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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마님 Jun 22. 2022

흐르는 사람

물, 흙, 금, 불, 나무

일정 없는 8개월의 남미.


장기 여행자에게 여행 일정이 없다는 얼핏 백수의 하루를 모아놓은 것이나 베를린에서 한 달 살기와 같아 보인다.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남미에 있는 8개월 동안 나는 일주일 뒤, 혹은 한 달 뒤에 내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있을지 몰랐다. 어디에 언제 있을지 모른다는 건, 경비를 어떻게 쪼개 써야 할지 가늠하기 어렵고, 숙소를 어느 시점에 어디에 예약할지도 모른단 뜻이다.

 그냥 강물이 바다에 가듯, 콜롬비아에서 브라질로 떠밀려 흘렀다.


얼마 전, 친목 모임에 나가 화기애애하게 놀다가 mbti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사주로 이어졌고, 사주 앱을 깔아 사주팔자를 들여다봤다.  내 대표 한자는 물水이었고, 팔자에는 흙土이 많았다. 흐르는 사람이고, 가만히 두면 뭉쳐서 고집스러워진다는 해석이었다.  


예전에 돈을 내고 사주풀이를 본 적이 한 번 있었는데, 여행을 많이 다니게 되고 아니면 아주 몸이 쑤셔 못 버틸 거라고 했다. 돈 걱정은 안 할 거라고, 다달이 세를 받는 직업을 갖게 될 거라고도 했다. 그때는 '요즘 여행 안 다니는 사람이 어딨어'라고 생각했다. 이제와 둘러보니 내 주변에 여행 다니는 사람이 많은 것은 내가 여행 다니는 걸 알고 대화 주제가 자주 여행으로 튀었기 때문이며, 여행 다니면서 만난 사람이 많아서였다.


어쨌거나 나의 계획 없는 여행을 팔자 풀이에 붙여보자면 이런 해석이 된다. 아집으로 단단히 뭉쳐 꼰대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사람 사이를 부단히 흘러야 다. 실제로 내 여행 목적은 인연이 닿는 한 많은 현지인과 여행객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말이 통하고 진심이 통하면 그들은 마음을 내어준다. 그들의 마음이 나의 마음을 치즈처럼 녹이곤 했다.

마지막으로 다달이 세를 받는 팔자 풀이까지 완성하고자 6년이 지난 이제 와서 일기를 편집해 본다.


2015년 10월, 서울에서 출발할 당시 정해진 것은 딱 가지였는데,

1 - 뉴욕에서 3주 지내고 콜롬비아 보고타로 들어가 8개월 후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로로 나온다.

2 - 보고타에서 이틀 머물고 바로 메데진으로 넘어간다

3 - 메데진에서 2주간 스페인어 어학수업을 듣는다.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동안 나머지 7개월 2주의 일정을 짠다.


나도 과거로 가서 무슨 생각이었는지 묻고 싶다. 하지만 한 편으론, 그래 그게 나의 운명이라면! 무모하고 무식하지만, 낙천적이고 사람 만나는데 거리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릇에 따라 형태가 바뀌고, 흘리면 더 큰 곳을 향해 흘러가는 게 나라면!!!...



아. 덧붙이자면 글이 감성적인 것은 6년이 지나 퍽 차분해진 현재 시점(2022년) 탓이며, 게을러빠진 나를 감싸는 핑계이자 화려한 밑밥이고 합리화다.

약간 답답하고 위험해 보여 화火가 나려 한다면, 나는 물임을 잊지 말아 주길... ㅎ


(스르르)


참고로 내 mbti는 ENFP로 재기 발랄한 모험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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