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에서 내린 여행객들이 각자 수화물를 찾아 어쩐지 피곤하고 빠른 걸음으로 속속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형광색의 빨간 트렁크를 쥐고 단출한 출구를 향해 초조한 발걸음을 옮겼다.
며칠 전, 보고타에 사는 클라이언트 하이르 Jair 씨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혹시 주변에 홈스테이 하는 사람 있나요?]
하이르는 자기 집이 공항과 가깝다며, 괜찮다면 서재에서 자도 좋다고 했다.
질문에 내포된 나의 답을 명확히 집어낸 고마운 사람이다. 내심 옹졸하게 기대했던 공항 픽업까지 그는 흔쾌히 오케이를 던졌다.
[혹시 모르니 나는 이렇게 생겼다]며 미리 셀프 사진까지 보내 두었다.
출구에서 걸어오는 하이르를, 나는 처음에 영업하는택시기사로 착각했다. 그러다 그가 쥔 휴대폰에 내 사진이 밝게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일순간무장해제되었다. 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비가일, 찾을 것도 없네. 아시아인이 너밖에 없어! 하하하”
자정 넘어 도착한 하이르의 집은 아파트였는데, 마침 큰 딸이 여행을 갔다며 서재 대신 침대에서 지내라고 안내해주었다. 그날 밤새, 나는 홑이불 속에서 이를 딱딱 떨었다. 전기장판을 그리워하며, 이리저리 뒤척이고 몸을 주물러 열을 냈다. 옆 침대에선 4살 배기 막내가 곤히 자고 있었다.
보고타는 지대가 높다. 밤이 되면 기온이 뚝 떨어졌다.
아파트 거실에서 보이는 전경
2015년 11월 13일 금요일
다음날 아침, 하이르 가족- 아내 클라우디아, 늦둥이 딸 다나와 함께 식당에 갔다. 보고타식 아침식사를 알려준단다. 하이르 가족이 주문한 것은 닭고기에 곱게 간 콩과 여러 가지 채소를 다져 올린 후 바나나 잎에 싸서 찐, 타말(Tamal)이라는 요리.
클라우디아는 나에게 콜롬비아의 전통 아침식이라며 수프(caldo)를 권해주었는데, 우유를 베이스로 하고 유타(yuta, 마)와 계란이 들어간 것이었다. 짭짤하게 구워진 긴 빵을 손으로 뜯어내 수프에 담가 넣고 먹는다. 고수가 듬뿍 들어있다. 밤새 떨고 일어나서 그런지 따뜻한 보양식 같았다. 국밥을 말아먹듯이 빵을 잔뜩 넣고 푹 절여 먹는 건 처음이었는데, 퍽퍽한 빵이 따끈하고 보들보들한 채로 목을 넘어가는 게 좋았다.
하이르는 내가 먼저 묻지 않아도 앞으로 필요할 거라며 심카드를 사서 등록해주었다. (심카드를 등록하려면 주민번호가 필요했다.) 저녁엔 내가 혼자 다니는 게 불안했는지 영어를 할 줄 아는 사촌 친구를 붙여 주어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그녀의 이름 또한 클라우디아였다.
클라우디아와의 저녁식사는 꽤 즐거웠다. 두 클라우디아는 풍성한 머리칼과 또렷한 이목구비에, 유학파였고, 여성 사업가 혹은 성공한 직장여성이었다. 아침에 만난 클라우디아가 중후한 매력을 풍긴다면, 저녁에 만난 클라우디아는 밝고활동적이었다.
그녀는 나를 쇼핑몰 푸드코트로 데리고 갔다. 메뉴를 설명하다가 갑자기 좋은 생각이 있다며 샘플러를 주문했다. 콜롬비아에 오래 지낼 거면 입에 맞는 음식 이름을 외워두라며. 한 접시에는 구워진 동그랗고 딱딱한 빵, 구운 바나나, 등갈비, 샐러드 등이 나왔다. 특히 매콤하게 간장으로 졸인듯한 갈비는 한국의 갈비찜과 같은 맛이, 구운 소시지에서는 양념 순대 맛이 났다.
