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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동천에 한 식경 머무르니

오호라, 내 지금 ‘천국의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by 삼선 윤일원


요즈음 이맘때 'Green shower'로 나를 목욕하지 않는다면 게으름이 주는 여유도 있겠지만, 숲이 뿜어주는 피톤치드와 120% 산소 농도를 외면한 게으름에 죄를 더해도 좋을 듯하다.


집 베란다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 인왕산을 보니 스카이라인이 물결치듯 창의문을 지나 백악산으로 이어져 북한산 주능선으로 연결되고, 또 북한산 보현봉에서 시작한 능선이 향로봉에서 탕춘대성을 따라 굽이치다가 살짝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산골 고개를 지나 백련사에서 수명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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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모두 홍제천 때문이다.


산과 강이 어울려 경쟁하는 듯하나 가만히 보면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의 명확한 원칙을 지키면서 서로를 의지한다. 산은 내(川)를 건널 수 없는 한계를 스스로 보임으로서 지(知)가 있다는 덕을 보였으며, 내(川)는 산허리를 자르지 않고 굽이쳐 흐르니 스스로 선(善)이 있다는 겸양을 보여준다.


모두 실천의 덕목이다. 실천하지 않아 도가 아무리 깊어도 덕으로 드러나지 않고 묵언수행만 한다면 내 기필코 “도가 없다 할 것”이고,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너그러움이 없다면 내 기필코 “지식이 없다 할 것”이다.


여태 홍제천을 따라 아래로 걸어 한강은 즐겨 찾았지만, 홍제천을 따라 거꾸로 걸어 옥천암, 홍지문, 세검정, 석파정 별장, 백사실 계곡은 드물게 즐겼으니, 내 문명을 따라 도심 속에 노닌 것에 속죄하는 양 카메라만 달랑 매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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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동천(白石洞天)은 북악산 기슭에 자리한 자그마한 숲으로 옛날 백사 이항복이나 추사 김정희가 노닐었다는 무너진 별서(別墅) 터와 아담한 연못이 늙은 느티나무에 둘러싸여 있으며 별칭이 백사실 계곡이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 오면 사라진 별서의 누각이 남긴 무릎 높이의 사각형 주춧돌에 앉아 있는다.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제 힘껏 초록 잎을 쏟아내니 하늘이 멍석만 하게 작아지고 그 틈으로 해가 까짓것 햇살을 비추어도 내 앉은 곳은 일렁이는 바람에 따라 볕이 들었다 그늘이 지기를 반복한다.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의 해를 바라보니 늙은 느티나무 사이로 볕을 비추는데 짙푸른 나뭇잎을 투과한 빛과 연둣빛 여린 잎을 투과한 빛이 극명한 대비를 이룬다. 하나는 검은빛이요 또 다른 하나는 라임색이다. 문득 검은 빛은 죽음의 빛이요 라임색은 생명의 빛이라는 생각이 드니, 오호라, 내 지금 ‘천국의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으로 황홀할 지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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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몸을 들어 몇 자국 발을 옮겨 비스듬히 무너진 돌계단에 앉아 연못을 가득 메운 고마리를 본다. 봄철 고마리는 얘기처럼 귀엽다. 여름철 뙤약볕에 바라본 고마리는 억세고 날랜 모습으로 작은 붉은 씨앗을 조잘조잘 달아 애틋한 맘이 없다.


이맘때 고마리는 막 싹을 움터 제 몸짓을 다 키우지 못하고 듬성듬성하다. 그 사이로 연못 주위에 있던 소나무와 떡갈나무, 느티나무 그리고 나란히 걷고 있는 사람이 연못에 반사되어 거꾸로 비치니 갑자기 연못 안에 또 다른 별유천지를 보는 듯하다.


한참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갑자기 물결이 일렁이면 사라지고 또 물결이 잠잠해지면 나타나는 신비로운 세상이 되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또 지나가는 구름이 해를 가렸다 걷혔다 하면 새 세상이 또 열리니 내 그만 홀황(惚恍)하여 순간순간 몰아(沒我)의 지경에 이른다.


천년바위처럼 돌덩이 위에 가만히 앉아 넋 놓고 있는 것은 '나'이지만, 나를 감싸고 있는 모든 것은 쉼이 없이 움직인다. 바람과 구름, 물결은 물론 잎사귀마저 잠시 머물러 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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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이뿐인가? 천지는 하루에 한 바퀴 어김없이 도는데, 내가 돈다는 의식은 고등학교 지리 시간이나 천체 다큐멘터리를 볼 때뿐이니, 오히려 도는 것은 “나가 아니라 너다”를 아무리 강변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로다.


이처럼 언제나 인지적 진실과 과학적 진실이 어긋날 때 인지적 진실만을 추구했다면 바보일 테지만 신비함을 얻었고, 과학적 진실을 선택했다면 똑똑하다고 하겠지만 신비로움을 만끽하기에 너무 각박하지 않은가?


*사진은 백석동천 모습(202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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