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일 오전 8시, 드디어 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출발한다. 이틀 전, 4일에 한 번 있는 배를 놓쳤다. 한 달 전 온라인으로 예약할 때 받은 바우처에 적힌 대로왔다가 배가 이틀 전에 떠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울 뻔했다. 미리 운항 스케줄을 체크하지 않은 내 탓이라 수수료를 2만 원 물고, 3일 밤을 더 자고 다음 배를 탔다.
이 배는 24시간 동안 부지런히 바다를 가로질러, 푸에르토 몬트에서 푸에르토 차카부코까지 - 그러니까 파타고니아 북부에서 중부까지- 나를 데려다줄 것이다. 관광객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루트라서, 승객 몇 명을 태운 화물선이다. 갑판과 식당에서 관찰한 바 관광객은 5명이 채 안 되었다.
4인실 방과 식당, 갑판을 왔다 갔다 하며 시간을 보낸다. 오른쪽으로는 화산을 왼쪽으로는 칠로에 섬이 보여 유람선을 탄 기분이다. 갑판에선 이탈리아 여행자인 파블로와, 현지인인 파블라가 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다. 그들과 한참 이야기를 하다, 다시 방으로 내려와 잠을 잤다.
해가 완전히 지면 바다 안개가 사라지고, 머리 위로 무수히 많은 별이 떠오른다. 별들은 짙은 남색 하늘에 굵은 곡선을 그리며 한 줄기로 떠 있다. 아... 밀키웨이. 황홀경이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서 이렇게 많은 별은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많은 별은 CG나 고급 카메라 기법인 줄 알았다.
눈으로 이렇게 많은 별을 볼 수 있다니. 나는 갑판 위에서 혼자 별을 보면서 노래를 부르고 스트레칭을 하다, 팔을 휘저으며 턴을 연습했다. 다시 혼자가 된 파타고니아 여행이라니. 나는 너무 스스로를 미지로 내던지는 경향이 있다.
아침이 되고 배가 차카부코에 도착했다. 아침이 되니 여행자들은 그들끼리 뭉치거나 배에서 만난 이 동네 사람들을 따라나섰다. 파블로는 파블라네 집에 간다고 한다. 솔직히 부러웠다. 파블라가 어제 한참 농장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혹시 나도 초대받을 수 있을까 기웃거렸지만 둘은 담배 친구가 되어 시시때때로 붙어서 담배를 피웠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간밤에 배에서 만난 까밀로를 따라가기로 했다. 부러움도 잠시, 급히 그들과 인사를 하고 부지런히 터미널로 걸었다. 일단 아이센으로 가서, 코야이께행으로 갈아타면 된단다. 현지인과 있으면 비싼 교통편 대신 싼 현지 버스를 타게 되니 좋다. 길 헤맬 일도 없이 주변 구경하면서 졸졸 따라다니면 되니까. 까밀로가 내 느린 걸음이 답답한지 내 배낭을 달라고 했다. 그는 내 배낭을 메고 양손으로 자기 짐을 든 채 척척 앞서 걷는다.
아이센 Puerto Aysén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코야이케행 버스는 만석이라 1시간 뒤 버스를 타야 한단다. 표를 끊고 터미널에 짐을 맡겼다. 까밀로는 아이센이 워낙 작아서 볼 게 없다며, 작은 강을 가로지르는 빨간 다리까지 걸어갔다 오자고 한다.
그에게는 흔한 풍경일 테지만, 나는 거대한 산과 푸른 하늘로 둘러싸여 압도된 느낌이었다. 너무 예쁘다고 감탄하니 까밀로가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며 웃었다.
그의 말대로, 아이센에서 코야이께까지 가는 길은 정말 감동이다. 거대한 산에 키크고 푸른 나무가 빽빽하다. 그 밑으로는 에메랄드빛의 투명한 강이 흐른다. 웅장한 산 아래로이따금씩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집들과 동물농장들이 장난감처럼 작게 보인다. 눈꺼풀이 무겁지만 눈 감기가 아까워 계속 밖을 바라보며 졸고 있다. 내려서 찬 공기를 맡고 싶다고 생각한다. 까밀로가 자기 말 사진과 근처 호숫가 사진을 보여주면서 종알거리며 계획을 읊었다.
