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공범이 필요한 이유 ]
나는 절대 미루는 사람 아니다.
계획은 미리 세워야 마음이 편하고,
할 일은 되도록 빨리
깔끔하게 끝내야 직성이 풀린다.
그러니까...평소엔 진짜 성실한 편이다.
(적어도 겉보기엔 그래 보일걸?)
근데 이상하게,
진짜 피곤하고 지칠 때는
꼭 뭔가를 물고 늘어진다.
책이든,
영상이든,
사람이든.
꼭 지금 아니면 안 되는 것처럼.
놓치면 오늘 무너질 것처럼.
거의 ‘이거 안 보면 인생 안 풀림’ 급의 몰입으로.
물론 나는 안다.
그걸 붙잡고 있는 동안은
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진짜 하기 싫은 거다.
근데 그걸 또 “하기 싫어”라고
솔직하게 말하긴 괜히 자존심 상하니까.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음...이 책 오늘 꼭 다 읽어야 돼.”
“앗!!오늘따라 영화가 너무 재밌는데!!! .”
“어머...너 오늘따라 나랑 왜 이렇게 잘 통하니?.”
이쯤 되면 거의 주문처럼 읊는다.
심지어 진지하다. (진심)
생각해보면,
그건 아주 세련되게 포장된 도피다.
표면은 멋져 보이지만,
속은 그냥 일하기 싫은 귀여운(?) 반란.
그러니까 나는
우아한 얼굴을 한 미루기 장인이다.
(응?)
그리고 그런 날엔
꼭 누군가를 같이 끌어들인다.
“우리 조금만 더 얘기하자.”
“야, 그건 내일 해도 되잖아.”
그 순간,
그 사람은 나의 공범이 된다.
공범이 생기면 마음이 놓인다.
"나만 도망친 거 아니니까."
"우리 지금 같이 놀고 있으니까."
물론,
그 공범은 보통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지금 뭐 해?”라는 메시지에
뜬금없이 불려나온다.
'미안해, 친구야.
사실은 너랑 얘기 안 하면,
그 일 하러 가야 하거든.'
나는 미루는 걸 싫어하지만,
진짜 미뤄야 할 순간이 오면
사람을 꼭 붙잡는다.
그게 나의 가장 유쾌하고도
귀엽고도 필사적인,
도망 방식이다.
치사하다고?
내가 매번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