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징징대면서 너 때문이야를 한 ‘너’가 알고 보니 나를 살린 너
왜 그럴까? 어떨 때는 사랑이 되고 어떨 때는 원한이 된다. 모두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건 같지만 하나는 품어 내 것이 되고 다른 하나는 할퀴어 생채기가 된다.
여기에 누룩이 있다. 어떤 것은 숙성이 되어 향기로운 술이 되고, 어떤 것은 숙성이 되지 않아 썩는다. 하나는 발효가 되어 몸에 이롭고 하나는 독이 되어 몸에 해롭다.
“큰 원한은 화해해도 반드시 응어리가 맺히는 법, 편안해야 가히 착함이 된다(和大怨, 必有餘怨, 安可以爲善).” (노자 제79장)
인간은 보기보다 겁 많은 존재다. 철갑을 두르고 자신을 방어한다. 수백 개, 수천 개의 더듬이를 영혼 밖으로 쭉 뻗어 “이 사람은 가짜야” 하면 문을 닫아걸고 “이 사람은 진짜야” 하면 받아들여 숙성시킨다.
진짜라 믿어 품어 숙성했더니 독이 되는 존재, 그것은 아무리 화해해도 응어리가 남는 건 아직 내가 그를 용서하지 못해 편안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 주(周) 왕조 때에 흉년이 들어 기근이 발생하면 백성에게 양곡을 빌려주고 그 내용을 기록하여 증표로 삼았는 데 이를 부신(符信)이라 한다. 부신은 반으로 쪼개어 좌측 반쪽은 채권증서로 채권자가 보관하므로 좌계(左契)라 하고, 우측 반쪽은 채무증서로 채무자가 소지하므로 우계(右契)라 한다.
그대는 어찌할까?
그대가 덕이 있다면 좌계를 들고도 타인을 책망(責望)하지 않을 것이고, 그대가 덕이 없다면 좌계를 들고 타인을 책망할 것이다.
무릇, 덕이 있고 없고 차이는 편안함이다. 편안하면 몸에 이롭고, 편안하지 않으면 독이 된다. 그것을 결정짓는 것은 오직 시간과 농도다.
<노자>의 가르침은 한결같다. 언제나 시간을 길게 가지고 생각의 농도에 억지를 부리지 말라 한다. 여린 것이 강하게 되고, 천한 것이 귀하게 되고, 작은 것이 크게 되니, 못났다고 너무 징징대지 말고, 잘났다고 너무 방방대지 말라 한다.
짧은 시간으로 봐 1초도 참지 못하고 빵빵거렸지만, 앞 차가 조금 늦게 출발한 죄로 대형 사고를 면해 목숨을 건졌는지 누가 알겠는가? 그러니 날마다 징징대면서 “너 때문이야”를 한 ‘너’가 알고 보니 나를 살린 ‘너’인 줄이야.
“하늘의 도는 무심하지만, 언제나 착한 사람과 함께 한다(天道無親, 常與善人).”
그렇지 않은가? 시공을 넓혀 나를 우주 생태계의 한 점으로 바라보면 날이면 날마다 신비로움이 아닌 적이 없다.
하늘이 별이 있어 나를 만들었고, 태양이 있어 내가 밥을 먹으며, 지구가 있어 내가 숨 쉰다. 어디 그뿐이랴? 내가 태어난 것은 부모님이 있어서 그렇고 그 부모님의 부모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250만 년 전 한 여인이 있었기에 내가 존재한다.
그러니 감사의 기도문을 쓴다면 팔만대장경에 다 담아도 못 자랄 판이지만, 불평불만을 적으면 이 또한 팔만대장경에 다 담지 못할 것이다. 그건 “바로 너” 때문이다.
*사진은 홍은동 북한산 자락길(202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