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뱀과 소녀

by 여름

옛날 옛적에, 로 시작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입니다.


외진 바닷가를 다스리는 영주가 있었습니다. 아내는 딸을 낳자마자 물을 토하며 죽었습니다. 저주, 저주다! 사람들은 바다에 사는 괴물의 유혹에 빠져 살해당한 것이라 수군거렸고 영주는 비탄에 빠졌습니다. 바다가 딸만큼은 잡아먹지 않길 바랐습니다. 새로이 생겨난 귀한 생명에게는 바다와 멀리 떨어진 숲 속의 산책만 허용되었습니다. 바다를 금지합니다. 바다는 위험합니다. 바다에는 아가씨를 현혹하려는 괴물들이 많답니다. 항상 조심하세요. 아기는 자라 외로운 소녀가 되었습니다.


소녀의 이번 생일선물은 망원경입니다. 영주가 성 안을 답답해하는 딸을 위해 구해온 물건입니다. 바다는 오래 들여다보지 말거라. 바다가 널 발견하면 날카로운 파도로 너를 벨 수도 있단다. 아니면 그 푸른 아가리를 벌리고 너를 한입에 삼킬 수도 있지. 항상 조심하거라, 딸아.


소녀는 말을 잘 듣는 아이입니다. 망원경으로 숲 속 다람쥐와 딱따구리,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광장에서 춤을 추는 사람들을 구경합니다. 소녀도 방에서 혼자 책을 읽고 춤을 춥니다. 가끔씩, 가슴이 콱 막혀올 때만 바다를 잠시 구경합니다. 아버지의 말씀과는 달리 파도는 둥글고 커다란 입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얌전한 숙녀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하지 말라는 것은... 망원경의 시야에 바위 근처에서 움직이는 지느러미가 보입니다. 주방 외에는 본 적이 없는 형태입니다. 검은 머리칼도 보이고, 하얀 등도 보입니다. 소녀는 하인들의 눈을 피해 처음으로, 처음으로 해변을 달립니다. 바위 위에서 골똘히 바다를 내려다봅니다. 창백한 얼굴이 불쑥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이건 사람을 죽이는 괴물의 눈이 아닙니다. 자각하지 못한 채 손을 뻗어 얼굴을 매만집니다. 이제 소녀에게는 비밀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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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깊은 물에서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헤맸습니다. 어둠 속에서 참 오래도 버텼습니다. 빛이 그리워서 조금씩, 조금씩 수면 가까이 다가갑니다. 수면 위로 얼굴을 내밀자 빛이 쏟아집니다. 기적처럼 마주한 최초의 빛은 이름 모를 소녀의 맑은 눈동자입니다. 최초의 촉감은 뺨을 쓰다듬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길입니다. 눈을 감습니다. 그리고 깨닫습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외로웠다는 것을.


소녀는 매일 바닷가에 찾아옵니다. 양산을 쓰고 바람에 날리는 치맛자락을 잡고 장밋빛 둥근 뺨으로 환하게 웃습니다. 나의 몸은 물 바깥으로 나가지 못합니다. 소녀는 물을 무서워합니다. 나는 바위에 팔을 걸친 채, 소녀는 바위에 앉은 채 서로를 바라봅니다. 가끔 소녀가 과일을 가져다주기도, 책을 가져와 읽어주기도 합니다. 사실 그것들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녀가 가져다주는 것들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녀의 무릎에 엎드린 채 단단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면 그 긴 시간 동안 어두운 물속에서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인가 싶습니다. 다시 외로워지고 싶지 않습니다. 소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밤이 오기 전에 소녀는 돌아가야 합니다. 가지 말라고 붙잡고 싶지만 나에게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뒤따라갈 다리도 없습니다. 나는 다시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녀가 나를 부를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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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내 말을 알아듣지도 못합니다. 그래도 항상 나를 기다린다는 것은 압니다. 우리는 밤마다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합니다. 아버지가 주의하던 바다도 그녀가 사는 곳이라 생각하니 전혀 무섭지 않습니다. 정말로 무서운 것은, 그녀가 어느 날 다른 바다로 훌쩍 떠나버리는 겁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영원히 날 기다려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녀는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지만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춥니다. 갑자기 그녀가 튀어올라 내 목을 끌어안는 바람에 뒤로 넘어졌지만 그런 건 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둘 다 웃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은 숲에서 꽃을 꺾어 그녀에게 가져다줍니다. 머리에도 몇 송이 꽂아줍니다. 그녀는 꽃을 조심스럽게 뺨에 가져다 대고 웃습니다. 꽃을 내민 내 손등에 서툴게 입을 맞춥니다. 아마 그것이 잃어서는 안 되는 존재에게 하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 어쩌면, 아버지께 말씀드리면 나와 함께 성으로 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온전한 내 것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함께 아침을 맞고 서로를 바라보며 잠에 드는 그런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꽃에 얼굴을 묻고 향기를 들이마시는 그녀를 바라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욕조를 만들어줄게. 알아듣지 못할 것을 알지만 다시 한번 말합니다. 기다려줘.


