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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노매딕 수제맥주와 humility(2)

우리는 부식토(humus) , 인간과 비인간의 공생

by 일연

전주 노매딕 수제 맥주집(Nomadic Brewing Co.)의 본점 천정 대들보에는 몇 개의 영어가 하얀 글씨로 적혀있다. 익숙한 단어 중에서 낯선 humility가 눈길을 끌었다. 맥주 양조의 기술자이자 한국 여성과 결혼한 미국인 주인이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의 뜻을 이으려 했는지 몰라도 humility는 어원적으로 죽음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humanity(인간) -­ humus(퇴비, 두엄) -­ humility(겸손)의 순환


인간은 죽으면 세상 모든 것과 똑같이 부패한다. 다시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부식한 물질은 미세한 원소로 분해되어 탄소처럼 다른 분자와 결합하여 새로운 형상을 이루기도 하고 작물의 토양이 되는 부식토가 된다. humanity(인간)이란 humus(퇴비, 두엄)에서 나왔으니 humility는 흙과 퇴비처럼 조용히 모든 것을 뒷받침하고 살린다는 겸손의 뜻을 지닌다.

부식토 한 톨의 먼지에 세계가 들어있음을 깨닫는 것이 겸손이다. 하나의 미세한 티끌 가운데 온 우주가 머금어 있고(一微塵中含十方)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To see World in a grain of sand). 작은 알갱이의 미시 세계에 머금은 우주가 연쇄적으로 이어져 끝없는 거시 세계를 만들어 간다.


독창적 사유의 페미니스트이자 과학철학자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는 humus(부식토)에 기대어 인간(human)을 퇴비라고 선언한다.


여기는 어디이고 나는 누구인가?


해러웨이는 대답한다. 우리가 사는 곳은 인간성(Humanities)이 아닌 부식토성(Humusities)을 띤다. “우리는 부식토(Humus)이지 인간(Homo)이나 인류(anthropos)가 아니다. 우리는 퇴비(Compost)이지 포스트 휴먼(Posthuman, 뛰어난 신인류)이 아니다.”


해러웨이는 인간과 자본이 지층에 지구 파괴와 생태계 위기를 흔적으로 남겼던 인간세(anthropocene)와 자본세(Capitalocene)에서 탈출하여 크리터(crittter, 박테리아, 미생물, 식물, 동물,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비인간 그리고 때로 돌멩이에서 기계까지 잡다한 것을 포함한다)들과 다양한 종들이 함께 섞여서 잘 살고 잘 죽기 위해서는 인간이 퇴비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퇴비는 농작물을 키우기 위해 만드는 거름으로 풀과 짚에다 분뇨와 동물의 배설물을 뒤섞어 푹 썩힌다. 당연히 숙성과정에서 온도가 상승하고 쌀쌀한 초봄날씨에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뜨거운 퇴비는 죽어가는 것을 먹고 배설하여 살아있는 것과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치열한 미생물의 분투를 반영한다.


박테리아가 죽은 유기체를 먹고 내뿜은 배설물은 토양을 비옥하게 만들어 농작물에 에너지와 생명을 부여하는 죽음과 삶의 계속성을 만들어낸다. “퇴비는 다종의 삶과 죽음이 상호의존하고 연속적으로 뒤얽힌 구체적 형상이다.”

humility(겸손)는 인간이 박테리아에 의존하며 진화해왔다는 과학적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세포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미토콘드리아는 우리 세포가 집어삼킨 외부의 박테리아로부터 왔다. 세포가 포획했던 박테리아가 오랜 진화과정에서 적대적으로 공생하며 지금껏 음식을 에너지로 변환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어느 하나 빠뜨릴 것이 없다. 먼지와 박테리아부터 온갖 식물과 동물에 이어 우리들 인간까지 세계의 모든 존재들은 무수한 인과관계의 고리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한다.


인간이 죽으면 우리가 몸속에서 의존하고 공존하던 100조개의 미생물과 박테리아가 흩어진다. 40억 년 전에 지구가 탄생하면서 별나라에서 날아온 먼지와 원소들도 밖으로 나온다. 우리 몸의 각종 장기와 조직 속에 있는 탄소, 뼈 안에 있는 칼슘, 피에 들어 있는 철분, 수분 속의 산소는 별에서 만들어졌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에는 우리 몸이 죽고 나서 도로 내놓은 원소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죽음은 퇴비와 미생물과 별들의 고향에서 함께 했던 원소들이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 가는 뜨거운 축제다. 그레잇 데드(고마운 죽음)와 겸손(humility)은 영혼을 아름답게 빛내준다.