그녀는 재료와 조리방식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주었다. 초리소,,,쁠라따노,,,나는 음식 사진에 이름을 적어두었다.
쇼핑몰 안은 꽤나 가족적인 분위기지만, 바깥의 거리는 마치 새벽 두 시 홍대처럼 붐볐다. 트럭을 개조한 파티 차량이 연이어 지나갔다. 돈을 내면 차에 올라타 술도 마시고 춤도 출 수 있다고 한다.
쇼핑몰에서 내려 택시를 타러 가는 동안 클라우디아는 팔짱을 꽉 끼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그녀에게 끈질기게 손을 내미는 남성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지나온 후에, 누가 손내밀 때 절대 닿지 않게 주의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가끔 멈추어 서서 이건 마리화나 냄새니 알아둬,라고 알려주기도 했다.
거리 곳곳에는 경찰들이 경찰견과 함께 배치되어있었지만 그들은 마치반려견과산책을 나온 사람처럼 여유 있어보였고, 어떤 식으로든 제제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금요일 밤, 시내는 낮보다 더 밟아졌다. 활기와, 레게똔 음악과, 술주정 소리와, 마약 냄새로 가득 찼다. 우리는 서둘러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사진 - 클라우니아가 주문해 준 샘플러
2015년 11월 14일 토요일
주말이라, 하이르의 가족들이 하루 종일 나와 동행해준다. 이들이 없으면 정말 힘들었을 것이다.
덕분에 길을 헤매지 않고 구시가지와 보테르 미술관에 다녀왔다.
구시가지에는 노란색건물이 많다. 금의 도시답게 금을 귀하게 여겼던 탓인가 보다. 황금색 건물을 양 옆에 두고, 길은 산으로 이어지고 산은 구름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도시다.
햇볕이 강하지만 언제 비가 쏟아질지 모르니 장우산을 하루 종일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 고산지대에서는 아무도 섣불리 날씨를 예측하려 하지 않는다. 곧 비가 오나요? 하고 물었더니 그들이 웃었다. 우린 기상청 예보를 확인하지않아.
내일은 메데진으로 이동한다. 앞으로 애핏EAFIT 이라는 유명 사립대의 부속 어학당에서2주간,38시간짜리 스페인어 수업을 들을 것이다. 오늘에서야 부랴부랴 학교 근처 안전한 지역에 호스텔을 찾아 1주 예약했다. 일단 일주일 살아보고 숙소가 괜찮으면 연장하기로 한다.
인터넷을 뒤져 보니 북쪽 도시 산타마리타로 가면 세계에서 가장 싼 값에 다이빙 라이선스를 딸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메데진 어학연수가 끝나면 북쪽 도시에서 좀 머물며 다이빙을 배우기로 한다.
콜롬비아 북쪽은 고산지대가 아니라 캐리비안해 인접지역이라 여름옷이면 충분하다.
서울에서 올 때, 백팩을 캐리어에 담아왔었다. 하이르 가족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캐리어와 코트, 겨울 옷을 이집에맡겨 두고 메데진과 북쪽 도시 여행을 하기로 한다.
백팩에 여름옷과 공부 거리만 가방에 챙겨 갈 것이다.가벼운 옷만 챙겼는데 왜 백팩은 13킬로나 나가는 것일까... 랩탑 카메라 지갑 등 무겁거나 값나가는 것들은 기내용 서브 백에는 담았는데. 어쨌거나 나를 기둥 삼아 앞으로 서브 백 뒤로 백팩을 매니 이제야 배낭여행자 티가 난다.
--앞으로의 대략적인 일정. 모든 일정은 현지 사정 혹은 내 기분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돌아오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