아버지는 내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굳혔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입니다. 아, 기쁩니다. 역시 딸의 마음을 알아주는 다정한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손을 부여잡고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옷들과 장신구를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모두 함께 그녀를 만나러 가자고 합니다.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달려가고 싶지만 얌전히 침대에 눕습니다. 그녀를 성에 데려오면 폭이 넓은 드레스를 입혀주고, 머리를 땋아주고, 욕조에 꽃잎을 가득 채워주고, 그녀는 내 품 안에서 잠들 테고, 나는 그녀의 머리칼에 얼굴을 묻고 웃으며 잠이 들고... 또...


며칠째 방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꼬박꼬박 들어오는 식사 외에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문을 두드리고 아버지를 불러도 대답이 없습니다. 망원경도 사라졌습니다. 바다 쪽에서 가끔 마을 사람들의 고함이 들려오지만 나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야 합니다. 귀를 막고 아버지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립니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몇 달이 지났는지 모르겠습니다. 방문이 열렸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찾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바로 바다로 달려갑니다. 아무도 나를 막지 않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마을은 온통 조용합니다. 모든 공기가 나를 조여 오는 것 같습니다. 더 빨리 달려야 합니다. 더 빨리 달립니다. 더 빨리 그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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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팍이 창에 꿰뚫린 뒤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내 꼬리를 붙잡고 끌어당기던 사람들도, 경멸하는 얼굴로 뭐라 뭐라 소리치는 사람들도 모두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들은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물 밖으로 기어 나갑니다. 그녀의 세상으로 힘겹게 팔을 뻗습니다. 뜨거운 햇빛에 꼬리가 금세 말라비틀어집니다. 벌어진 상처에서 짠맛이 나는 피가 흘러 다시 그 꼬리를 적십니다.


저기 멀리 뛰어오는 소녀가 보입니다. 그렇게 뛰면 넘어진다고 일러주고 싶지만 내 입은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내뱉지 못합니다. 소녀가 나를 끌어당겨 꽉 안아옵니다. 이제야 따뜻한 품에 온전히 안겨봅니다. 힘이 빠진 고개를 어깨에 기댑니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이 내 얼굴을 적십니다. 괜찮다고 웃어주고 싶지만 입가에 피가 가득 고여서 움직이질 않습니다. 그녀가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내 머리를 넘겨주고 뺨을 쓸어내립니다. 이제 다시 어두운 곳으로 갑니다. 그녀를 두고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눈에 담습니다. 일 초라도 나에게 더 시간을 주세요. 그녀의 얼굴을 기억해야 합니다. 끝까지 기억해야... 의지와는 무관하게 고개가 뒤로 젖혀지고 눈이 감깁니다. 환청인지 몰라도 그녀의 가지 마, 가지 마! 하는 처절한 외침이 점점 멀어집니다. 아, 나는 이제 정말 어두운 곳으로 갑니다. 그녀가 나를 다시 찾을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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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을 떠들썩하게 한 바다괴물 사냥이 끝난 며칠 뒤 성에 틀어박혀있던 소녀도 사라졌다. 영주가 사람들을 풀어 백방으로 찾았으나 소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개중에는 소녀가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도시로 향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제 그녀와 그녀는 시간이 흐르고 곰팡이가 피고 먼지가 묻어 결국은 그랬답니다, 로 끝나는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되었다. 서로를 기다리는 서로를 영원히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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