안과 밖의 경계선이 없는 몸, 생명과 죽음의 구분도 불분명


우리 몸은 안과 밖의 경계선이 없다. 내부와 외부의 순환과 상호작용 없이는 한시도 존재가 불가능하다. 생명과 죽음은 미세한 존재들이 모였다 다시 흩어지는, 생성과 해체의 과정이어서 생명체가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도 불분명하게 되었다.

비 내리는 날 시내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바깥 풍경은 빗방울로 얼룩져서 경계가 흐릿하다. 우산 쓰고 가는 사람과 가로수가 섞여있고 들꽃과 나무가 섞여 있다. 비 오는 날 차창에서 보는 세계는 인간과 비인간, 생물과 무생물, 들풀에서 돌멩이와 빗방울 같은 존재들이 서로 공동으로 생성하고 만들어가는 연속적인 수채화 같다.


해러웨이의 용어를 빌리면 외부와 경계를 짓는 칸막이 개체주의(bounded individualism)는 사유 수단으로 쓸모없게 되어버렸고 대신 함께 만들어 가는 공동 생성(sympoiesis, making with)의 패러다임이 새로운 지평을 열어간다.


인간만이 행위자(agency)가 아니다. 비인간의 존재도 활력을 갖고 연결망을 구성하는 능동적 주체가 된다. 자연과 물질도 피동적이길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위자가 된다.


산, 강, 고래, 기후, 지렁이, 나무, 송아지, 젖소, 돼지와 같은 비인간 존재들은 더 이상 수단으로 취급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해 주길 주장하고 있다. 돈, 돼지, 젖소, 나무는 비인간의 이질적 존재라도 연결망에서 서로의 성격을 규정한다. 돈벌이가 목적이 되면 가축은 사물과 고기라는 물질 수단으로 성격이 바뀐다. 돼지를 목적으로 하면 돈은 수단으로 규정된다. 가축과 인간은 이질적 행위자와 결합하는 연결망 속에서 생명을 목적으로 하는 동등한 존재로 나간다.


미생물의 박테리아부터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동등한 행위자이다. 인간이 흙이나 먼지로 바뀌고 퇴비가 되어 다시 죽음이 생명이 전환하는 human - humus - humility(인간의 죽음 - 부패와 퇴비를 거치며 새로운 생명의 탄생 - 다시 생명과 죽음으로 순환으로 돌아가는 겸손)의 생성 과정은 '성스러움'과 맞닿는다.


죽음의 기억과 성스러움, 탈성장,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길


한 알의 흙에서 생명을 발견하고 한 톨의 밀알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관념을 엘리아데(Mircea Eliade)는「성과 속」에서 성스러움(the sacred)의 발견이라 부른다. 인간은 세속의 공간에서 작은 것 하나에서도 신에 의한 우주창조를 모방하고 재현하려는 성스러운 본성을 갖는다. 들판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흔하고 범속하며 속된 것(the profane)에서 초월적 차원을 동경하고 거기서 진정한 삶의 의미와 활력을 찾는다.


프랑스의 경제학자이자 탈성장 철학자인 세르주 라투슈(Serge Latouche)는 말한다. “경제학자들은 죽음을 망각하고 성장이 무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이들은 경제도 유기체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었습니다. 저는 경제성장이야 말로 오늘날 불멸성과 무한성을 확보하는 유일무이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유한한 자연에서 생산요소와 에너지를 한없이 뽑아내서 경제성장을 무한히 누리려는 불멸의 시도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구를 지키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탈성장(degrowth)은 유한한 자원에서 무한한 욕망을 뽑아내는 세속적인 어리석음과 야만에 있지 않다. 라투슈의 지적대로 “유한에서 무한을 찾은 영성의 작업이 필요합니다. (모래 한 톨과 자그만 들꽃) 거기에 내재한 무한한 세계와 우주를 찾는 내재적 초월성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 지구와 함께 살아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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