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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 Jul 31. 2024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정호승

어린 시절, 이따금 가슴속에 바람이 불어다.  무언지도 모르고 그저 헛헛한 마음만 들여다보았다. 그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라며 알 수 없던 감정에 온기를 담아준 시인을 만났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한 줄로 정의하던 모습이 경이로웠다. 말라가던 샘물에 파동이 일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을까. 시가 반짝이기 시작했던 때가. 흐릿해서 내 얼굴조차 보이지 않던 날, 가만히 손 내밀어준 건 시가 아니었을까.

20여 년이 흘러 그립던 시인 정호승을 시가 있는 산문에세이로 다시 만났다.




결국 차는 나를 홀로 있게 해 준다. 홀로 있어야 시를 생각할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다. 시는 홀로 있지 않으면 쓸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혼자 차를 드는 일은 시를 쓰는 일이다.


사람은 자연을 이해할 때 아름다워진다. 자연과 하나가 되었을 때 아름다워진다. 시인은 자연을 새롭게 만나지 않거나 자연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 없다. 시는 인간과 자연을 이해하는 데서 나온다. 자연으로서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자연을 이해하는 데서 시는 시작된다.


고통 없는 인생은 없다. 인생에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고 이해하는 일만 있을 뿐이다. 오늘 하루도 하루살이의 마음이 되어 어떠한 고통이라도 견디며 긍정적으로 열심히 살아가야 한다.


사랑은 고통이다. 한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은 고통이다. 대개의 경우, 그 고통을 외면하거나 두려워하는 자는 고통 그 자체가 되고, 그 고통을 정면으로 맞서서 받아들여 견디거나 극복하는 자는 그 사랑을 자신의 소중한 인생으로 만든다.


톨스토이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때는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 좋은 일은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람이든 나무든 직선보다 곡선의  삶의 자세나 형태가 더 아름답다. 새들은 곧은 직선의 나무보다 굽은 곡선의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함박눈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뭇가지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만들어져 많은 사람이 찾아와 편히 쉰다. 사람도 직선의 사람보다 곡선의 삶이 품 안에 더 많이 안긴다. 직선보다 곡선의 나무나 사람이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넉넉하고 따뜻한 삶의 자세를 보여 주기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감사하다는 생각이 내 삶을 이끌었다. 왜 나에게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는가 하고 원망하지 않고,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한테는 어떠한 불행한 일이 일어나도 나에게만은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은 참으로 잘못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긍정에서 새 삶의 평온은 비롯되었다.




안다. 나에게 좋은 일만 일날 수 없는 것.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지 않을 거란 것도. 신은 각자 견딜 수 있는 만큼의 시련과 불행을 준비한다. 악재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불쑥 불 고개를 내민다. 충격을 얼마나 잘 흡수하고 견디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겠지.


진흙구덩이를 구를 때 하늘조차 보이지 않을 때 나의 손은 허공을 서성다. 묵묵히 가던 길 가던 것뿐인데 오해는 불신 미움으로 얼룩진다.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아서일까. 선의도 악의도 없이 표현한 날 것이 되레 상처가 되고 낙엽처럼 쓸쓸히 지나간다. 고통 없이 성장할 수 없다지만 이대로 앞만 보고 나아간다지만 이 길이 옳은 길인지  확신할 수 없다. 꿈꾸었던 일이 현실로 피어났지만 결실로 맺는 과정은 혹독하다. 앞에서 웃는 낯으로, 뒤에선 가차 없이 칼을 꽂는 자. 보이지 않는 경멸과 배신 앞에 속수무책이다. 얼마나 더 깨지고 부서져야, 가슴팍에 얼마나 많은 나이테를 새겨야 자신으로 올곧이 설 수 있을까. 꿈은 꿈으로 남겨둬야 하는 걸까.  꿈을 향해 다가갈수록 보이지 않던 실체 앞에 주저앉는다. 아름답고 눈부셨던  환상은 한 발짝 다가설수록 차갑고 무거운 진실에 가까워진다. 다져간 믿음은, 꽃길만 펼쳐질 거란 순진한 바람은 꺾이고 말 꽃이었던가.


마르지 못한 찰흙처럼 흐물거리는 마음. 애써 묻어놓은 웅덩이에 다시 물이 고인다. 나의 물과 너의 물은 다르지 않다고 믿었는데. 어리고 얕은 착각이었다.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 없듯 철저한 남이 것이다. 섣부른 이해와 공감을 바랄 수  떠나는 마음 보듬을 수 없어 그저 뒤돌아선다. 자잘한 깨어짐과 속속들이 쌓여가는 고통 속에 성장할 것임을 알기에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든다. 언제든, 혹시 모를 기약 없는 만남은 아름다워야 하기에.

'한 송이 꽃은 남에게 봉사하기 위해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오직 꽃이기만 하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한 사람의 존재 또한 그가 만일 진정한 인간이라면 온 세상을 기쁘게 하기에 충분하다.'  가슴앓이 된통 하고 시인의 말 위로처럼 마신다. 세상도 삶도 단 한순간도 고통 없는 사랑은 없구나.




수선화에게   - 정호승 -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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