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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나를 유혹하네

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지푸라기 인형으로 여기고

by 삼선 윤일원

봄이 아까시나무꽃이 지게하고 장미가 피어나기 전에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뭔가 무슨 일을 벌일 듯하여 가만히 살펴보니, 이놈이 분명 나를 유혹하고 있었네.

나는 여태 이른 봄날 꽃이 벌 나비를 유혹하듯 나를 유혹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 꽃은 미끼 상품이었고 진짜 유혹은 지금부터야. “무슨 유혹?” 희망을 만들어 품는 거. “무슨 희망?” 생명의 희망. “거창하다고?” 아니야 늘 있었던 일인 것 같은 데 지금 문득 깊이 느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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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경복궁 내 국립고궁박물관 뒤뜰을 걸었지. 아름드리느티나무는 산책 나온 사람들이 이미 차지하고 있어 나는 한쪽 곁으로 밀려나 어슬렁어슬렁 걷는 데, “오 마이 갓” 무언가 새하얀 솜뭉치 털북숭이가 잔뜩 매달려 있는 걸 발견한 거야.


“뭐야 이건?” 그리고 자세히 봤네. 할미꽃. 진짜로. 내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곁에 다 진 할미꽃 몇 송이가 있어서 안 거지. 오호라 내 여태 할미꽃은 구부정한 꽃 모양새를 보고 그렇게 불렀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야. 머리 색이야.


할미꽃이 진 자리에 새하얀 털북숭이가 나와 소복이 있는 거야. 강아지 중에 털이 가장 많은 종이 뭐지? 털은 예전 시골에서 키웠던 삽살개와 같았는데 길이는 지금 키우는 순둥이 진돗개처럼 짧은 모양새. 한번 보면 깜짝 놀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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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처럼 내 짧은 감탄이 사라지기 전에 또 잔디밭 가장자리에 새하얀 은방울 구슬이 무리 지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거야. 키가 너무 작아 사람만 없었다면 누워서 볼 뻔했네.


이게 뭐지? 토끼풀꽃. 용케도 살았네. 고궁 정원사들이 이른 봄부터 잔디만 아껴 나를 잡풀로 취급하고 보이는 즉시 호미로 캐어 냈을 텐데. 그래도 눈에 띄지 않은 행운을 얻은 거지. 그래서 그런지 좋은 자리는 잔디에 다 빼앗기고, 사람들에 밟혀 죽지 않은 보도블록 사이나 비스듬한 언덕배기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소복이 있어.

아하, 요놈들 봐라. 참 신기하다. 키가 엄지손가락 반만 한 놈들이 자기 키보다 더 큰 꽃을 매달고 한들한들 바람결에 날리는 모습. 참 기특해. 어찌 이럴꼬. 지구의 한 모퉁이를 떡 하니 차지 한 곳도 많겠지만, 숨 막히는 인간의 간섭 속에도 꿋꿋한 것을 보면 참 존경스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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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은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지푸라기 인형으로 여기느라(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노자 제5장)

그래. 인간이 토끼풀을 간섭하는 듯 보여도 어쩌면 토끼풀이 인간을 간섭하는지도 몰라. 봄날 하늘과 땅은 꼭 풀무 같아 안은 텅 빈 듯한데 무언가 뿜어져 나와. 그건 바로 ‘유혹’이야. 털북숭이가 봄바람을 유혹하고 봄바람은 희망을 실어 날라. 작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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