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타고니아는 재미있는 곳이다. 나처럼 숫자 개념이 없는 사람들은 시간이라는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기 딱 좋은 곳. 해가 오전 6시 30분에 떠서 밤 9시 30분에 진다. 해가 뜬 시간이 15시간 정도 되는 셈인데, 그 시간이 ‘날이 밝네’ 정도가 아니라 해가 아주 쨍쨍하여 하루 종일 한낮 같다. 하루를 이틀, 삼일 같이 보낼 수 있다.
날짜를 보고 놀랐다. 한 5일 있었던 기분인데 3일 있었네.
베개 맡을 살, 금 기어가던 고양이의 발걸음에 눈을 떴다. 샤워하고, 플리스와 바람막이를 챙겨 입는다. 8시에 문을 여는 빵집에 간다. 델리에 서서 햄과 치즈를 고르면, 직원이 덩어리를 꺼내어 슬라이더로 잘라 봉지에 넣어준다. 1개? 되묻는다. 1개. 이것도 1개? 응, 1개.
치즈 한 조각, 빵 한 조각, 햄 한두 종류를 한 슬라이스씩 봉지에 각각 넣어주고, 카운터로 가란다.
줄이 길다. 긴 줄을 기다렸는데, 우리 돈으로 1천 원 정도란다. 음… 나 지금 2만 페소짜리 뿐인데.. 2만 페소를 보여주니(3만 원쯤) 직원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여기는 왜인지 몰라도 큰돈을 정말 싫어한다. (잔돈을 거슬러 주느니 팔지 않겠다고 하는 곳도 있었다.)
조각난 햄과 치즈를 들고 어쩔 수 없이 줄 맨 뒤로 돌아갔다. 새로 줄을 서는 사람마다 2만 페소를 보여주며 작은 단위 돈으로 바꿔 줄 수 있는지 물어보는데, 아무도 없단다. 결국 어떤 곱슬 아저씨가 나섰다,
[친구야, 일단 내가 내주고, 자, 이제 내가 바꿔다 줄게]
하더니, 나에게 천 페소를 쥐어 주고, 내 돈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아 감사합니다!]
일단 위기는 모면했으니 기쁜 마음으로 계산을 하고, 가게 입구에서 아저씨를 기다렸다. 10분이 되어도 아저씨는 돌아오지 않았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아, 당했나?!!! 이제야 상황 파악을 하곤 부랴부랴 밖으로 뛰어나갔다.
곱슬머리 아저씨는 건너편 주유소 앞에서 주유소 직원과 화기애애하게 떠들고 있었다. 아저씨의 손에는 돈이 들려있었다. 그가 나를 보고 밝게 웃더니, 지폐를 흔들어 보이며 크게 소리친다.
[아! 여기~! 이 친구도~! 잔돈이 없대~!]
저렇게 해맑다니?! 없으면 빨리 와줘야지! 속이 탄다.
결국 내가 아저씨 쪽으로 갔다. 아저씨는 내 2만 페소 지폐를 돌려주며,
[천 페소쯤 뭐, 선물로 받아. 칠레 선물. ] 하며 우물쭈물 미안해하는 나의 등을 토닥여준다.
아저씨, 이건 천 페소 때문이 아니라, 잠깐이나마 의심해서 미안한 거예요…
집에 와서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숙소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커피와 함께 햄치즈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가만, 시작이라니. 할 일이 없는 게 일상인데. 그러므로 다시 침대에 들어가서 따뜻한 커피에 녹은 몸을 뉘이고, 창문 너머로 구름을 어깨에 잔뜩 얹은 화산을 구경하기로 한다. 아직 9시라니...
일찍 일어난 이유는 숙소에서 아침에만 커피를 무료로 주기 때문이다.
꽉 찬 8인실 도미토리지만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행자들은 다들 어찌나 부지런한지, 자기 등짝보다 더 큰 배낭을 각자의 침대 밑에 쑤셔 넣은 채 진즉 트래킹에 나선다.
나의 목적은 작은 마을에서 자연을 보며 쉬는 것뿐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을 중심의 호숫가로 간다. 바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호수 위로 눈 덮인 화산 두 개가 우뚝 서 있어 절경이다. 1년에 4개월뿐인 이 아름다운 여름은 관광객이 몰리는 유일한 시기다. 호숫가엔 관광객, 플리마켓, 길거리 식당, 아이스크림 가게 등으로 하루 종일 북적인다. 긴긴 하루 내내, 10분 거리의 이 호수를 하루에 네다섯 번은 왔다 갔다 했다. 이 언덕길을 몇 번을 오르내리는 거야, 구시렁대면서도 열심히 걸어 다녔다. 이게 나의 할 일이라면, 해야지.
그러다 숙소 옆, 노란 벽의 액세서리 가게 프랑코&마리아 부부네 집에 터를 잡고 앉았다. 호수와 숙소를 왔다 갔다 하다 보면 이 노란 가게를 꼭 지나야 하는데, 그때마다 가게를 지키는 프랑코와 인사를 했더니 결국 이렇게 되었다. 두 부부는 관광객이 몰리는 여름에는 수공예품과 직접 디자인하고 세공한 액세서리를 판다. 칠레 원주민의 전통문양이나 종교적 무늬, 이를테면 영혼, 나무, 음양의 신비로운 문양을 그린다.
그들은 내가 옆 숙소의 8인실 도미토리에 하루 2만 원을 내고 묵는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8인실인데 너무 비싸다! 크리스티앙네 방이 하나 남으니 거기서 묵어!]
콜롬비아에서 만난 칠레 친구들의 조언은 사실이었다. 파타고니아에선 여행자들을 잘 재워준다고, 숙소비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