코야이케 Cohyaique는 칠레 파티고 니아에서 가장 큰 도시다. (파타고니아는 왼쪽이 칠레/ 오른쪽이 아르헨티나로 나뉘어 있다) 관광객도 비교적 많았고 쇼핑몰도 있었다. 까밀로가 자기만 아는 뷰포인트가 있다며 어느 건물 뒤의 샛길로 나를 안내했다. 건물 뒤의 들판에서 술에 취한 남자들 무리가 우리를 불러댔다. 그들을 지나 좀 더 좁은 길로 높이 자란 풀들을 헤치고 가니 커다란 바위와 낭떠러지가 나왔다. 코야이께는 산 중턱 높이에 위치한 도시다. 바위에 올라 굽어보니 아까 버스에서 본 그 절경이 눈앞에 있다. 멀리 연어 가공공장과 캠핑장이 보인다.
터미널로 가서 다음 버스 편을 알아본다. 까밀로가 내 다음 일정인 ‘쎄로 까스티죠 Villa Cerro Castillo’ 로 가는 버스 편을 알아봐 준다. 아직 일정에 여유가 있으니 3일 후의 버스 시간을 적어 나왔다.
까밀로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선 그의 친구인 릴리 lily를 만났다. 셋이 버스를 타고 30분을 달려
비쟈 심슨 Valle Simpson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내렸다. 골목 몇 개가 다 인 것 같았다.
몇 가구나 살까? 코야이께랑 너무 다른데? 이런 시골이라니.
들판에 길이 하나 나 있고, 그 길 양쪽으로 나무로 된 2층 집이 주욱 늘어서 있다. 까밀로의 갈색 개가 반갑게 마중을 나와 집까지 앞장섰다. 릴리라는 이 친구가 까밀로가 집을 비운 2주 동안 집과반려동물들을 봐주었는데,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그녀는 얇고 단단한 몸으로 가볍게 뛰어 꽤 높이 달린 창문으로 쏙 들어가더니, 안에서 현관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새침한 도둑고양이 같다고 생각했다.
집에 들어갔는데 웬걸... 내부가 오래 비워진 집인 듯 더러웠다. 어디다 시선을 둘 지, 표정 관리를 하며 문가에 서 있으니 까밀로가 잠깐 앉으라고 한다. 나는 듣는 체 마는 체하며 서성였다. 릴리는 문만 열어주고 인사도 없이 사라졌다.
'여기 있는 거 안전할까, 왜 사람 사는 집 같지가 않지, 내가 아무나 따라온 건가, 30분 넘게 왔는데 어떻게 돌아가지, 큰 도시로 돌아간다고 할까, 이 근처엔 호스텔이 없는 건 확실해... '생각이 복잡해져 일단 밖에 나왔다. 공기를 쐬며 생각 좀 해야지, 아직 오후 1시니 도망갈 시간은 충분하다.
어둑한 집 안과 달리, 바깥은 사방이 뻥 뚫려 온 천지가 하늘 같다. 큰 건물 없이 전부 들판이고, 들판엔 하얀 양들이 돌아다니며 풀을 뜯어먹고 있다. 목줄 없는 개들이 대문 밖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지나가면 가까이 붙어서 냄새를 맡고는 꼬리를 흔들며 따라온다.
건너편 집에 배불뚝이 중년 남성이 서 있길래 말을 걸었다. 집 뒤로 양목장이 보이는데 구경해도 되냐고 물었더니, 자기 목장이 아니라며, 원하면 뒤뜰에서 보라고 했다. 이 마을의 집들이 다 이렇다. 허술한 담장과 열린 대문. 담장 너머로 양을 보고 있으니 아저씨가 나와서 뒤뜰에 열린 체리를 한가득 따주어서 모자에 담았다. 아저씨는 마떼에 설탕을 가득 넣으며, 마떼 한 잔 하고 가라며 권했다. 그가 칠레 특유의 빠르고 종알거리는 말투로 이것저것 물었는데, 목소리가 너무 작아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까밀로네 집으로 돌아오니, 잠깐 사이 집을 깨끗이 청소해 놓았다. 찢어진 소파 위에 깨끗한 천을 덮어놓고, 어두운 식탁에는식탁보가 깔려있다. 바닥은 물걸레질했고 환기도 시켜놓았다.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조금 안심했다. 그래 여기서 하루 묵고, 내일은 코야이케로 가서 호스텔을 예약하자.
<비쟈심슨> 파타고니아에 있는 동안은 눈덮인 화산을 원없이 봤다. 하늘이 몹시 가까운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