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샹그릴라는 던바의 수

사람에 있어 가장 정다운 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 이외에 ...

by 삼선 윤일원

인류는 오랫동안 이상향을 꿈꿨다. 서양에서는 유토피아라 불렀고 동양에서는 무릉도원, 별유천지라 했으면, 서양인의 눈에 비친 이상향은 티베트 그 어디에 있다는 샹그릴라다.


“이웃 나라가 서로 마주 보니 닭 소리 개소리도 들리고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오고 감이 없다(鄰國相望, 雞犬之聲相聞, 民至老死, 不相往來)” (노자 제80장)


사람에 있어 가장 정다운 소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숨결 이외에 닭 소리 개소리다. 이를 놓칠 수 없는 <노자>는 닭 소리 개소리를 이상향으로 삼았지만, 시성인 이태백이는 됴화꽃 핀 곳을 이상향으로 삼았다.


“하늘에서 폭포가 떨어진 곳에 복사꽃이 만발한 것”을 보니 경치가 수려하며 과일이 풍성함을 알 수 있고, “구름 속에서 신선이 수백 년 사는 것”을 보니 질병 걱정 없는 오지임을 알 수 있고, “날마다 바둑이나 두고 퉁소를 부는 것”을 보니 먹고 사는 생업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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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느 정도 규모면 될까?


현대 사회과학이 밝혀낸 인간은 인지적 숫자는 150명 안팎이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 한다.

인간은 150명 안쪽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누구와 가까이 지내는지, 성격은 어떠한지, 사돈 팔촌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손금 보듯 훤히 알 수 있다.


그 이상이 되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조직을 관리할 우두머리를 만들어야 하고, 조직을 관리할 세금을 징수해야 하고, 구성원 간 소통해야 할 문자를 만들어야 하고, 구성원의 갈등을 바로잡을 법령을 만들어야 하고, 구성원 간 물물교환의 도량형을 만들어야 하고, 늘어나는 구성원을 감당할 이용후생 기술을 만들어야 한다.


인류는 문명의 길 250만 년 동안 무려 94%의 기간인 240만 8000년 동안 수렵 채집 시대 던바의 수에 갇혀 지내다가 겨우 1만 2000년 전에 농업을 시작으로 이 숫자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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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노자>가 그토록 원했던 이상향의 세계인 “음식은 달고, 옷은 아름답고, 거처는 편안하고, 풍속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자급자족 공동체의 첫 단추는 바로 “문자를 새끼 매듭(結繩)”으로 바꾸는 대변혁이었다.


극단의 문명 파괴주의자로 해석되는 <노자>의 이런 사상은 인간 본성의 어떤 모습을 본 것일까?


사람은 ‘나’를 중심으로 내가 인지한 할아버지의 아버지까지, 내가 인지한 손자의 아들 증손까지를 놓고 ‘인과’를 살펴보면, 모난 것이 잘난 것이 되고, 가난한 것이 넉넉한 것이 되고, 낮은 것은 높은 것이 되고, 연약한 것은 강한 것이 되고, 선한 것이 악한 것이 되니 "오지랖 떨지 말고 겸손해라."의 자기 수양 지침을 얻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간 본성에 따른 공동체의 규모는 어떨까?


이웃 간에는 닭 소리 개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워야 하고, 물물교환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자급자족이 되어야 하고, 특별한 문자가 없을 정도의 단순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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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이 이상향에 가깝지 않은가?


잔잔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30채 안팎의 전원주택을 지어 이웃집 개소리 닭 소리가 들리게 하고, 텃밭에 온갖 싱싱한 채소를 자라게 하고, 날이면 날마다 이웃이 모여 작은 모임을 하고, 응급상황이면 골든타임 이내에 병원에 도착할 수 있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아뿔싸. 그새 인간 본성이 바뀌어 간섭을 지극히 싫어함에 따라 그럼에도 이웃 간 칸막이는 있어야 하고, 개소리 닭 소리는 들리지 않게 해야 하고, 타인의 접근을 막는 CCTV는 설치해야 하니… 과연 우리는 우리 본성에 맞게 제대로 걷고 있는 것인가?


*사진은 종로 송현공원(202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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