 목줄을 한 채로 한껏 신이 난 반려견에 끌려 반은 뛰다시피 걷는 사람, 뛰는 사람, 자전거를 타는 사람, 킥보드를 타는 사람 잔디에 멍하니 앉아 있는 사람 등 참 다양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공간이 넉넉하여 붐비지 않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탄천 이곳저곳에 있는데 누구 하나 움직임을 재촉하는 사람 없이 여유 있게 하루를 마무리하는 모양이고 이 모양이 평범한 야탑교의 저녁 풍경에 특별함을 더해 준다.

야탑교에서 한눈에 들어오는 이 풍경의 맨 앞줄에 굳이 다리 위에 서있는 나를 끼워 넣는다. 오늘도 별 탈 없이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고, 이제 내가 좋아하는 물장구를 친 후 집에 돌아가 운동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내일 아침까지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직 채 끝나지 않은 하루를 성급히 훈훈하게 마무리하려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대체로 이 시간이 이렇게 흘러가면 잠들 때까지 별일 없이 평온하게 보내곤 했으니 계속해서 그러길 바라는 마음인 게다.

다리 위에서 한가로운 풍경을 바라보며 걷다가 주위를 보면 다리를 건너며 나처럼 하염없이 하류 쪽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고, 걷다가 멈춰 서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이 풍경이 나만 좋아하는 것이 아닌 것 같으니 내가 변태는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되면서 한편으로는 나 홀로 감추어두고 즐기고 싶은 풍경인데 다른 이들과 강제로 나누게 된 것 같아 서운하기도 하다.


코로나 덕에 탄천 수영장에 가지 못한지도 벌써 꽉 채워 2년이 지나갔다. 아쉽게도 야탑교의 저녁 풍경도 딱히 저녁 시간에 야탑교를 건널 일이 없어지니 볼 기회가 없었다. 일부러 그 풍경을 보기 위해 저녁시간에 다리를 건너면 되겠지만 탄천 둔치에 운동이나 산책을 하러 가게 되는 경우는 있어도 굳이 둔치 위로 올라가 야탑교를 건너게 되는 일은 없었다. 또 한 해가 속절없이 흘러가기 전에 다시 탄천 수영장에 가서 운동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야탑교의 풍경도, 탄천 수영장의  널찍한 락카와 샤워실도, 그리고 특별히 친하게 살갑게 지내진 않았지만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서로 안부를 묻던 옛 같은 반 동료들도 모두 많이 반가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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