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나 외국나가서나 작은 가게를 좋아한다. 베이커리에서 빵을 사고, 서점에서 책을 사고, 정육점에서 고기를 사고, 채소가게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는 게 좋다. 당연한 말 같지만 서울에서는 이렇게 살기도 힘들다. 임대료 부담으로 품목수가 적으면 사업 운영이 힘든 탓도 있지만, 대형마트에서 팩에 담겨 진열된 상품을 담아 나오는 퍽 심심한 쇼핑을 많은 사람들이 선호하는 것도 한몫한다. 바쁜 도시에 살면 이런 소소한 재미도 굳이 시간을 내 찾아다녀야 한다.
작은 가게에서는 그 주인이 곧 상품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현지 전문가이기도 하다. 몇 번의 방문으로 여러 가지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지나는 이 계절엔 어떤 과일이 제철인지, 이 지방에선 어떤 빵을 먹는지, 어떤 생선이 잡히는지. 주인장의 설명이 좀 부족하다 싶으면, 그 곁에 단골손님들이한두 마디씩 꼭 보탠다.저녁거리를 고민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면 조리법과 입맛이 덤으로 딸려온다.
와인으로 유명한 칠레답게, 이곳 과일가게는가게의 한 켠이 다 포도다. 칠레를 장악한 유럽인들은 이곳 날씨가 포도농에 적합하다고 판단해 포도밭을 만들고 와인을 생산해 유럽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내가 신나서 사려 하는데, 크리스티앙이 말렸다.
[여기 과일은 매주 금요일에 들어와. 오늘은 수요일이라 싱싱하지 않으니까.]
우리나라에서 사는 칠레산 포도는 태평양을 건너와도 싱싱하고 탱글탱글하고, 냉장고 안에서도 일주일씩은 가는데, 산지에선 3일이면 흐물흐물해져서 살 수 없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인지.
뒤집어 말하면, 산지에서 보존제 없는 포도를 맛볼 수 있는 기회라 좋았다. 종류도 어찌나 많은지 매일 다른종을 먹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시들지 않은 탱글한 칠레산 포도를 볼 때마다, 이곳 바라스의 과일가게를 떠올렸다. 국내산 제철과일을 사, 집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